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설픈 발언으로 곤란해하고 있던 그때 니나가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나를 변호했다.
“공녀님께 예의를 지켜! 공녀님,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녀가 따끔하게 하녀들을 야단쳤지만 그래도 하녀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괜찮아요, 니나. 제가 잘못 말한 탓이죠.”
“아니에요! 정말이지, 다들 생각을 그렇게밖에 못 한다니까요. 우리 공녀님을 하나도 몰라!”
니나는 마치 제 일처럼 열변을 토하다가 은근슬쩍 귀띔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으니까요.”
“네?”
“공녀님께서는 원하시면 언제든, 누구든! 남녀노소 모두 사로잡으실 테니까요. 아니. 아시다시피 노소는 안 돼요.”
“아, 네….”
그러더니 니나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인연이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녀들과 대화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어서 잘 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에카르트를 찾아갔다.
“어머, 오늘은 공녀님께서 먼저 오셨네요.”
간신히 오해를 풀었는데도 하녀들이 소곤소곤했다. 나는 태연하게 방을 노크했지만 자꾸 누군가 엮어 주다 보니 에카르트를 의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나가 알려 준 방법대로 치료를 시작한 후 요즘따라 그를 보면 자동으로 가슴, 아니, 저주의 무늬가 생각났다.
“시엘리나?”
들어오라는 인사말 대신 문이 벌컥 열렸다. 일찍 일어났는지 에카르트는 이미 말끔한 얼굴이었다. 깔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에카르트. 마차 좀 빌려 주세요.”
“어디 가십니까?”
잘생긴 얼굴에 어려 있던 은은한 미소가 가셨다. 동방으로 도망치려던 전적이 추가되어서인지 그가 나를 순순히 보내 줄 리 없어 보였다.
“성전이요. 별의 꽃에 관해 기록한 책이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성전 서고에는 희귀한 마법서들을 보관했다. 그리고 황족이나 성전 고위 관계자, 혹은 증명서를 받은 백마법사에게만 출입을 허가했다.
별의 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기록한 책도 있을 것이다. 꽃을 구하지 못하는 이상 대체할 재료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럼 같이 갑시다.”
에카르트가 다가와 미리 에스코트하듯 태연히 팔짱을 꼈다. 내가 슬쩍 팔을 빼냈더니 이번에는 손을 붙잡았다.
“당신 휴가는 언제 끝나요?”
“글쎄요. 이참에 은퇴할까 생각 중입니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그가 순순히 나를 보내 줄 것 같지는 않아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에카르트. 당신은 변장하면 좋겠는데요.”
“…제가 부끄럽습니까?”
“그럴 리가요! 당신이 오면 너무 눈에 띌까 봐 그래요.”
‘사실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성전에서 나와 에카르트를 두고 이야기가 나오는 게 싫어서였지만, 일단은 적당히 둘러대자 그는 뭔가 의아한지 중얼거렸다.
“눈에 띄는 건 당신인데.”
“네?”
“아닙니다. 어쨌든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이후에 에카르트는 후드가 달린 검정색 로브를 걸쳤다.
로브를 쓰자 185cm는 넘는 키가 한참 줄어들더니 얼굴도 어리게 변했다. 열두 살쯤의 귀엽고 잘생긴 소년 같아졌다. 정체를 숨겨 주는 잠행용 로브였다.
“에카르트 같지 않네요.”
“칭찬입니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저 웃기만 했다.
마검도 안 들고 분위기도 숨기니 평범한 소년이지만 역시 잘생겨서 눈에 띈다. 그래서 로브에 달린 모자를 들어 에카르트에게 씌워 줬다.
“이러면 되겠어요.”
그리고 사심을 담아 그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두 시간 후. 크로덴 공작가의 마차가 성전에 도착했다. 나는 에카르트에게 유치원 선생님처럼 말했다.
“손잡을까요? 성전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요.”
“네.”
우리 흑막에게 이렇게 귀엽고 무해한 시절이 존재했다니.
그와 유년 시절을 함께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신기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작아지니 덜 무섭기도 하고 좋았다.
“블랑세도 어려지면 귀여워 보이려나.”
“…그 여자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방금 덜 무섭다는 말은 취소였다. 이미 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내 키가 더 큰데도 내가 밀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저도 모르게…. 이따 초콜릿 사 줄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네에.”
나는 분수를 잘 파악하자고 결심 또 결심했다. 그렇게 얌전히 성전 복도를 걸을 때.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과 마주했다.
바로 백마법사 수습 동기인 조시였다. 면도도 하지 않아 수염이 너저분했고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었다. 바쁜 백마법사들은 죄다 저렇게 생겼지만 말이다.
“여긴 웬일입니까, 시엘리나 공녀.”
“아, 예. 안녕하세요, 조시.”
조시는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마검으로 북방을 수호하던 크로덴 공작을 오랜 시간 동경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에카르트를 치료하던 백마법사가 나란 사실이 알려진 후 조시는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
내가 단장에게 뇌물을 줘서 단장이 나를 백마법사로 추천했다나, 뭐라나.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더니, 지금도 내가 못마땅한지 계속 들먹거리고 있다.
“어라, 어라. 크로덴 공작님을 그렇게 쫓아다니고도 아직 일자리를 못 구했나요?”
내 옆에 있는 남자가 바로 크로덴 공작이라는 걸 몰라보다니.
‘덕질도 착하게 해야 계를 타는 모양이야.’
“게다가 저 꼬마는 뭡니까. 숨겨 둔 아이?”
“머리가 나쁘니 상상력도 빈약하시네요. 시간 아까우니 가 볼게요.”
나는 에카르트가 조시의 몸을 이등분하기 전에 슬슬 자리를 뜨기로 했다.
“공녀.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더 얘기 좀 합시다.”
조시가 난데없이 나를 붙잡을 찰나. 에카르트가 난입해 조시의 팔을 붙들어 순식간에 뒤로 꺾어 버렸다!
“으아-악!”
우두둑 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조시가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거 못 놔? 무슨 꼬맹이가 힘이 이렇게 세!”
“입 다물어.”
분명 소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조시의 한쪽 뼈를 부러뜨린 거로 모자라 얼굴을 신전 기둥에 처박으려고 했다.
‘에휴, 어려지면 뭐 하나. 본체가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인데!’
“그만해요!”
내가 에카르트의 어깨를 꼭 붙들고 말하자 그는 순순히 조시를 놓아주었지만 날카로운 살기가 망토를 뚫고 나왔다.
나는 그대로 로브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잡아채고 빠른 걸음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어차피 조시는 어디 떠벌리지도 못한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은 성격인데 소년에게 무력으로 당했으니 분하기만 하겠지.
***
사람이 없는 한적한 복도까지 손을 잡고 달린 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시엘리나.”
“아, 미안해요.”
아직도 꽉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팔을 슬쩍 놓았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의 손목에 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내게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였고 나 또한 그랬다.
“에카르트. 그렇게 곧바로 폭력을 행사하면 어떡해요?”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났어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그렇지만 에카르트는 적정한 선을 모르니 문제였다. 이참에 세계 평화를 위해 그에게 가르침을 줘야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것은 좋아요. 그래도 적당히 하는 거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세계관 최강의 흑막이 내 말을 나지막하게 되풀이했다.
내 말을 따라 하는 건데도 장르가 스릴러로 바뀐 기분이었다. 상황을 모르고 취조실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상대가 소년임에도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조시 같은 놈은 별로 없었으니 괜찮아요.”
“그 개자식 이름이 조시였군요. 꼭 기억해 두죠.”
“저는 분명히….”
“네,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다시 똑같이 되갚아 주겠습니다.”
아무래도 내 설교를 잘못 이해한 듯했다. 추가로 복수하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 사이 백마법사 단장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녀는 에카르트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공작님,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여전히 막역한 모습을 보니 좋습니다.”
나는 대단하신 크로덴 공작님이 무턱대고 따라왔단 말을 삼키고 하하 웃으며 인사했다. 더불어 에카르트가 조시의 뼈를 부러뜨렸다는 이야기는 보고하지 않아도 되겠지.
“안녕하세요, 단장님. 서고에 책을 찾으러 왔어요.”
“책을요?”
“네, 공작님을 치료하는 방법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서고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단장을 선두로 우리는 긴 복도를 지나갔다.
마침내 성기사 두 명이 지키는 웅장한 문 앞에 다다랐다.
십자가 모양으로 형상화한 빛 무늬가 커다랗게 문에 그려졌고, 손잡이 역시 상단과 하단 부분에 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입장하려면 아시다시피 표식이 필요합니다.”
표식이 문의 마법진과 반응하면 결계가 해제되어 입장할 수 있었다.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표식은 사라지고, 재입장하려면 다시 마법을 걸어야 했다.
“표식은 손등에 그려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단장이 지팡이를 꺼내 내 손등 위에 작은 마법진을 그렸다. 책갈피 모양의 마법진이 도장 같았다. 에카르트 역시 은근슬쩍 단장에게 손을 보여 줬다.
“죄송하지만 공작님이라고 해도 성전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이 불가합니다.”
“크로덴 가문에서 성전에 상당한 기부금을 납부했을 텐데.”
또 협박이나 무력으로 상황이 해결되기 전에 나는 냉큼 나섰다.
“에카르트. 저 곧바로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대기하겠습니다. 단장님과 겸사겸사 대화도 나누고요.”
에카르트의 말에 단장이 내게 구조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에 나를 접견실로 밀어 넣은 전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히죽 웃고 단장을 외면한 채 서고로 들어왔다.
서고는 창문이 없어서 마정석으로 불을 밝혔고 생각보다 넓었다. 책장은 수백 개였는데 희귀한 책을 일반적인 책들 사이에 끼워서 보관했다.
일일이 책을 뒤져 보는 대신 검색하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표식을 반대편 손으로 덮고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별의 꽃, 별의 꽃….’
손을 떼자 표식이 짙어졌다. 동시에 바닥에 빛나는 화살표 모양이 생겨났다. 마치 이전 세계의 내비게이션 같은 기능이었다.
황실 도서관이나 성전 서고처럼 특별한 장소는, 원하는 책의 위치를 검색 마법으로 알려 준다. 물론 손등의 표식이 있어야 마법이 작동했다.
‘저쪽에 있구나.’
나는 화살표가 알려 주는 방향대로 걸어갔다. 표시가 끝나는 지점까지 도착한 나는 멈칫했다.
그 자리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