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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21화 (21/115)

#21화

황당한 명령에 하녀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걸 어떻게….”

“보조로 들어가든 이야기를 주워듣든 방법이야 많잖아! 이거 줄 테니까. 다녀오라고.”

라멜은 끼고 있던 팔찌를 벗어서 하녀에게 내밀었다. 하녀는 알알이 박힌 보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

“누구…세요?”

나는 당당하게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멋쩍게 질문했다.

“아차차,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다나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 앤입니다. 공녀님의 무도회 의상을 제작하게 되었지요.”

앤이라는 이름은 얼핏 들어 봤다.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다.

‘말이 돼? 원작에서 옷은 각자 준비하려 했잖아. 블랑세가 혼자 의상실을 찾고 푸대접받던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에카르트가 앤을 거액으로 매수한 모양이었다.

‘원작의 사랑을 뛰어넘을 만큼 내 백마법에 집착하는 건가.’

오싹함을 느끼고 몸을 떨자 우리 흑막이 재킷을 벗어 내게 덮어 줬다.

“춥습니까?”

“아뇨, 너무 좋아서요.”

“옷을 갈아입을 공간은 따뜻하게 준비했으니 가시지요.”

그 후 나는 공작성 재단실에서 카탈로그에 있는 모든 무도회 의상들을 입어 보았다. 앤과 에카르트의 폭풍 같은 칭찬을 들으며 말이다.

“공녀님의 머리카락을 보면 불의 정령이 강림한 것 같아요.”

“시엘리나처럼 선명하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어디에도 없지.”

앤은 내 앞뒤 양옆을 왔다 갔다 하며 자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에카르트는 목소리는 느긋하지만 듣는 사람은 부담스럽게 동의했다.

“세상에, 공녀님. 옷이 잘 맞네요! 핏이 너무 예뻐요.”

“그렇게 여린 몸으로 전장을 누볐다네.”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셔서 무슨 색이든 옷이든 다 잘 어울리시네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저렇게 추켜세우지 않아도 백마법 치료는 제대로 해 줄 텐데 말이다.

나는 귀가 붉어진 채 카탈로그의 다섯 번째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깔끔한 남색이었는데 옆 라인은 꽃무늬를 수놓은 밝은 우윳빛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리본으로 우아하게 포인트로 줘서 예뻤다.

에카르트가 흡족하게 감상을 전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어떤 옷도 당신의 품격을 따라가진 못하지만요.”

잘 어울리는지 정도만 확인하려 했는데 그는 자꾸 온갖 찬사를 늘어놓았다. 마지막 드레스를 보여 줬을 때 결론은 이렇게 났다.

“시엘리나는 뭘 입어도 다 아름답군요. 뭐가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음, 이거요.”

이 세계에 코르셋은 없었지만 아까 입은 옷 몇 벌은 레이스가 까끌까끌하거나 치마가 무거워서 불편했다. 가장 편한 옷이 최고였다.

“그럼 무도회 의상은 저거로 정하죠. 나머지 옷도 다 잘 어울리니 일단 전부 사겠습니다.”

수석 디자이너의 값비싼 드레스를 마치 양말 한 켤레처럼 사들이다니!

“에카르트는 뭘 입을 건데요?”

“당신이 고른 것과 맞는 거로요.”

다른 카탈로그에는 파트너 의상까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에카르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다.

‘파트너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네.’

뭔가 심장이 빠르게 뛰고 말이다. 사귄다는 오해를 받을까 불안한 거라고 나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에카르트가 다음 연회 때 다른 파트너를 데려가면, 내 이야기는 금세 묻히겠지.’

그러자 무도회 파트너 신청을 처음 받았을 때처럼 묘한 짜증이 일었다. 나는 카탈로그 페이지를 괜히 휙휙 넘겼다.

‘왜 이러지. 화를 제대로 못 내고 사니까 이상해졌나 봐.’

곧 에카르트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내 드레스 색처럼 남색인 정장은 코사지가 크림색으로 똑같았다.

“어머, 공작님….”

앤이 할 말을 잃고 에카르트를 상기된 얼굴로 보았다.

“디자이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윽, 저는 이대로 순직해도 좋아요!”

나도 가슴이 뛰었지만 심드렁한 척 턱을 괴었다. 다른 왕국으로 가면 언제 이만한 미남을 보겠는가.

‘그래. 좋은 모습은 눈에 담아 둬야지.’

자기합리화를 하며 훔쳐보는 동안 그는 앤과 대화를 마무리했다.

“카탈로그에 있는 남성용 의상도 전부 구매하겠네.”

“감사합니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일시불.”

언젠가 해 보고 싶은 대사였는데. 대리 만족을 이렇게 느끼다니. 그때, 에카르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시엘리나. 우리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네? 네!”

갑작스럽게 말을 거니까 깜짝 놀랐는지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요즘 자꾸 이러네.’

조만간 심장에 좋다는 약재를 한번 지어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라멜은 이전의 티파티 멤버와 함께 공작성 정원에 모였다. 요즘 모든 귀족의 관심사는 황실 무도회였다. 그들은 한가롭게 다과를 먹으며 재잘거렸다.

“무도회에 에카르트 공작님도 참석하실까요?”

“여태 연회에 한 번도 안 오셨잖아요.”

“그렇지만 황실 무도회인걸요! 게다가 요즘 휴가 중이라 공작성에 계신다던데, 별일이 없으면 오실걸요?”

그러자 갈색 머리카락의 영애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제론 영애가 공작성으로 서신을 보냈다던데요.”

“어머나. 공작님의 파트너가 되려고요?”

“그런가 봐요. 그런데 답장이 없어서 며칠간 굶고 계신다고 하네요!”

그러자 영애들과 영식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얼음 같은 공작님께 파트너를 신청할 생각하다니. 애초에 공작님이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상상이 안 가는데요.”

“뭐, 파트너에겐 의외로 상냥하실지도요….”

라멜은 말을 보태는 대신 듣기만 하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뭘 모르네. 상냥한 정도가 아니라 시엘리나에겐 꿀이 떨어지더만. 얼마 전에는 수석 디자이너도 집으로 초청했다고.’

하녀가 의상실에서 돌아와 알려 준 정보는 웃기지도 않았다.

“공작님께서 카탈로그의 모든 의상을 구매하셨다고 합니다. 무도회 의상은 따로 정하셨다고 들었어요.”

앤이 제작한 드레스는 남들은 마음먹어야 간신히 한 벌을 샀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시엘리나를 위해 열 벌도 넘게 구매했다.

그걸 알고 있기에 그녀는 다른 영애들과 달리 에카르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무작정 들이대 봤자 반감만 사고 비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귀족들은 라멜이 말이 없자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라멜 님은 에카르트 님께 관심 없으세요?”

“그러게요. 라멜 님의 이상형은 뭐예요?”

라멜은 이런 질문에 가장 모범적인 대답을 알았다.

“저요? 저는 그냥… 착한 남자요!”

그러자 영식들이 순간 두근거리며 모두가 똑같이 생각했다. 외모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제게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그 모습을 힐긋 바라본 라멜은 에카르트도 언젠간 저렇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티파티를 마치고 홀로 남은 라멜은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아직 에카르트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서 그와 친해질 구실을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 리타에게만 의지할 순 없어. 나도 내 머리로 생각해 봐야지.’

게다가 리타가 개입한 후로 어쩐지 일이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이전에 시엘리나가 목걸이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우자는 것도 리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엘리나는 공작성을 나가 더 잘살고 있다.

그리고 리타의 말대로 편지를 써서 간신히 에카르트를 만났지만, 오히려 그의 호감도만 떨어뜨렸다.

‘으음, 같은 공작가인데 교류했던 기록이 없으려나….’

그때, 공작가의 집사가 라멜을 발견했다. 얼마 전에 새로 바뀐 젊은 남자 집사, 파빌이었다.

“공녀님, 아직 여기 계셨군요. 곧 저녁입니다. 날이 쌀쌀할 테니 들어가세요.”

“집사님~ 부탁이 있는데요.”

라멜은 일부러 파빌의 손을 잡고 말꼬리를 늘렸다. 일부 하녀에게만 못되게 대할 뿐, 집사나 하녀장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언제든 자신의 편을 들 수 있도록 살뜰하게 챙겼다.

파빌은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더듬었다.

“네, 넵.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최근 회의록은 다 봤는데 이전 것도 보고 싶어요. 황실 무도회는 친목을 다지는 중요한 자리니, 미리 교류한 기록을 확인하고 가면 좋을 테니까요.”

물론 관심 있는 건 크로덴 공작뿐이었지만 라멜은 티가 나지 않도록 둘러댔다.

“역시 공녀님이시군요. 작년 이전의 회의록은 지하 서고에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작님의 심부름 중이라….”

“어머,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그렇다면 열쇠를 드릴 테니, 이따 돌려받으러 가겠습니다.”

“고마워요.”

라멜은 열쇠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빌의 은근한 눈빛에 속으로는 환멸을 느끼며 말이다.

그녀는 뭔가 발견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홀로 지하 서고로 향했다.

하지만 지하에 도착하니 문이 여러 개 있었다. 라멜은 느낌이 가는 문을 먼저 열어 봤다.

‘여기가 서고는 아닌 것 같은데.’

침대와 책상도 있는 생활공간에 가까웠다. 공작가의 모든 소품은 고풍스러웠는데, 이 허름한 안은 공작성에 있을 법한 장소 같지도 않았다.

라멜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방을 좀 더 둘러보았다.

벽에 색이 바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머리카락이 붉은 아기를 안고 미소 짓는 그림이었다.

‘…시엘리나? 이전 공작 부인인가?’

흥미를 느낀 라멜은 방 안을 좀 더 조사했다. 별 가구는 없었기에 라멜은 곧바로 책상 서랍을 열어 봤다.

덜그럭. 뭔가 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비어 있네.’

라멜은 도로 서랍을 밀어 넣었지만, 어딘가 뻑뻑하게 잘 닫히지 않았다.

이상했다. 처음엔 오래된 탓인가 싶었지만, 위에 칸은 매끄럽게 열렸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예 서랍을 빼내서 확인하기로 했다.

“콜록, 콜록.”

먼지가 자욱하게 이는 바람에 몇 번 기침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반짝였다. 라멜은 손을 뻗어 그 정체를 확인했다. 중앙의 원형 펜던트는 레드 다이아몬드로 제련했고, 20cm 정도가 되는 얇은 금팔찌였다.

팔찌 안쪽을 확인한 라멜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회의록 따위는 볼 필요가 없겠네.”

에카르트가 틀림없이 관심을 가질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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