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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27화 (27/115)

#27화

“황태자 전하.”

잠행복 차림인지 모자가 달린 망토를 입었다. 일단 가볍게 예를 차리자 그도 묵례로 답했다.

“공녀. 이 책을 찾으러 오셨나요?”

황실에 있어야 할 그가 여기에서 내가 찾으려는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나 당황스럽지만 일단 그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습니다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쩐 일이신지요?”

“공녀께서 별의 꽃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성전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찾고 계셨나요?”

그렇다면 검색 마법을 쓰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의 의도를 알아내기 전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네. 공녀님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책을 책장에 꽂아 넣고 질문을 던졌다.

“왜 에카르트를 도우려고 합니까? 이전에는 그의 치료를 위해 동방으로 가려고까지 하셨죠.”

“그건….”

“아니면 그저 제국을 벗어나려고 했던 겁니까?”

황태자까지 그때의 일을 추궁하다니! 그럴듯한 할 말을 찾는 사이에 또 정곡을 찔렸다.

별의 꽃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뒤늦게 추궁하는 건가. 다비온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걱정 마십시오. 비밀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렇기에 황실 밖으로 나온 겁니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도 전부 솔직하게 답하기는 곤란했다.

나는 제국군으로 여러 전장을 돌아다닌 데다, 백마법사 증명서가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 전력이 제국을 벗어나는 게 달가울 리가.

“에카르트의 저주를 치료하려는 마음은 진심이에요. 별 이유 없어요.”

“그렇습니까.”

“제국을 떠나려는 이유는 여러 왕국을 둘러보며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고요. 견문을 충분히 쌓은 후 다시 돌아올 겁니다.”

물론 돌아오겠다는 뒷말은 거짓이었다. 그런데 그는 묘하게 안도한 눈빛이 되었다.

“제국에 복귀해 달라고 무리하게 부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신가요?”

“네. 공녀의 행복을 위해 견문을 쌓으십시오. 군주는 제국민이 따르기에 앞서 행복하게 만들 의무가 있으니까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면 기꺼이 떠나셔야죠.”

“제국이 좁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어요!”

확대 해석으로 오해를 살까 봐 손사래를 내젓자 다비온이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

“…하하?”

나는 교수님의 비위를 맞춰 주는 대학원생처럼 웃었다.

“공녀님. 저는 선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도 그래요.”

악인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빙의한 후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루솔릿 공작가, 에카르트, 블랑세는 각각 다른 의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만약 선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블랑세는 “너 그런 사람 좋아해?”라고 마이 웨이로 집착할 테고, 에카르트는 “저 정도면 착하지 않습니까?”라고 뻔뻔하게 말할 터였다. 물론 루솔릿 공작가는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래서 눈앞의 다비온이 한없이 정상인처럼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 잘사는 건 이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요.”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고 눈썹이 서글프게 내려갔다.

나는 그의 뜻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저주를 해결하면 에카르트가 마검의 힘에 지배당하지도 않을 테고 제국 역시 건재한다. 그 후에는 좋은 군주가 필요하겠지.

“아니에요. 군주란 이상을 실현시키는 사람인걸요.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선인도 잘살아 가는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고 믿어요.”

“…….”

깨끗한 하늘처럼 맑고 순해 보이는 그 눈이 문득 결연한 빛을 띠었다.

“공녀님. 별의 꽃은 제가 따로 드리겠습니다.”

***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지만 다비온은 에카르트에 대해 여러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다비온의 어머니, 황후 아렌다는 엄격했다.

다비온이 다섯 살일 때. 아렌다는 그를 데리고 직접 북부를 찾아,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을 보여 주었다.

“보거라. 북부만큼 혹독한 곳이 황실이다.”

어린 다비온은 잔혹한 풍경을 보고 덜덜 떨었다.

마수들의 괴이한 비명에 귀가 먹먹했고 날카로운 파편이 성벽을 관통했다. 그 와중에도 에비게일 크로덴. 선대 공작인 그녀는 익숙한 듯이 마검으로 전장을 휩쓸었다.

“다비온. 살아남으려거든 저들보다 더 강해져야 해.”

아렌다는 다비온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혹독하게 다그쳤다.

다비온이 에카르트를 다시 만난 건 선대 공작 부부의 장례식에서였다.

검은 정장을 입고 묵묵히 애도사를 듣던 소년. 홀로 모든 것을 떠안은 그의 얼굴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 차갑고 슬퍼 보였다.

선대 공작 부부가 서거한 후. 황제는 에카르트를 황실로 불러 다비온과 함께 검술을 배우게 했다.

“잘 부탁해, 에카르트.”

“그래.”

다비온이 손을 내밀자 에카르트는 반말로 답했다.

황태자는 도저히 어린 공작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에카르트는 여러 종류의 검뿐만 아니라 활, 창, 철퇴까지도 뛰어나게 다뤘다.

다비온은 에카르트에게 저도 모르게 푸념했다.

“나는… 약하구나.”

“굳이 강할 필요도 없어.”

소년은 냉정하게 말했다. 마검의 지배자로 불린 그의 어머니는 너무 쉽게 죽었기에 그렇게 단순하게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늘 강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다비온에게 그 위로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에카르트를 알아 갈수록 다비온은 그를 동경하기도 했다. 저만큼 많은 의무에 시달리는 모습에 누구보다 마음 쓰일 때도 있었다.

황태자로 책봉된 어느 날이었다. 에카르트를 만나서 수련하기 위해 숲으로 향하는데, 순식간에 그의 호위 기사들이 쓰러졌다.

그럼과 동시에 다비온이 별안간 복면을 두른 자객들에게 둘러싸였다.

“이 금발, 황태자 맞지?”

“황실 기사들도 별거 아니었군.”

“길게 끌지 말고 죽이자고.”

자객 중 하나가 피 묻은 검을 휘둘렀고 다비온은 검을 뽑아 맞서려고 했다.

하지만 단 세 합 만에 그는 나동그라졌다. 칼날이 반짝하며 그의 목을 가르려던 그때. 자객의 칼은 손목과 함께 날아갔다.

“으아악!”

어느새 다비온의 곁에는 제 키만 한 마검을 들은 에카르트가 서 있었다.

“에카르트!”

“굼벵이 같은 놈. 왜 안 오나 했더니.”

퉁명스럽게 말한 그는 곧바로 나머지 자객들을 하나씩 베어 냈다.

제 어머니가 그의 능력을 배우라고 했지만 다비온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목숨을 빚졌으므로 언젠가 그를 돕기를 바라 왔다. 그것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른다고 해도 말이다.

***

“네에? 전하께서요?”

뜻밖의 제안에 이게 웬 말인가 싶어 눈만 깜빡였다. 설마 그도 정상인이 아니었던 건가.

“잠시 눈을 감아 보세요. 소매 끝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네.”

나는 미심쩍게 눈을 가늘게 뜨다가 결국 살짝 감았다. 밖에 에카르트도 있는데 설마 무슨 일 있겠나 생각했다.

다비온이 가볍게 내 소매 끝을 잡아당기자 곧 꽃향기가 몸을 감쌌다.

눈을 뜨자 환하게 빛나는 언덕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전부 반짝이는 꽃들이었다.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넓게 펼쳐졌다.

“여기는 어딘가요?”

“제 아공간이에요. 황실의 특수 마법으로 만든 공간이죠. 꽃은 저쪽에 피어 있습니다.”

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비온이 앞장서서 걸었다.

이 공간을 빠져나갈 방법도 없으니 일단 따라서 언덕을 올랐다.

정상까지 오르자 꽃무더기 속에서도 눈에 띄는 커다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수십 장의 꽃잎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듯 황금색으로 빛났다.

“이것이 별의 꽃입니다.”

나는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할 말도 잊고 매혹됐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찾고 물어봤다.

“정말 주시는 건가요? 이전에 황제 폐하께서는 거절하셨다고 했는데….”

“폐하와 저의 뜻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공녀라면 드려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별의 꽃이 있다면 곧바로 에카르트를 치료할 수 있다. 어차피 그보다 더 높은 황족들에게는 달의 꽃이 있으니 말이다.

다비온이 무릎을 굽히고 천천히 꽃을 따려고 했다.

“잠시만요!”

나는 잽싸게 꿇어앉아 별의 꽃을 붙들었다. 순간 황태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꽃잎 한 장을 떼어 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의를 그렇게 갚고 싶진 않았다.

“죄송하지만, 결정을 보류해 주세요.”

무턱대고 호의를 받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신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나중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면 누구에게도 빚이 없어야 했다. 상대가 황족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저를 위해 하신 일이지만 제가 꽃을 빼돌렸다고 의심을 살지도 모릅니다. 공식적으로 밝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뜻이 다르니까요. 에카르트의 친구로서 무슨 일이든 하고 싶습니다. 그가 저주에서 낫길 바라고요.”

따뜻한 눈동자와 상냥한 본성이 느껴지는 선한 목소리였다.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도와주려고 하다니. 황실에서 별의 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에카르트에게 소홀했다고 오해한 게 미안해졌다.

‘하긴 원작에서 에카르트가 저주에 휩쓸려 숱한 인명 피해를 내도, 계속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지.’

남주는 원작 그대로 같았지만, 사람에 따라 입장의 차가 있기에 호의를 냉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전보다 도망치는 데에 덜 급급해졌다.

둘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해도 걱정하는 마음이 약간 더 커졌다. 조금 더 늦게 도망치더라도 더 나은 수단을 사용하고 싶었다.

“황태자 전하. 저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를 듣고 싶어 하는 다비온을 향해 정중히 말을 이었다.

“크로덴 공작님의 어깨는 지금도 무겁습니다. 나중에 폐하께서 별의 꽃의 행방을 찾으시거든, 지금의 일로 인해 더 많은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에카르트 외에 그 꽃을 사용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백 년간 꽃은 보존되었고 10년 안에 다시 꽃을 틔울 수 있었다. 그래도 미래의 일은 모르는 법. 나뿐만 아니라 에카르트까지 발목 잡힐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시다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다른 작전을 생각했다. 빚이 안 남을뿐더러 다비온도 부담이 적을 방법 말이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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