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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23화 (23/115)

#23화

황제와 황태자 주변에 있는 생명력의 빛을 자세히 보려고 하니 빛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조명 때문에 착각했나.’

그럴지도. 내가 마력과 성력이 많고, 또 마법 능력도 뛰어나지만…. 그 특별한 경지는 마법사 사이에서도 이론으로만 일컬어지니 말이다.

‘그 경지에 오르면 반신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지금 그런 먼치킨이 될 필요까진 없지.’

어느새 우리의 차례가 되었고 나와 에카르트는 예를 차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도 인사 올립니다.”

약간 긴장이 된 나와 달리 에카르트는 무덤덤했다. 왕관을 쓴 황제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크로덴 공작. 시엘리나 공녀. 그간 전장에서 고생이 많았네.”

“제국의 평화를 위해 힘을 다했을 뿐입니다.”

나는 일단 제국의 일인자 앞에서 딸랑딸랑 아부했다.

그때 황제가 돌연 기침했다. 기침은 짧게 이어졌지만 모두가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황후는 손수건을 접어 황제에게 건네주고, 우리에게 대신 인사를 건넸다. 손수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오늘은 그대 같은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니 편히 즐기다 가길 바라오.”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황후가 미소 지었다. 별다를 게 없는 대화였지만, 호의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에카르트 역시 황족들에게 건조한 눈빛이었다.

참석한 귀족이 모두 황제에게 인사를 마치자 무도회가 시작됐다.

“공녀님. 혹시….”

내게 몇 번 말을 걸어오는 남자 귀족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에카르트를 보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의아하던 차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시엘리나. 우리도 춤출까요?”

“우리가요?”

“네.”

원작의 에카르트는 블랑세에게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랑세를 눈여겨보던 다비온은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고, 남주와 여주가 춤을 추며 눈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 다비온은 춤추는 대신 황제와 황후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에카르트에게 춤 신청을 받았고 말이다.

‘역시 블랑세를 초대해서 남주와 이어 줘야 했던 거 아닐까.’

하지만 블랑세의 자유분방한 그 성격대로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는 몰라도 차기 황후와 안 어울릴 것 같았다.

단순히 원작으로만 생각했을 때는 주인공들을 이어 주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친구로 생각하니 과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가에 대해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블랑세가 바라는 건 이제 뭘까?’

잠시 블랑세를 생각했더니 에카르트가 보챘다.

“시엘리나. 또 무슨 생각에 빠졌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같이 춤춰요.”

‘지금 성격대로면 알아서 잘살겠지. 내 앞길이나 신경 쓰자.’

그가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몸을 밀착했다. 좋은 향기 때문인지 그의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곧 아름다운 선율의 연주가 시작됐고 우리는 박자에 맞춰 춤을 췄다.

춤을 추는 동안 나는 일단 에카르트의 발을 밟지 않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에카르트, 춤 잘 추네요.”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괜찮아요, 시엘리나. 당신과 새로운 기억을 만드니 이전의 기억이 슬프게 느껴지지만은 않습니다. 함께 와 주셔서 좋군요.”

나는 춤을 추는 내내 그 말이 어딘가 아리게 다가왔다. 신전에서도 내가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그의 눈빛이 따뜻해 보였다면 착각일까.

무도회가 끝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생겼다. 홀 안의 귀족들이 나와 에카르트를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에카르트. 정원에서 바람 좀 쐴까요?”

“좋습니다.”

굳이 그런 시선을 느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에카르트가 다시 나를 에스코트했다.

***

무도회 홀 근처의 정원은 커다란 분수대 주변에도 마정석을 조명처럼 켜 두었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 칵테일 잔을 받아 에카르트와 술잔을 기울였다.

“맛있네요.”

“공작성으로 웨이터를 납… 고용할까요?”

“농담도 참.”

잡담을 주고받던 그때 다비온 황태자가 홀에서 나왔다.

별의 꽃에 대해 물어보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에카르트가 쥔 빈 잔에 얇은 금이 갔다.

“시엘리나. 황태자에게 할 말이 있습니까?”

“네? 그보다 그 잔-”

“아까 춤을 추면서도 줄곧 다른 사람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잔이 조각조각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되었다. 나는 설탕처럼 가루가 되어 그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한때는 칵테일 잔이었던 것을 바라보았다.

“힘 조절 좀 하랬죠. 다친 데는 없어요?”

“다친 데라. 갑자기 따가운 것 같습니다. 피는 안 나지만 혹시 모르니 어서 치료해 주십시오.”

“그래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치유 주문을 걸어 준 후 답했다.

“이전에 황태자 전하께 편지를 보낼 때, 별의 꽃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쭤봤죠. 그런데 아직 답이 없으셨으니 직접 여쭤보면 어떨까 하고요.”

“역시 저 자식을 독촉해야 했는데. 일 처리가 무능력한 굼벵이입니다.”

귀가 의심스러워지는 말이었다. 황태자에게 저 자식이라고 한 것도 모자라 굼벵이 같다니! 마검의 주인이 되면 불경죄 따위 두렵지 않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 대답을 들으러 갑시다.”

에카르트가 내 손을 잡더니 그대로 다비온에게 직행했다. 하지만 그의 앞으론 이미 일렬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잠깐, 지금은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려는 사람이 많은데요.”

“걱정 마십시오. 다 치우면 됩니다.”

에카르트의 비범한 아우라가 퇴치제 역할을 했다. 그 주위에 몰려 있던 귀족들이 눈치껏 슬금슬금 물러나며 줄을 양보했다.

양보받은 게 아니라 어쩐지 새치기를 한 기분이 들었지만 편하긴 편했다.

우리는 곧바로 다비온의 앞에 서게 되었다.

에카르트보다 키가 조금 작았고 유순하게 생긴, 2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 이런 순둥이 남주도 서브 남주에게 시달렸다고 생각하니 괜한 동질감이 생겼다.

“황태자 전하께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고 들어 올려 인사했고, 에카르트는 나와 달리 가볍게 고개만 까딱했다.

“에카르트. 그리고 시엘리나 공녀. 파티는 즐거운가요?”

다비온이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이렇게 멋진 파티에 초대해 줘서 감사하다고 해야지!

“내 백마법사 시엘리나 님께서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의례적인 대화를 주고받기도 전에 에카르트가 딱 할 말만 했다. 내가 자신의 백마법사라는 걸 강조하고 높임법도 무시한 채 말이다.

“아아, 다름이 아니라….”

나는 난처하게 말끝을 흐렸다. 역시 탁 트인 이 자리에서 묻기에는 곤란했다. 둘만 있는 곳으로 가면 좋을 텐데 말이다.

어렵사리 하려는 이야기를 눈치챘는지 다비온이 먼저 제안했다.

“잠시 접견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무도회 홀 옆에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네? 네! 좋습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에카르트가 슬쩍 덧붙였지만 나는 거절했다.

“크로덴 공작님은 여기 계시는 게 좋겠어요.”

이미 그의 붉은 눈동자가 다비온을 부숴 버릴 듯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네, 네.”

알겠다고 해 놓고 블랑세처럼 문에 귀를 바짝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에카르트는 그렇게 몰래 듣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무력을 동원하면 모를까.

그게 더 큰일인지 고민할 때 다비온이 내게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그럼 접견실로 가시죠. 에카르트가 공녀님의 말은 잘 듣는군요.”

내가 에카르트 말을 잘 듣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한숨을 내쉬던 그때 나는 뒤쪽 인파 사이에 섞여 있던 라멜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어디론가 후다닥 걸어갔다.

“시엘리나 공녀?”

잠시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다비온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나는 다비온을 따라 접견실로 갔다. 에카르트의 따끔따끔한 눈빛이 뒤통수에 꽂혔다.

접견실 안은 무도회가 열리는 홀 근처에 마련된 곳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소파에 앉았다.

“앉아요.”

다비온이 신사적으로 권했다. 나는 접견실을 둘러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드릴 말씀은 다름 아니라 라멜… 아니, 이전에 별의 꽃을 허가해 주셨는지 여쭤보고자 합니다.”

내가 온 사이 라멜이 다른 꿍꿍이를 벌일까 봐 신경 쓰였더니 말실수를 했다. 다행히 황태자는 개의치 않았다.

“별의 꽃이라.”

“편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에카르트 님의 저주를 중화할 마법을 고안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우선 그의 능력을 확장하여 더 많은 마력을 투입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별의 꽃이 필요하고요.”

“시엘리나. 저 역시 당신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싶지만….”

다비온이 조용히 제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거절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요?”

내심 긍정적으로 검토할 줄 알았는데. 나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차분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에카르트는 귀중한 병력이에요. 공녀께서 고안한 마법이 성공하는 건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혹시 잘못된다면 책임질 방도도 없고요.”

“우선 소량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마검과 동일한 저주를 구현할 수 없으니 임상 실험 자체가 어려우니까요. 꽃잎 한 장이라도-”

“소량이라도 그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릅니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대답에 실망했다.

백마법사의 성력을 이용하는 방법 하나만을 수백 년째 이어 온 이유가 그게 다인가.

아니, 황실은 다른 시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황실이나 성전에서는 마검의 저주를 사라지게 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셨나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제국을 수호하는 공신인데 어째서.”

다들 크로덴 가문의 힘을 이용할 방법만 생각할 뿐 저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안중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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