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시스 자작. 그리고 아리타 소남작.”
“……!”
그들은 내가 이름을 알고 있어서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무도회에 오기 전에 귀족의 이름과 얼굴을 전부 파악해 뒀다. 사교회에서 생존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제가 바빠서 사교계에 잘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제국을 수호하는 공작님을 두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이야. 그분의 전우로서 정말 속상하네요.”
나는 순식간에 에카르트를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안 좋은 오해는 쉽게 퍼져 나가기 마련이니까. 그러자 시스와 아리타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타만.
“크로덴 공작님께서는 조실부모하셨지요?”
시스 자작은 내가 일부러 곤란해지길 바라듯 본인도 아는 사실을 물어봤다. 나는 그를 하찮게 바라보았다.
“혹시 자작도 없으신가요? 아니면 기억력이 좀 안 좋으시다든가.”
“네?”
“보통 본인에게 있으면 상대방에게 없는지 안 물어보잖아요.”
“무례하군요.”
“먼저 물어보시기에 똑같이 여쭸을 뿐인데. 본인 행동 잘 알고 계셨네요.”
스스로 운명을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일찍이 부모를 잃었다는 말을 욕으로 사용하고 싶을까. 아리타가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좀 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디 에카르트 님께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이딴 사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둘에게 더욱 확실하게 경고한 후 넘어가기로 했다.
“뒷말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당사자도 알게 되는 법이죠. 다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공작님께 두 분의 이름을 말씀드리고 책임을 묻겠어요.”
“아,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네.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책임지겠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저희밖에 모릅니다.”
예의상 미소를 짓는 대신 나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저들이 라멜과 뒷말을 나누기 전에 해산시키기로 했다.
“그럼, 이제 파티를 마저 즐기시길.”
이제 꺼지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시스와 아리타는 예를 한 번 갖추더니 허둥대며 흩어졌다. 악역 동생과 남게 된 나는 한 번 혀를 찼다. 그리고 지팡이를 꺼내 따뜻한 바람을 불게 하는 마법을 사용했다.
라멜의 물기가 서서히 말랐다.
“그러게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의미 없는 짓 그만하고 네 인생 살아.”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에카르트가 분수대에서 기다릴 테니까. 아무리 흑막이라 해도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 내서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건 싫었다.
***
“시엘리나!”
분수대 앞에 서 있던 에카르트는 나를 발견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역시 쑥덕대는 이야기를 못 들은 건가, 아니면 선대 공작의 흔적을 찾게 되어서?
“에카르트. 라멜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그 애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뇨, 저야말로 당신의 동생인데 좀 더 상냥하게 대할 걸 그랬습니다. 신경 쓰였을 텐데 미안합니다.”
이렇게 사과를 쉽게 하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뭘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라멜이 잘못했던데요.”
“…….”
그러자 에카르트가 어딘가 부드러우면서도 쑥스러운 듯이 미소 지었다.
제국을 무너뜨린 흑막이 아니라 그저 제 편을 들어줘서 기뻐하는 평범한 사람처럼.
“시엘리나. 무도회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팔찌를 찾게 되어서요?”
“아뇨. 당신 덕분에요.”
뜻밖의 대답에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는… 한 게 없어요.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별의 꽃은 얻기 어렵다더군요.”
“그건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서 당신을 치료할게요.”
이 순간만큼은 하루빨리 달아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저주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후 무도회는 별 탈 없이 흘러갔고, 나는 에카르트와 평범하게 만찬을 즐겼다.
물론 말을 걸어오는 남녀불문 귀족들이 있었다. 갈색 머리에 앳된 얼굴의 여자가 내게 와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시엘리나 공녀님. 이전에 티파티에서 봤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오랜만이네요, 벨라 백작 영애. 더 아름다워지셨어요.”
나는 시엘리나의 기억과 원작의 묘사를 되짚어 보며 잽싸게 처신했다.
글로리아 벨라는 이전에 시엘리나의 악행을 돕던 엑스트라 귀족 중 하나였다. 시엘리나가 뱃놀이를 하며 블랑세를 빠뜨릴 때 허위 증언을 하기도 했지.
내가 빛의 성전에 들어간 바람에 그동안 만날 기회가 없어졌지만 말이다.
“공녀님. 이제 사교계에 복귀하시는 건가요? 전장으로 떠나신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글쎄요. 확답을 드리긴 어렵네요.”
“그래도 앞으로 더 자주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
간신히 글로리아가 떠난 후에도 또 여러 귀족이 내게 다가왔다.
“백마법사가 되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계속 백마법사로 활동하시는 건가요?”
“루솔릿 공작가로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공녀님, 드레스는 어느 의상실에서 맞추셨어요? 보석도 어디서 구매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게 기자회견인지 무도회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가 부담스럽고 뭐부터 답할지 고민할 때. 갑자기 모두가 겁을 먹고 후다닥 자리를 떴다.
뭔가 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에카르트가 싸늘하게 그들을 응시하던 탓이었다.
“시엘리나. 이만 갈까요?”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지금, 이 순간만은 어떤 누구보다 우리는 뜻이 맞았다.
마차에 타서 단둘이 남게 된 후에야 나는 긴장이 풀렸다. 차라리 에카르트와 있을 때가 덜 불편할 줄이야.
무도회장에서 에카르트는 내가 함께 와서 좋다고 했지.
‘나는….’
라멜과 얽히고 황태자에게 원하는 답을 못 들었지만, 나도 에카르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됐다. 내가 편을 들어주자 기뻐하는 모습. 그게 나쁘지 않았다.
***
에카르트와 시엘리나를 태운 마차가 공작성 앞에서 멈춰 섰다.
“주인님, 도착했습니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기에 마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에카르트는 검지를 자신의 입술 위에 올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에서는 시엘리나가 에카르트의 재킷을 덮고서 어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마검의 지배자의 품에 안겨 저렇게 편히 잠들다니.’
마부는 신기하면서도 둘의 모습이 보기 좋아 문을 조심히 닫아 주었다.
***
다비온은 복잡한 결계가 걸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는 황후가 뒷짐을 진 채 창문 너머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비온이 접견실에서 있던 일을 보고했다.
“공녀의 부탁은 거절했습니다.”
“잘했다.”
다비온은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아 있었다.
“한데 그것이 에카르트를 위한 일이 맞습니까?”
그러자 황후가 긴 금발을 넘기며 뒤를 돌았다. 인상을 찌푸린 탓에 그녀의 주름이 깊어졌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에카르트는 선대 크로덴 공작보다도 뛰어나니까요.”
“…그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곤란해.”
황후는 에카르트를 견제했다.
제국에 차기 황제인 다비온보다 영향력이 크고 강력한 자가 있으면 위험했다.
마검의 저주는 에카르트가 위협이 된다면 언제든지 막을 최소한의 구속구였다. 그랬기에 황실은 오랫동안 선대에게도 성전 백마법사를 지원하는 최소한의 조치만 취했다.
일부러 백마법사를 붙여서 힘을 감시하기도, 저주의 완급을 조절하기도 했다. 그건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물론 별의 꽃을 거절한 건 황후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자 다비온이 씁쓸하게 물어봤다.
“제가 에카르트보다 더 강해지면 그의 저주를 풀도록 도와주실 겁니까?”
“강하다는 걸 입증해 보거라. 왕국을 정벌한 거로는 부족하다.”
“전장의 승리는 제 실력을 입증한 수단이 아닙니다.”
다비온은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현장을 떠올리면서 씁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황후가 다가와 번뜩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나약한 소리 말아라! 너는 왕도를 걸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의 다그침에 다비온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참고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내 너를 믿는다.”
황후가 어깨에 올린 손의 힘을 풀었다.
“만약 시엘리나 공녀가 저주를 풀 다른 방법을 알아내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저지하겠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에 다비온이 결단력 있게 주먹을 쥐고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 맡겨 주세요. 어머니께서 나서기 전에 처리하겠습니다.”
***
피곤해서 잠시 마차 안에서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에카르트에게 기대고 있었다.
잠에서 깬 나는 퍼뜩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글쎄요. 시간을 재 보진 않았습니다. 곤히 주무셔서 깨우지 않았어요.”
창문 밖을 보니 마차는 이미 공작성에 도착했는데 일부러 깰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다.
“꽤 오래 잠들었을 텐데 안 불편했어요?”
“그럴 리가요. 좋았습니다.”
“제가 머리에서도 마력이 나오던가요.”
설마 내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나. 집중해서 마력을 모아 봤지만 역시 손끝에만 빛이 감돌 뿐이었다. 에카르트 역시 아리송한 눈빛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게 기대신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어요.”
“…혹시 치료가 필요하세요?”
“그건 아닙니다. 피곤하실 텐데 이제 쉬러 가십시오.”
치료까지 거절하다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스러웠다.
마차 문이 열리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내리기 전에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음, 어쨌든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피곤하시면 안아 드릴까요?”
“그 정도로 체력이 약하진 않아요!”
어느새 공작성이 익숙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귀빈실에 다다랐다. 그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쥐어서 들고 입을 맞췄다.
“좋은 꿈꾸십시오.”
어두운 복도에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으로 들어오자 하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졸리지도 않는지 음흉한 웃음을 짓고서 날 반기며 말이다.
“공녀님, 어서 오세요!”
“다들 안 주무셨어요?”
“그럼요!”
그들은 히죽 웃으며 에카르트의 재킷을 걷고 내 드레스를 벗겼다.
“공녀님, 후훗…. 마차에서 뭐 하시느라 늦게 내리셨어요?”
“저희가 창문 너머로 다 봤다구요. 마차가 두 시간 동안 그대로 멈춰 있더라고요!”
이들에 왜 이렇게 신났는지는 몰라도, 비몽사몽한 탓에 별생각 없이 답했다.
“그냥 잤는데요.”
“…….”
그러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곧 모두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순식간에 귀빈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어머, 어머.”
“어쩜 좋아!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네?”
나는 몇 초가 더 흐른 후에 내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잠시 어깨에 기대서 잤다고요!”
급히 정정했지만 늦었다. 하녀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겠다면서 부끄러워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