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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20화 (20/115)

#20화

“백마법 때문이지.”

“백마법?”

당연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황태자는 귀를 의심했다.

백마법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황태자는 확신에 찬 에카르트의 눈빛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자기가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는 건가.’

“정말 백마법 때문에 집착한다고?”

“집착은 블랑세가 하지. 나는 공녀를 계속 내 곁에 두고 싶을 뿐.”

“그러니까… 백마법 때문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요즘 새로 시작한 치료도 아주 기분이 좋았지.”

그리고 마검의 지배자답게 오싹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는 웃음을 보고 황태자는 말을 아꼈다. 에카르트가 제 몫으로 준비된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물어봤다.

“그래서 무도회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면 언제지?”

“오늘부터 준비해도 다음 달은 되어야 해.”

“지금부터 시작해. 일손이 부족하거든 공작성의 인력을 빌려 주지. 그러니 가능한 빨리.”

“그래, 그래. 진정해.”

“그리고 당일에는 공작성으로 미리 와 있어.”

“내가?”

“너 말고 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사람이 또 있나?”

“그러니까… 무도회 당일 내가 공작성으로 가서, 너와 공녀를 황실로 이동시켜 달라는 거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귀찮은 놈.”

“아니, 공작성과 황실은 마차로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잖아!”

“무도회는 저녁이야. 공녀께서 이동하느라 피로하시면 안 되지. 마법진으로 편히 모셔야 해.”

“에카르트. 내가 피곤한 건 괜찮고?”

“네 건강은 알아서 챙겨.”

에카르트는 퍼뜩 뭔가 생각난 듯 몸을 일으키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만 돌아가야겠다.”

“벌써? 아니야. 이제 그냥 가 줘.”

“그래. 혹시 고용인이 쓸데없이 말을 붙이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무조건 응징뿐.”

다른 사람이라면 수일에서 수개월은 걸려야 입장할 수 있는 황태자궁에 와서 시엘리나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 돌아가다니. 그것도 당당하게 데리러 오라는 요구나 하고 말이다.

황태자는 제 할 말만 하고 돌아가는 에카르트를 보며 뒤에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

며칠 후, 에카르트는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지 흡족한 얼굴로 나를 찾았다. 나는 그게 내게도 희소식이길 바랐다.

“시엘리나.”

“황태자 전하께 전달한 편지가 답이 왔나요?”

“아직입니다. 한 번 더 독촉할까요?”

순간 몽둥이를 들고 깽판을 치며 돈을 받아 내는 조폭의 모습이 두둥실 떠올랐다. 물론 에카르트는 마검을 들고 있고 우아한 데다, 그의 상대는 황족이라는 게 다르지만 말이다.

“아니에요. 제가 좀 더 기다릴게요.”

“독촉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협박하거나 뺏으면 되니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그런 일이면 더더욱 괜찮아요.”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도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 손을 슥 잡고 가슴가에 가져갔다.

새로운 치료 방식이 익숙해질 법한데, 맨가슴에 손을 올리면 여전히 손끝과 얼굴에 열이 몰렸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긴장한 모양이었다.

10분 후. 치료가 끝나고 그가 천천히 셔츠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드디어 무도회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무도회요?”

“네. 황실 무도회죠. 3주 후에 황실에서 개최합니다.”

그렇게 빨리?! 원작에서는 겨울 콘셉트로 무도회를 열었다. 지금은 초가을인데 이렇게 앞당겨지다니!

시엘리나가 어렸을 때 사교회에 다녀온 적이 있지만, 나는 빙의한 후 성전에 있거나 전장만 쏘다니다시피 해서 사교와 담을 쌓고 지냈다.

아마 루솔릿 공작가도 참석할 텐데. 라멜 같은 귀족이 널렸을 거라는 편견 때문에 가슴이 체한 듯 답답해졌다.

“공작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사교회 활동을 거의 안 해서….”

“안 해서?”

“…오랜만에 무도회에 가 볼까요?”

나는 생각을 달리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무도회에서 황태자를 직접 만나면 직접 별의 꽃에 대해 말해 봐야겠다.

무도회 준비할 시간은 있었으면서 황제와 의논할 시간은 없었나,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말이다.

“좋습니다. 무도회를 승낙하셨으니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데요?”

“저와 파트너 의상을 맞춰야지요.”

뭐 이렇게 미리 계획을 짜 둔 것처럼 일사천리란 말인가!

“이번엔 납치가 아니라 협조적인 방법으로 데려왔습니다.”

에카르트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헬라를 따라 세련된 옷차림에 안경을 쓴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가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안경을 척 올리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에카르트 공작님, 시엘리나 공녀님. 저만 믿고 맡겨 주세요!”

당신은 또 누구신지. 크로덴 공작성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았다.

***

루솔릿 공작의 아내, 리셀이 탄 마차가 수도의 의상실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리셀은 호위 기사와 끈적한 키스를 나눴다. 기사의 이름은 리차드. 리셀이 공작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호위를 맡은 20대 후반의 젊은 남성이었다.

“부인, 정말 이래도 돼?”

“상관없어. 드레스 사 가겠다는 말은 정말이니까 당신만 입 닫으면 돼.”

리셀이 리차드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갈 데까지 가 놓고 이런 말 하니 뭣 하지만 공작님이 불쌍하네.”

리차드는 그러면서도 이 아름다운 중년 여성의 허리를 더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불쌍해? 나는 내가 불쌍해! 그놈 얼굴을 볼 때마다 역겨워! 차라리 지나가던 시정잡배가 더 기품 있겠어. 살만 뒤룩뒤룩 쪄서는 키도 작고 못생겼지. 왜 그런 놈과 결혼했을까?”

“…알았어, 진정해.”

살벌한 외모 평가에 리차드는 리셀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를 달랬다.

마차가 어느덧 다나 의상실 앞에서 멈췄다.

리셀은 리차드와 노골적인 시선을 주고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입구로 느릿하게 걸어가는데, 갓 성인이 되어 보이는 귀족 영애들이 의상실을 나왔다.

“황실 무도회가 한 달 후라니. 의상실마다 전쟁터가 됐네.”

“그나마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예약도 못 할 뻔했잖아.”

‘황실 무도회라고?’

리셀은 당장 영애 한 명을 붙잡고 사정을 묻고 싶었다. 공작성을 떠날 때만 해도 무도회와 관련된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리셀은 의상실에 들어오자마자 직원을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수석 디자이너 어딨어?”

“외근 중이십니다. 황실 무도회 건으로 의뢰를 요청한 손님이 계세요.”

자신이 공작성을 나온 사이에 황실 무도회가 결정된 것인가.

루솔릿 공작가도 틀림없이 초대장을 받았을 터. 리셀은 그렇게 중요한 행사를 놓쳤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

“며, 며칠은 걸리실 거예요!”

누가 이 시기에 수석 디자이너를 며칠 내내 빌릴 정도로 돈이 많단 말인가.

역시 졸부 공작가보다는 더 명망 있는 가문에 시집을 가야 했노라고 리셀은 후회했다.

‘게다가 루솔릿 공작은 못생기기까지 했지. 무도회 파트너로 삼기도 쪽팔린단 말이야.’

리셀은 그 짜증을 괜히 직원에게 풀었다.

“여기 있는 드레스 다 보내. 내 얼굴 알지? 루솔릿 가문으로 이름 달아 두고.”

“하지만, 루솔릿 공작 부인.”

직원이 진땀을 흘리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요즘 같은 시기엔 독점 구매를 제한하기 위해 세 벌까지만 구매 가능합니다.”

“그럼 수석 디자이너는 얼마면 고용하는데?”

“그게… 닷새간 천만 니케입니다. 제작비는 별도고요.”

“천만 니케라고?”

공작가에서 세 달치 거둬들이는 세금과 똑같았다.

재력에서 밀린 리셀은 가까이 있던 드레스 세 벌을 아무렇게나 쥐어 들고 의상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녀는 심기가 불편해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공작성 입구에는 라멜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리셀을 보고 인사하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리셀은 라멜에게 다시 신경질을 냈다.

“짐승도 제 어미는 알아보던데.”

“그 반대가 아닌가요?”

둘은 서로를 애정 없이 쳐다봤다.

리셀은 라멜을 공녀로 만들어 줌으로써 어머니의 모든 의무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멜은 공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방치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딱히 그녀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호위 기사와 바람이나 피우다 왔으면서 무슨 반응을 기대하시는 건가요?”

라멜이 쏘아붙이자 리차드가 헛기침을 했고, 리셀은 조용히 하라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라멜은 주변에 하녀가 없었기에 한 말이었다.

“쉿,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옷 사러 다녀온 거라고.”

“그 허접한 드레스를요?”

멀리까지 가서 산 옷이라기엔 상당히 평범해 보였다.

“다나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가 자리를 비웠지 뭐니. 누가 직접 저택으로 부른 모양이야. 우리도 그래야 했는데!”

라멜은 흥미로운 정보를 듣고 생각에 빠졌다. 가장 유명한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를, 그것도 요즘처럼 성수기일 때 온종일 고용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최소한 후작에서 공작 급의 작위. 재산도 상당한 데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겠지.’

혹시 에카르트와 관련이 있을까?

라멜은 추측을 뒤로하고 일단 준비했던 작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뭐니? 가족의 날은 한참 지났는데.”

“당신한테 주는 선물일 리 없잖아요. 이따 아빠에게 전해 드리세요.”

상자를 열어 보자 고급스럽지만 그냥 흔한 브로치 중 하나였다.

“아빠 생각나서 오는 길에 사 왔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예요.”

만약 리셀이 공작을 위해 선물하는 척한다면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루솔릿 공작은 단순해서 부인이 조금만 마음을 써 줘도 좋아하니까.

“허. 벌써부터 비위 맞추는 법을 잘 깨우쳤구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지만, 한편으론 어딘가 자조적이었다. 예쁘고 이해타산 빠른 어린 여자애. 결혼할 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질 테지.

“얘.”

“네?”

“너는 돈과 작위만 보지 말고 얼굴과 나이도 따지렴.”

그걸 충고라고 하는 건가? 그나마 라멜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라멜은 오히려 불쾌함만 짙어졌다.

“알아서 할게요.”

라멜은 싸늘하게 반응하고 등을 돌려 남처럼 걸어갔다.

그리고 복도에서 만만한 하녀 한 명의 손목을 꽉 붙들고 다짜고짜 명령했다. 잡일이야 실라에게 시키면 되었지만, 한때 시엘리나의 수족이었던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기에.

“너, 의상실 좀 다녀와.”

“네? 곧 새 드레스가 도착할 텐데요.”

“거기 말고. 이번엔 다나 의상실로 가 봐. 가서 크로덴 공작이 주문한 옷을 알아내.”

다나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를 고용할 가문은 크로덴 공작가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재력을 가진 가문도 소수일뿐더러, 나머지는 꾸미는 데에 관심 없는 늙은이들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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