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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8화 (18/115)

#18화

그가 거주하는 공작성은 수도에 있었지만, 그는 북부의 영주였다.

그러나 북부는 마수들의 터전이라 영지의 의미가 없었다. 북부는 마을과 주민 대신 요새와 기사단, 병사만 있었으니 말이다.

“근처의 이벨 후작령과 이어 드릴 수 있어요!”

이벨 후작은 악마의 후예라는 크로덴 공작가를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모두가 크로덴 가문을 존경하는 건 아니었다. 이벨 후작은 크로덴 공작가를 견제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라멜은 이벨 후작 영식과 친했고,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어필하여 두 영지의 친목을 주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교역 물품은?”

“비단과 향신료요!”

라멜은 귀족들이 주로 교역하는 물건을 아는 대로 몇 가지 말했다. 에카르트의 붉은 입꼬리는 비웃듯 올라갔다.

누가 봐도 이 자리에서 즉석으로 생각한 대답이었다.

“라멜 공녀. 북부를 개발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나?”

“음…. 물자가 부족해서 아닌가요?”

“개발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마수를 완전히 섬멸하기 전까진 마을의 형태를 만들기 어려울 터. 북부에 사치품을 쌓아 둔다고 해도 마수가 들끓는데 정착하고 싶을 리 없지.”

“그렇지만 북부 기사들도 더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잖아요!”

라멜은 천진함을 어필하려고 했지만 에카르트의 눈에는 그저 머릿속이 꽃밭인 귀족처럼 보일 뿐이었다.

“전장에 그런 사치품은 얻다 쓰지? 몇 가지 기호품이면 충분해.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병사들의 생존이고.”

“그, 그렇긴 한데요….”

“사기를 증진하기 위해서라면, 이미 북부 인력을 늘려 휴가를 보내고 있다.”

즉 라멜에게 도움받을 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공작님께 도움이 될 방안을 다시 생각해 볼게요.”

“앞으로는 가급적 서면을 이용하도록. 더 이상할 말이 없다면 바래다주지.”

별 쓸모를 기대하지 않는 눈빛으로 에카르트가 축객령을 내렸다. 공작성에 들어오기 전, 아버지 없이 살며 무시당하던 그 느낌에 라멜의 손끝이 떨렸다.

***

화단 근처를 천천히 걷던 차.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셋은 얼마 안 돼서 다시 나왔다.

“시엘리나.”

에카르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둘을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멀리서 공작성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자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라멜이 에카르트를 제치고 우다다 달려왔다.

“제가 먼저 언니와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응? 언니?”

“…그럴까.”

얘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짱을 끼고 으슥한 뒤편으로 끌고 갔다.

둘만 남게 되자 라멜이 순식간에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집 나가서 한 일이 고작 공작님 꾀어내기야?”

“조용히 해!”

내가 서둘러 라멜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전에 전장에서 비슷한 말을 한 병사 여럿이 실종당했는데, 에카르트가 듣는다면 라멜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몇 초 후에 입을 막은 손을 떼고 혀를 찼다.

“어떻게 된 게 라멜, 지능이 그대로구나. 공작 부부가 네 교육을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야.”

“네가 뭔데 나를 무시해!”

라멜은 무턱대고 나와 몸싸움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에 내가 기사 두 명을 제압한 걸 본 데다 여기는 에카르트의 공작성이니 말이다.

나는 라멜의 헛소리는 한 귀로 흘려듣고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캐내기로 했다.

“공작성에 왜 왔어?”

“가문을 나갔으면서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래. 말하기 싫으면 말든가.”

어차피 에카르트에게 물어보면 그만이었고 내 본론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 알아 둬. 너고 리타고, 전처럼 나 건들면 죽는다.”

내가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고 라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참에 에카르트와 블랑세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도 겸사겸사 풀기로 했다.

“또 울면서 자작극을 벌이게? 관둬. 처음으로 널 때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안 울어!”

너무 몰아세웠는지 라멜이 갑자기 주눅이 들었다. 얄밉던 얼굴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아….”

라멜은 그러더니 터덜터덜 두 공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뭐야.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나는 그 뒷모습을 탐탁지 않게 눈으로 좇다가 뒤를 따랐다. 이미 에카르트와 루솔릿 공작은 인사를 마친 모양이었다.

“하하, 그럼 시엘리나. 언제 한번 공작성에 들러 주렴. 리타도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를 공작성 밖으로 내쫓으려던 꼬맹이가 그럴 리가. 언제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고자 하는 저 인간들은 변한 게 없었다.

“다음에 봐, 언니.”

꼴불견 가족에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줬다. 에카르트가 그들을 마차까지 바래다주는 게 예의였는데 그는 배웅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나와 철썩 붙어 있었다.

“저 둘은 헬라가 배웅할 겁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갑시다.”

“네, 연구실로 가요. 얘기는 잘 나눴어요?”

“들을 가치도 없더군요. 교역 이야기를 하던데….”

교역이라니. 원작에서도 없던 뜻밖의 전개에 고개를 갸웃했다.

“교역품으로 무엇을 제시하던가요?”

“아무거나 둘러대는 것 같았습니다. 비단과 향신료 등 사치품은 북부와 쓸모없는 품목이었죠.”

나는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해진 채 성안으로 들어왔다. 연구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에카르트가 내게 물어봤다.

“혹시 라멜 공녀가 친동생이 아닙니까?”

“네. 이미 아시지 않나요?”

“시엘리나가 직접 말한 적은 없으니까요.”

하긴, 그는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에 무관심했다. 내 가족 관계에 구체적으로 묻지도 않았다. 내 백마법을 독점하기 위해 주변의 날파리들을 퇴치하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

“라멜은 제 이복동생이에요. 현 리셀 루솔릿 공작 부인의 딸이죠.”

“어쩐지.”

그가 어떤 의문이 풀렸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했다. 연구실로 들어온 에카르트는 책상에 기댄 후 말했다.

“라멜 공녀는 당신과 전혀 안 닮았습니다.”

“어떤 부분이요?”

“어쭙잖게 머리 굴리는 게 기분 나빠요.”

며칠 전 동방을 핑계로 도망치려고 했던 게 생각나서 뜨끔했다. 그래서 나는 슬쩍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

“에카르트. 치료해 드릴까요?”

“좋습니다.”

다시 온순해진 눈빛을 보니 안심이 됐다. 손을 내밀었더니 그가 슬쩍 손목을 감싸 쥐었다.

“이러면 치료를 할 수 없는데….”

“그 의사가 손 말고 다른 부분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다른 부분?”

***

라멜은 루솔릿 공작성 밖에서도 저보다 높은 사람을 보기는 드물었다.

‘그랬는데, 에카르트 저 자식이! 시엘리나 그년도 더 기고만장해지고 말이야.’

라멜은 모욕을 받고 짜증이 치밀었다.

에카르트는 예의를 차리고 비위를 맞추려는 저와 달리, 애초에 상대방의 환심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황족조차 눈치를 보게 하는 마검의 지배자이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남자니까.

‘오만해. 남한테 잘 보이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는 거야?’

자신은 아빠의 비위를 맞춰 주고 사랑받아야 하는데! 라멜은 한껏 짜증이 올라왔다.

“라멜, 아까 혼담을 꺼내려던 것 아니었느냐?”

루솔릿 공작의 의아한 물음에 라멜은 짜증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생각했다.

‘그런 남자에게 섣불리 다가갔다간 역효과를 낼 게 뻔해. 무작정 들이댔다가 망신을 사는 경우도 몇 번 봤으니.’

그래서 아까 혼담 이야기를 하고 교태를 부리는 대신 교역을 언급했다. 차라리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서히 접근하는 우회 방법을 하기로 결심한 라멜이었다.

물론 떡을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셔 대는 꼴이었다.

‘교역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지.’

“아아. 그렇지만, 막상 보니까 너무 차가운 분 같아서….”

“그래. 마검의 지배자가 뭔지. 아주 오만방자하더구나.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역시 저는 아빠와 더 있고 싶은 것 같아요! 아빠처럼 다정한 남자가 좋아요.”

라멜은 공작을 어떻게 기분 좋게 할지 정확히 알았다.

리셀이 요즘 들어 애정 표현을 단 한 번도 안 한 덕분에, 그는 자신이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의기소침했다.

“당신은 돈만 많고 작위만 높을 뿐, 외모와 검술 무엇 하나 잘난 게 없으니 자기 객관화라도 제대로 하라고요!”

리셀과 싸우고 나면 공작은 종종 그런 말을 들었다.

공작은 애초부터 자신이 더 많이 사랑했으니 그런 시련쯤이야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제게는 우리 가족이 너무 소중해요, 아빠.”

“라멜….”

그런 공작을 구슬리는 건 라멜의 몫이었다.

라멜은 그런 공작의 심리를 잘 알았기에,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고 칭찬해서 기를 세워 주는 딸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 몇 마디에 공작이 헤벌쭉 웃었다.

“그래도 공작과 친분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카르트 님은 선대 크로덴 공작보다 더욱 강하다고 들었어요. 혹시라도 북부가 안정되거든 모두가 북부와 교역을 원할 테니까요.”

“언제 또 그걸 생각해 뒀느냐. 너무 기특하구나.”

라멜은 마치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공작에게 머리를 쓰다듬 받았다.

‘내가 정부의 딸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데! 시엘리나의 모든 건 내 꺼야. 에카르트라고 예외가 아니지.’

라멜은 그 수단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결과가 좋으면 되니까.

공작성에 들어오기까지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에카르트를 넘어오게 하는 데에 걸릴 시간은 짧을 거라고 자신하는 라멜이었다.

***

에카르트의 눈빛에 장난기가 어렸다. 그 청량한 얼굴을 보니 한나가 무엇을 알려 줬는지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른 부분요? 손 말고 어디요?”

“심장입니다.”

그는 서랍에서 한나가 기록한 종이를 꺼내왔다. 한나가 그린 그림은 두 가슴 사이에 붉은색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는….”

“아시다시피 저주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는 곳입니다. 보여 드리죠.”

“지금요?”

“네.”

그가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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