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황태자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어느새 무도회 당일이 되었다.
하녀들은 나와 에카르트를 정성스럽게 치장했다. 에카르트는 본판 이목구비가 워낙 훌륭한 데다 화장을 안 해도 눈썹이 말끔하고, 입술도 붉고, 피부도 하얗지만 말이다.
빙의한 얼굴이니까 하는 말인데 내 모습 역시 완벽했다. 바다 건너왔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걸고, 한쪽 머리를 진주 장식과 함께 땋았다.
“시엘리나, 아름답군요.”
치료법을 직접 그의 몸을 만지는 방식으로 바꾼 후, 이런 칭찬이 전보다 더 낯부끄럽게 들린다.
‘다 백마법 때문인걸. 에카르트가 나를 원작의 블랑세 같은 감정으로 좋아할 리 없을 거야.’
나는 애써 흔들리려던 마음을 다 잡았다.
우리는 같은 마차에 탑승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에카르트가 유난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뇨. 아무것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는지.”
“저는 늘 그랬습니다만….”
맞는 말이었다. 그 시선을 두려움이 아닌 다른 이유로 마주하지 못한다면 내가 이상해진 거겠지.
‘우리의 관계는 그거지. 나는 백마법사. 에카르트는 내 마력이 필요한….’
환자? 동료? 친구? 나는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싶었지만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백마법이 빼면 우리의 사이는 무엇이 되는지.
황태자가 특별히 와서 준비한 워프 마법진 덕분에 황실에 일찍 도착했다. 우리를 먼저 황실에 보내 주고 본인은 따로 되돌아가는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니 어쩐지 좀 안쓰러워졌다.
“에카르트. 아까 전하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와 주신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래도 돼요?”
“당연히 되지요. 당신을 모시고 가려면 황태자 정도는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전 아무것도 못 들은 거로 해 주세요.”
워프 마법은 황실에서만 보관하는 특별한 재료가 필요한데, 전장으로 갈 때나 재료를 보급해 준다.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가 워낙 까다로웠다.
‘물론 에카르트가 나를 쫓으러 검문소로 왔을 때는 특별한 경우였지.’
황실은 별의 꽃은 물론이고 상급 마법 재료들까지 독점하다시피 했다.
국가의 중요한 전력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이기에 크게 문제나 이의가 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필요할 경우에는 골치가 아프기도 하였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여러모로 예외인가 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특혜를 주시다니. 공작님이 북부를 지키는 영웅이라 그랬을까요?”
“뭐… 아마 그렇겠지요?”
에카르트는 의뭉스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마차 안의 창문으로 화려한 황궁 궁궐 안을 흘긋 보았다. 저녁 무렵인데도 곳곳을 빛을 내는 마정석으로 환하게 밝혀 두어서 야경을 즐길 만했다.
깨끗한 말과 근사한 마차가 즐비하게 들어서고, 중앙 분수대는 금가루와 꽃가루가 떠다녔다. 참석한 귀족들의 복장도 수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무도회 의상에 신경 쓰는 부담을 줄이고자 무도회 일정을 앞당겼다고 알려졌는데….
‘그럼 그렇지.’
모두가 준비를 급하게 했으면 했지 안 사지는 않을 것이다. 남녀불문 예쁜 옷을 고르려는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갔다.
“근사하네요.”
휘황찬란한 광경과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니 작게 감탄사가 나왔다. 원래 블랑세가 와야 했던 자리라 마음이 약간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럼요. 당신을 허접한 곳으로 데려올 리가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황태자의 멱살을 잡겠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에카르트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어느새 마차가 멈췄고 그가 먼저 내렸다.
마검의 지배자의 등장에 여러 귀족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크로덴 공작님!”
“제국의 수호자를 무도회장에서 뵐 줄이야. 전쟁귀라고 알려졌는데 저런 미남이….”
“북부는 안전한 건가?”
에카르트가 등장만으로 상당한 이목을 사는 바람에, 그를 따라 내리려면 용기가 필요해졌다.
물론 그는 언제나 그랬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우리 둘은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내 얼굴을 파악한 귀족들도 소란스러워졌다.
“저 붉은 머리는…. 라멜, 아니! 시엘리나 공녀?”
“루솔릿 공작의 그분? 백마법사가 된 후로 사교계에서도 못 만나 봤는데.”
“공작님의 파트너로 오신 거야?”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실내 무도회 홀을 향해 가는 동안 많은 사람의 관심을 샀다.
‘세계관 최강자를 파트너로 두니 피곤하군.’
나도 모르게 에카르트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에카르트가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시엘리나. 사람이 너무 많으면 좀 줄일까요?”
“네? 무도회가 다 그렇죠, 뭐. 그냥 가만히 좀 있어요.”
잠시나마 그가 믿음직스러웠건만 또 무서운 말을 한다. 그때, 우리의 뒤로 마차 한 대가 더 도착했다.
“루솔릿 공작 가문의 마차다!”
나는 뒤를 흘긋 바라보았다. 마차에선 닭털 같은 옷을 입은 루솔릿 공작 부부가 나왔다.
‘리타는 없군. 아직 사교계에 데뷔할 시기가 아니지.’
나와 드레스 디자인이 비슷한 라멜이 내렸다.
‘설마.’
시엘리나는 원작에서 일부러 블랑세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었다.
‘하지만 지금 블랑세는 무도회에 빠지게 되었지. 에카르트가 여분의 초대장을 주려고 하지도 않고 나도 지금 블랑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원작 에피소드에서 블랑세의 역할은 나로 바뀌었다.
설마 라멜이 원작 악녀 포지션을 따라 하려는 걸까. 애써 억측일 거라고 넘기기엔 마음이 걸렸다.
“루솔릿 공작가와 라멜 공녀님!”
“공녀님, 파트너가 없다면 제가 파트너가 되어도 될까요?”
그녀의 시중을 자처할 잡다한 영식들이 다가갔다. 라멜은 곤란하다는 듯이 호호 웃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저는 혼자가 편해서…. 아, 시엘리나 언니!”
그녀가 정확히 나를 지목하더니 공작 부부를 두고 쪼르르 달려와 나와 합류했다. 예법을 무시하는 모습도 다른 영식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게 보였다.
“언니도 왔구나! 이렇게 만나니까 너무 반갑다.”
라멜은 다가와서 내게 팔짱을 끼려고 했다. 어디서 또 친한 척이람.
그리고 안타깝지만 내 왼쪽은 평소에 블랑세의 자리였다. 나는 슬쩍 팔짱을 빼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라멜. 옷이 비슷하네?”
“자매니까 취향도 비슷한가 봐. 신기하다! 아니면 언니가 나 따라 샀나?”
“그럴 리가.”
“이런 꽃무늬는 좀 더 어려야 잘 받는데. 그래서 그런지, 언니한테는 좀….”
자세히 들어 보니 내가 나이가 더 많다고 깎아내리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이기려고 들려고 해 봤자 타격이 하나도 없었다.
“라멜, 가는 데엔 순서 없단다.”
나는 옆에 에카르트가 있다는 것도 잊고 말했지만, 도리어 에카르트는 라멜을 당장 처리해야 할 방해물처럼 바라보는 중이었다.
“라멜. 시엘리나 공녀는 내 파트너다. 떨어져.”
“어머, 언니와 파트너인 줄 몰랐어요. 공작님께서는 정말 근사하시네요!”
“파트너인 걸 못 알아보다니. 안목은 물론 눈치까지 많이 부족한 모양이군.”
에카르트가 창피를 주자 라멜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엘리나는 에카르트 주변을 맴돌며 들이댔는데….
라멜이 시엘리나의 행동을 답습한다면, 에카르트가 마검을 운운하고 분위기가 더 흉악해지겠지. 그전에 차단해야겠다.
“에카르트. 잠시 라멜과 이야기를 나눌게요!”
“왜…. 알겠습니다.”
에카르트는 곧장 마검을 소환할 듯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사람이 없는 쪽으로 데려갔다. 에카르트에게 더 크게 협박당하는 대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뭔진 몰라도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다가 가. 공작님 성격 알지? 미리 경고하는 거야.”
“개수작이라니? 나도 공작님과 친한데….”
라멜은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칵테일 한 잔을 부탁했다.
그 칵테일 잔으로 뭘 할지는 원작을 읽은 나로서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아마 내 드레스를 더럽힐 생각이겠지.
라멜이 잔을 놓치자마자 나는 반사신경으로 칵테일 잔을 잡아챘다. 그녀의 손등에 칵테일이 묻은 것 말고는 무사했다.
“라멜, 이딴 개수작은 그만해.”
“내,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너도 알 텐데. 이만 가 본다. 가서 친구들하고 놀아.”
내가 떠나려고 하면 라멜은 발을 걸려고 할 것이다. 원작의 시엘리나가 블랑세에게 그랬듯 말이다.
역시나. 나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라멜의 발을 슬쩍 뛰어넘어서 함정을 또 모면했다. 정말이지 빙의하고 처음으로 작가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내가 뒤를 보니 라멜은 구겨진 종이처럼 인상이 엉망이었다.
라멜과 이야기를 나누던 동안 귀족 몇 명이 에카르트에게 기웃거리며 말을 걸었다.
“공작님과 공녀님이 파트너로 오시다니 정말 잘 어울립니다.”
“…….”
사회성 낮은 에카르트가 그들과 척지기 전 나는 잽싸게 끼어들었다.
“감사합니다. 크로덴 공작님은 믿음직스러운 전우죠.”
“역시! 혹시 두 분께서 교제하신 지는 얼마나 오래됐나요?”
“네? 우리는 그저 친구랍니다.”
“아아, 실례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사귀는지 안 사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적당히 해결해 줬다.
‘아닌 건 확실히 밝혀야 괜한 추측을 하지 않겠지.’
“…….”
그런데 에카르트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귀족들이 떠나고 나는 에카르트에게 속삭였다.
“아파 보이는데요. 치료가 필요하세요?”
“…지금은 아닙니다. 곧 무도회가 시작되니 들어가시지요.”
사귀는 사이로 오해받아서 기분이 상했나.
일단 그의 손을 꼭 붙들고 홀로 들어갔다. 에카르트가 평소보다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
커다란 홀. 황좌는 세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에는 황제가, 양옆에는 황후와 황태자가 앉아 여러 귀족에게 인사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남주를 멀리서 바라봤다.
다비온 에셔 윈터로드. 윈터로드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황제보다 선명한 금발에 똑같이 옅은 연두색 눈동자를 가졌다. 하얀색 제복을 입은 그는 황후와 함께 귀족들에게 계속 미소를 지어 주고 있었다.
앞에 선 귀족들이 작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황제 폐하께서 편찮으시다고 하던데.”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국정 전반을 담당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지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
황제가 연로하여 건강이 좋지 않고 황태자가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는 건, 원작을 읽었기에 알았다. 그러나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황제의 주변에 작은 원형의 빛 여러 개가 맴도는 게 보였다.
“에카르트. 혹시 저 빛 보여요?”
“네? 안 보입니다.”
‘흐음, 뭐지.’
특별한 경지에 오른 백마법사는 진찰하지 않아도, 자신보다 공력이 낮은 상대의 생명력을 곧바로 읽어 내고 조종할 수 있다.
마력을 끌어모으듯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생명력은 그 주변에 빛의 형태로 느껴진다. 한데 황제가 가진 빛의 밝기는 황태자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