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대로 이어진 크로덴 공작가의 아픔이 해결될 수 없었겠지. 그러니 수백 년이 지나도 오직 백마법사에게 의지하는 방법뿐이었으리라.
에카르트는 홀로 수천의 마수를 섬멸하는 무적의 전쟁귀.
검을 들면 악마처럼 날뛰고 검을 내리면 차가운 피가 흐르는 마검 그 자체인 사람.
하지만 저주의 힘이 강해지면 그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된다.
그가 괴로워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강한 만큼 의지할 곳 없는 그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다비온에게 따질 일은 아니겠지.
“답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엘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려던 그때 다비온이 말을 걸어왔다.
***
분수대의 물소리도 에카르트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지 못했다.
‘황태자와 이야기는 잘 나누고 있는 건가.’
머릿속엔 오직 시엘리나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황태자와 접견실로 들어간 지 5분째. 인내심에 슬슬 한계가 찾아왔다.
사실 그는 기분이 미묘하게 안 좋았다.
시엘리나가 자신과 사귀지 않는다고 답할 때, 심기 한쪽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백마법사일 뿐 자신의 연인은 아니었다.
‘사실인데도 왠지 불쾌하군.’
그는 분수대에 가볍게 걸쳐 앉았다가, 쩌적 금이 가는 소리에 손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힘 때문에 대리석이 가루가 되고 있었다.
‘힘 조절을 하라고 하셨지.’
자신의 소행이 아닌 척 분수대에서 슬쩍 일어나던 그때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붉은색 머리를 땋은 스타일, 비슷한 색상의 드레스 때문에 순간 시엘리나라고 착각할 뻔했다.
“어라, 언니가 아니라 실망하셨나요?”
라멜이 다 알고 있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무슨 일인가?”
에카르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반응하자 라멜은 입을 삐쭉였다.
“무도회인데 몇 마디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안 되나요?”
“굳이 이야기 상대로 나를 고를 필요는 없지.”
“이런.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라멜이 품에서 레드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금팔찌를 꺼냈다. 며칠 전에 공작성 지하에서 찾은 물건이었다.
그 안쪽에는 에비게일 크로덴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비게일 크로덴.
마검의 주인이었던 선대 크로덴 공작이자 에카르트의 어머니였다.
역대 마검의 주인들 중 가장 제어와 활용을 잘하였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공작이자 기사였다.
공작성이 전소된 바람에 선대의 유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다. 라멜은 이 팔찌가 왜 루솔릿 공작가 지하에 처박혀있는지는 몰라도 흥미를 끌어내기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지?”
역시나 에카르트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면 분명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비로소 관계의 우선권을 쥐게 되었다고 생각한 라멜이었다.
“크로덴 공작님께도 중요한 물건인가 보군요.”
“…….”
“팔찌는 드릴게요. 대신 우리, 친구 된 거 맞죠?”
그러자 에카르트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고, 이내 비스듬하게 라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뭔 개소리를.”
“…개소리요?”
“일개 공녀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일순 에카르트의 붉은색 눈동자는 핏방울 같은 것을 넘어 새빨간 핏덩이처럼 변했다.
적의를 넘어선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라멜은 여전히 이 맹수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하게 지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요?”
“감히 어머니의 유품을 빌미로 나를 협박하려고 들다니.”
칼날 같은 목소리에 라멜은 이가 맞부딪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평민 마을의 시정잡배나 나약한 루솔릿 공작성의 기사에 비할 아우라가 아니었다. 마치 곧 처단할 표적이 된 기분이었다.
‘서, 설마 이 자리에서 마검을 소환하겠어.’
라멜은 공포 때문에 몸이 굳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 후회했지만 늦었다.
에카르트가 손쉽게 라멜에게서 팔찌를 낚아챘다. 라멜은 그가 더 이상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겁먹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
그때 뭔가 발목에 걸렸고 순식간에 라멜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꺄악!”
첨벙, 라멜이 분수대에 빠지며 물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고 홀딱 젖었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동요하는 대신 재킷 안쪽에 팔찌를 챙겨 넣기만 했다.
“손… 안 잡아 주세요?”
라멜이 벌벌 떨면서도 처연하게 물어봤다. 이 상황에서도 관심을 갈구하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얕은 물인데 도움이 필요한가?”
라멜은 냉정한 대답을 듣고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졌다. 물에 젖어서가 아니었다. 에카르트를 향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 공녀님! 괜찮습니까? 제 손을 잡으시지요.”
그때 상황을 눈여겨보던 남자 귀족 두 명이 다가와 라멜을 부축하고 재킷을 벗어 주었다. 라멜은 가녀릴 정도로 떨며 에카르트에게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숙녀의 곤경을 모른 척하다니.”
그러고는 연약하게 기침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귀족 둘은 분수대에서 거리가 멀어지자 라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국의 수호자가 그렇게 냉혹한 남자였다니 다시 보게 되었어요.”
그들은 이 기회에 예쁜 공녀의 환심을 사고자, 사정도 제대로 듣지 않고 에카르트를 비난했다.
“라멜 님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애초에 피도 눈물도 없다는 크로덴 공작이잖습니까.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읜 바람에 아무리 제국의 수호자라도 어딘가 문제가 있던 거죠….”
***
“제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다비온은 헤어지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했지만 큰 기대는 들지 않았기에, 나는 예의상 고맙다고 하고 접견실을 나왔다.
혹시나 그가 나를 따라 나올까 싶어 가는 길에 뒤를 돌아봤지만,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
‘에카르트에게 괜히 기대를 품게 한 건가. 별의 꽃은 반드시 필요한데. 아주 소량이라도 말이야.’
괜히 더 미안한 마음으로 나는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어디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전장에만 있어서 사회성이 없나 봅니다.”
“괜히 마검을 다룬다는 악마가 아니죠. 애초에 그 가문은….”
누군가 에카르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자 라멜을 둘러싼 두 남자 귀족과 마주쳤다. 라멜이 쫄딱 젖은 생쥐 꼴로 두 남자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
“언니!”
무슨 일인가 눈을 깜빡깜빡하는 동안 라멜이 자석처럼 착 달라붙었다.
그러자 두 남자 귀족이 가볍게 목례했다. 나도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라멜, 무슨 일이야?”
“…….”
“어서 말해 봐.”
나는 라멜을 밀어내며 말했다. 내 드레스까지 젖었지만 다행히 마법 작물로 만들었기에 금세 말랐다. 라멜은 찡찡거리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크로덴 공작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공작님이 겁을 주신 바람에 분수대에 빠졌어.”
“뭘 어떻게 하셨기에?”
속으로 쌤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짐짓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공작성에서 우연히 선대 공작님의 팔찌를 찾게 됐거든. 의미가 클 것 같아서 돌려드리려 했는데…. 내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라며 다짜고짜 팔찌를 뺏어가셨어, 흑.”
팔찌라니 이 또한 원작에 없던 내용이었다.
이 세계의 흐름은 어느 정도 알았지만, 나도 모르는 설정들이 몇 가지 존재했다. 예를 들면 내게 마력이 있는 것 말이다.
그 팔찌에 다른 쓰임새가 있을지 지금으로선 예측하기 어려웠다.
“공작성 어디?”
“응? 그냥 방에서 굴러다니던데.”
라멜이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대체 무슨 방인지 꼬치꼬치 따지기도 뭣하고.
‘얘는 누가 보면 천사표인 줄 알겠네.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야겠어.’
저 남자 귀족들이 에카르트를 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황실이 저주를 해결하는 일에 비협조적이라 미덥지 못했는데. 이젠 다른 사람들이 라멜에게 속아 에카르트를 비난하자 기분이 상했다. 까도 내가 깐다는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라멜의 증언보다 에카르트를 믿었다. 마검으로 베겠다니 뭐니라고 협박해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라멜. 공작님이 팔찌를 뺏으며 널 밀쳤던 거야?”
“그, 그건 아니고.”
혼자 넘어졌고 에카르트는 일으켜 주지 않았을 뿐이겠지.
“라멜, 물론 놀란 마음은 이해하지만 유품을 들고 장난치면 안 되는 게 상식이잖아. 곧바로 돌려드렸어야지.”
“나는 장난치지 않았어!”
“글쎄. 너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목걸이를 갖고도 장난쳤잖아.”
내가 시엘리나의 기억에 남은, 라멜의 악행 중 하나를 곧바로 폭로했다.
“뭐?”
“그러다 웃으며 호수에 빠뜨렸고 결국 그 목걸이는 찾지 못했지. 모든 사람들이 그런 장난을 용서하는 건 아니야. 나도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데….”
나는 라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마음 넓은 언니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라멜과 한편이 되어 에카르트를 욕하던 남자 귀족들도 당황했다. 이참에 그들을 응시하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리고 에카르트 님은 라멜에게 일부러 매정하게 대하신 거예요.”
“일부러요?”
“아시다시피 제 동생은 인기가 많아요. 사교계에서 회자가 되는 두 명의 남녀가 분수대에서 함께 젖어서 나온다면….”
“헉…!”
“이상한 소문이 나기에 십상이죠. 에카르트 님은 라멜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배려하신 거랍니다.”
“그런….”
“그분은 여지를 남기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그러자 귀족들은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고, 라멜은 얼굴이 빨개져서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지라니!”
이 또한 대놓고 폭로할까. 하지만 일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기에 라멜만 들을 정도로 속삭였다.
“너, 다나 의상실로 하녀를 보내서 카탈로그를 뒤졌잖아. 그냥 얌전히 있어. 그럼 나도 여기까지만 말할 테니까.”
그러자 라멜이 얼굴이 붉어져 입을 꾹 다물었다.
원작에서 시엘리나가 한 짓이었는데 화들짝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니 같은 수법을 쓴 게 확실했다.
이제 라멜의 시중을 들던 잔챙이 귀족의 잘잘못을 따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