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에카르트 님과는 함께 일하는 사이일 뿐이에요.”
하지만 하녀들은 내 해명에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들떴다.
“네, 직장 동료! 알고 있답니다.”
“후후, 동료라니~”
“다들 그렇게 동료에서 시작하는 거죠!”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닌데 다들 뭔가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커다란 보석 상자를 들고 오던 니나가 호통쳤다.
“너, 너희들! 떠들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그런 말은 공녀님께 실례야.”
그리고 내게 마치 “저 잘했죠?”라는 듯이 윙크했다. 니나는 보석함을 열어 내게 보여 주었다.
“공녀님, 이거 보세요!”
보석함에 가득한 액세서리는 전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처럼 보였다.
“저기…. 이게 다 뭔가요?”
“전부 공녀님 것이죠! 공작님께서 근처 부티크의 장신구를 다 사들이셨답니다.”
내가 입이 떡 벌어지는 동안 하녀들은 다시 내게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공녀님께는 사파이어나 루비 목걸이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니에요, 역시 레드 다이아몬드가 화려하죠!”
향유를 전부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마법 작물 드레스를 수십 벌씩 구입하고, 정원을 파란색 장미로 도배한 것도 모자라…. 레드 다이아몬드까지!
‘크로덴 공작가 소유 광산에서만 나오는 희귀한 보석인데.’
나는 생각을 포기하고 얌전히 치장을 받았다. 하녀들의 열정 때문에 기력이 빨리면서 말이다.
내 몸값보다 비싼 장신구를 두르고 나오자, 근사한 정장 차림의 에카르트가 보였다.
“시엘리나!”
“에카르트.”
“레드 다이아몬드가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그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기며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석보다 더 붉은 눈동자를 본 나는 슬쩍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척 가슴 부분을 가렸다. 파인 옷은 아니었지만 왠지 손이 나도 모르게 움직였달까.
에카르트는 뭔가 생각난 듯이 미소 지었다.
“나중에 시엘리나가 무도회 의상을 입은 모습도 보고 싶습니다.”
“무도회요?”
“네, 황실에서 무도회를 개최한다던데 이 기회에 앞당겨도 좋겠군요. 함께 갑시다.”
아. 그러고 보니 원작에 무도회 에피소드가 있었지.
그때 블랑세와 에카르트는 함께 파트너로 등장했다.
루솔릿 공작가 역시 초대를 받았기에 시엘리나는 그곳에서 둘과 처음 만난다. 시엘리나가 악녀답게 블랑세를 트집 잡으니, 에카르트가 뭐라고 했더라.
<공녀. 말로 할 때 꺼져. 내가 검을 들어야 이해하겠나?>
그랬던 그가 지금 내게 파트너 신청을 하고 있다니! 인성은 그대로지만 원작이 비틀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시엘리나. 조금 이른 말이지만 황실 무도회 파트너가 되어 주십시오.”
“당신의 무도회 파트너요?”
“네.”
블랑세에게 물어봤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에카르트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백마법 때문이니까.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참에 여주 블랑세와 황태자 남주를 이어 줄까?’
“에카르트. 무도회가 열리거든 초대장을 한 장 더 받을 수 있어요? 블랑세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황실 무도회는 고위 귀족들만 초청받는다. 내가 에카르트의 파트너로 가면 블랑세는 무도회 초대장을 받지 못하겠지.
물론 내가 루솔릿 공작가에서 초대장을 받아낼 수야 있겠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왜요.”
“당신의 파트너는 저인데 그 여자가 파트너처럼 굴 테니까요.”
“아니, 저 아직 파트너 제안을 승낙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블랑세가 다른 파트너를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예를 들면 황태자 남주인공 말이다.
“그 여자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의 팔짱을 끼고 거머리처럼 놓아주지 않겠지요.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미는군요.”
여주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뭐라고 혼낼 틈도 없이 그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참고로 당신이 승낙할 때까지 초대장은 제국 누구도 못 받을 겁니다. 그 외 행사를 개최하려고 한다면 제가 막을 겁니다.”
“왜요?”
“당신이 혹여 다른 작자와 가게 된다면…. 아닙니다. 역시 그런 일은 없어야겠죠?”
또 무슨 위험한 상상을 한 건지 따지려다가 말았다. 백마법 때문에 무도회 파트너 자리까지 욕심내다니.
하지만 그는 내가 째려보는 시선마저 좋은 듯했다.
***
리타는 라멜을 루솔릿 공작성 문 앞까지 마중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제 누이는 제국의 꽃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예뻤다.
“오늘이 공작성에 방문하시는 날이군요. 제 누님이지만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응. 리타는 같이 안 가?”
“아아, 저는 괜찮습니다. 가주 교육을 받아야 해서요.”
가주 교육. 그 단어를 들은 라멜은 잠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노력은 남을 만족시키는 것. 상대방에게 마음을 거절당하면 남는 건 없다. 하지만 리타의 노력은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이다.
“누님?”
“아. 아, 아냐. 그냥 가주 교육은 어떤 건지 궁금해서.”
“상당히 고됩니다. 새벽부터 일찍이 일어나 마법 수련을 하고, 오후가 되기 전까지 역사, 경제, 전술, 예법을 배운 후 저녁엔 문학을 읽고 복습합니다. 제가 사교계에 데뷔하거든 일이 더 많아질 테지요.”
리타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하자 라멜은 풀이 죽었다.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 힘들 거라고는 생각했어. 나는 책 한 권 읽는 것도 힘든걸.”
“모두 각자의 위치란 게 있는 거니까요. 대신 누님은 사교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잖아요?”
“그런가….”
“네, 누님은 아름다운 거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철혈 같은 공작이라도 누님을 보면 한눈에 빠질 겁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라멜은 가주 교육에 대한 관심은 잠시 접어 두고 생각했다.
‘역시 내겐 이런 방법뿐이겠지.’
그런 라멜을 리타는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
어느덧 루솔릿 가족의 마차가 도착했다. 루솔릿 공작령은 수도와 제법 떨어진 시골이었는데, 에카르트의 답신을 받고 마차로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이었다.
나와 에카르트는 1층의 홀까지 마중을 나왔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공작과 라멜이 들어왔다. 공작은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살이 쪘고, 라멜은 조화가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둘은 나를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엘리나?”
루솔릿 공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먼저 에카르트에게 예를 차렸다.
“크로덴 공작님을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
에카르트는 저보다 나이가 두 배도 많은 공작에게도 하대했다. 그만큼 같은 공작가라고 해도 위신이 다른 것이다.
뭐, 시엘리나의 아버지 같은 인물에겐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
두 공작이 형식적인 악수를 주고받는 동안 라멜이 대뜸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언니, 그동안 잘 지냈어?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본다!”
“어어, 그래….”
“많이 바뀌어서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어.”
“너는 여러모로 여전하구나.”
우리는 서로 하하 웃었다. 귀족들끼리의 기 싸움을 동생과 하게 되다니. 라멜은 곧바로 에카르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드레스 자락을 한껏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크로덴 공작님! 저는 루솔릿 공작가의 차녀 라멜이에요. 이렇게 공작님을 뵐 기회가 생겨서 너무 기뻐요.”
“그렇군.”
나는 에카르트가 의례적으로라도 라멜의 손등에 키스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별 인사말조차 덧붙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라멜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시엘리나. 여기 있었구나! 미리 말을 해 주지 그랬니.”
루솔릿 공작은 어정쩡하게 손을 뻗더니 처음으로 날 안았다.
꼴에 에카르트 앞이라고 친한 척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낯선 아저씨가 나를 끌어안는 기분이라서 슬쩍 몸을 빼냈다.
“하하! 시엘리나가 어렸을 때부터 백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더니, 공작성을 떠나서 이렇게 백마법사가 되었답니다. 공작님과 연이 닿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함께 계셨군요.”
아버지란 놈이 허둥지둥 사족을 덧붙여도 에카르트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둘과 인사를 마친 후엔 오직 내게만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시엘리나. 같이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괜찮아요. 저는 정원에서 기다릴게요.”
“네,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에카르트가 내 손등을 쥐더니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나를 보내 줬다. 나는 라멜의 눈가가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걸 목격했다.
***
‘정원에서 기다린다고? 아예 제집처럼 지내네. 오늘도 공작이 다 꾸며 준 거겠지.’
촌스럽고 남루한 옷을 입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시엘리나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라멜은 분명한 시선 차이를 느꼈다. 에카르트가 시엘리나를 바라볼 때와 달리, 자신을 바라볼 땐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을. 관심이 없다 못해 제대로 된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나를 보고자 한 것은 무슨 일이지?”
에카르트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물었다.
“하하, 크로덴 공작님. 너무 본론부터 말씀하시는 거 아닌지요.”
루솔릿 공작이 진땀을 흘리며 허허 웃었지만 에카르트의 얼굴엔 미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상대의 기분을 맞출 필요 없다는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분위기에 민감하던 라멜은 깨달았다.
‘우리 가문에 관심 갖거나 내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엘리나의 가족이기 때문에 만남에 응했구나.’
라멜은 원래는 혼담을 제안하려 했지만 급하게 용건을 바꿨다.
“다름 아니라…. 북부와 교역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루솔릿 공작은 당황하고야 말았다. 에카르트는 비로소 라멜에게 시선을 줬다.
겨우 시선을 잡아끄는 데에 성공한 라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교역이라. 루솔릿 공작가에 항만이나 교역로는 없을 텐데.”
에카르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사실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