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가 그의 무엇을 자극했는지 몰라도 눈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의 설산 같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더 따지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더 이상 건드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결국 한숨을 쉬며 식탁을 탁탁 치고 다른 주제로 항의했다.
“물건은 왜 부숴요?”
“죄송합니다. 종종 힘 조절이 안 되는군요.”
“제 손 잡을 때는 조심스럽잖아요. 그렇게 쥐면 될 거 아니에요.”
“아, 그러면 되겠군요.”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고 나니까 어딘가 민망해져서 흠흠 헛기침을 하자, 새로운 요리를 내오던 니나도 “어머.”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위태롭던 분위기가 눈 녹듯 풀리더라도 이대로 넘어갈 순 없었기에 한 번 더 당부했다.
“앞으로도 무턱대고 납치하거나 물건 부수기만 해요.”
“주의하겠습니다.”
“사과는 한나에게! 서면으로.”
나는 바닷가재를 포크로 쿡 찌르며 분을 풀었다.
“…그러죠.”
에카르트가 마지못해 답했다. 그래도 백마법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생각보다 말에 따르니 다행이라고 할지.
“대신.”
에카르트가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함께 정원을 산책합시다. 너무 연구만 하셔도 몸에 좋지 않으니까요.”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을 듣고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어차피 연구실로 가도 그가 따라올 테니, 어느 쪽이든 함께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개도 산책하면 공격성이 줄어드는데 사람도 똑같겠지.’
우리는 그렇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원래 공작성 정원은 꽃 한 송이 없이 삭막했다. 하지만 내가 올 때마다 점점 업그레이드가 되더니, 이제는 황실 정원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푸른 장미 향기가 코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에카르트는 하녀가 건넨 하얀 양산을 내게 씌워 줬다.
‘이럴 때 보면 매너는 좋은데.’
얌전해진 에카르트와 평화로운 풍경을 보니 마음이 잔잔해졌다. 나는 폭풍 같던 시간을 뒤로하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곧 묘한 위화감을 느껴졌다.
“어제는 정원에 꽃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네. 시엘리나가 좋아하는 품종은 여름에만 꽃피웁니다. 그래서 새벽 동안 파란 장미로 다시 심었지요. 전에 파란 장미도 좋아한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긴 한데. 이 넓은 정원을 하루 만에 다 갈았다고요?”
“물론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스케일에 할 말을 잊은 그때, 수풀 사이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에카르트와 내가 동시에 수풀을 응시했다.
그가 바로 마검을 소환하더니 손잡이를 잡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잠깐. 잠깐만요!”
나는 에카르트의 팔뚝 위에 손을 올려서 검을 뽑지 못하게 막았다. 그 대신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평화는 물 건너갔지만 더 멀어졌다고 한탄하면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풀을 젖히자 블랑세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놀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브, 블랑세….”
“안녕, 시엘.”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둘만 있는 걸 생각해 보니까 기분이 나빠서 잠시 들렀지.”
둘이 모이니 한 줌의 평화조차 활활 불타 버렸다. 에카르트가 찰떡같이 내 심정을 대변했다.
“정말 소름이 돋는군.”
“음침한 생각 하지 마시죠, 공작님. 불시에 또 올 겁니다.”
블랑세는 내 손목에 걸린 팔찌를 빤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길이가… 그 정도 되려나.”
“응?”
그녀는 이 길을 잘 아는 듯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에카르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못마땅하게 쓸어 넘기고 중얼거렸다.
“기사단을 족쳐야겠군.”
“네? 블랑세라면 어떻게든 들어왔을 거예요.”
3년간 성전의 기사들을 따돌린 전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저 여자는 용케 결계까지 뚫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믿을 게 못 돼요. 더 강력한 마법진을 설치할 수밖에요.”
“더 강력한 마법진?”
“네. 건드리는 즉시 감전되거나 극독을 방출하는 마법진 말입니다.”
서브 남주가 여주를 슥삭하고 죽이려고 하다니. 계획이 더 구체적으로 구상하기 전에 흐름을 끊었다.
“절대 블랑세를 해치지 마세요. 그럼 무조건 파업이니까요.”
“이런,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여전히 뜻이 확고하시군요.”
에카르트는 나의 말에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상당히 아쉬운 눈치였다. 하여 나는 얼른 그를 완치시키고 도망쳐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그런데 블랑세는 언제부터 숨어 있던 거지?’
어쩌면 이전부터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
라멜은 화장대 앞에 앉아 하녀 셋에게 아침 치장을 받았다.
‘산책을 오래했더니 피곤하네.’
그녀는 잠시 졸았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울에는 라멜 자신이 아닌 시엘리나가 있었다.
“꺄악!”
“고, 공녀님! 괜찮으세요?”
하녀들 역시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졸다가 헛것을 본 것이다. 라멜은 꿈이었음을 깨달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늘 같은 불안에 시달렸다. 언젠간 이 자리에 다시 시엘리나가 앉을지 모른다는 불안 말이다.
모든 걸 독차지하고 싶었고 무엇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성의 모든 건 제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리고 있을 뿐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공작가를 나가 놓고, 마음을 바꿔서 돌아오면 어떡하지?’
시엘리나를 내보냈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언짢던 라멜은 하녀 한 명을 노려보다 빗을 뺏어 들고 손등을 때렸다.
“앗!”
바로 이전에 시엘리나의 하녀로 일한 실라였다.
“빗질을 왜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야! 머리카락을 다 뽑을 셈이야? 깜짝 놀랐잖아!”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계급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일부러 하녀들을 꾸짖었다.
전처럼 무시받고 싶지 않았기에 먼저 남을 무시했다. 특히 시엘리나를 유달리 잘 따르던 실라에겐 개인적인 감정이 더 컸다.
“너 따위가 나를 단장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야지!”
“죄송해요, 공녀님!”
다시 손찌검하기 위해 손을 들자 다른 하녀가 다급히 보고했다.
“공작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래?”
라멜은 손을 내리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슥슥 가다듬었다. 마치 연인에게 잘 보이려는 여자처럼.
이윽고 공작이 들어오자 부녀는 깊은 포옹을 나눴다. 라멜은 언제 실라를 쥐 잡듯이 그랬냐는 듯 천사표가 되었다.
“라멜!”
“아빠~”
공작은 푸근하게 웃으며 희소식을 전했다.
“에카르트 님이 답장을 주셨단다. 내일 당장 크로덴 공작 저로 가자꾸나!”
“정말요? 역시 아빠의 편지를 거절할 리가 없죠. 감사해요!”
“다 네가 사랑스럽다는 소문을 들은 덕분 아니겠느냐. 아무리 전쟁귀라고 해도 네게 은근한 관심이 있던 거겠지.”
화기애애한 대화를 마무리한 후.
라멜은 아까 치장을 돕던 하녀들을 데리고 시엘리나의 방으로 갔다. 시엘리나가 떠난 후 그 방도 전부 드레스룸으로 개조해서 썼다.
그녀는 희귀한 보석으로 자수를 놓은 드레스를 몇 벌 대 보다 바닥에 팽개쳤다.
“너.”
그리고 라멜은 실라를 지목했다.
“의상실에 가서 새 드레스 사 와. 이번엔 취향에 맞는 거로 골라 오란 말이야. 값은 얼마든 치르겠다고 전하고.”
“…네, 라멜 님.”
이전에도 드레스를 가져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맞은 적 있었다. 실라는 시엘리나가 떠난 후 계속 시답지 않은 이유로 매를 맞기도 했다.
이런 명령은 라멜의 단순한 유희거리에 불과했다.
“당장 안 가고 뭐 해!”
실라는 라멜이 다시 매를 들기 전에 나와 보았다.
‘공작 부인이 이달에도 의상실에 상당한 어음을 달았는데 똑같이….’
이런 문제를 보고하면 공작은 하나뿐인 딸과 부인을 최고로 대우하라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이야 잘 알았지만, 공작성 드레스룸엔 사고 입지 않은 수백 벌의 드레스가 널려 있었다. 사치가 과했다.
‘시엘리나 공녀님껜 옷 한 벌 사 주는 것도 아까워했으면서.’
사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던 시엘리나가 떠올라 화가 났다. 이전에 시엘리나가 공작성을 떠날 때 공작은 고용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엘리나가 마법에 뜻이 있어서 출가했다. 너희도 다 해고하려 했지만, 라멜의 부탁으로 그 애의 시중을 들게 되었으니 정성을 다해 라멜을 따르거라.”
하지만 실라는 공작의 차별과 라멜의 괴롭힘이 아니었다면, 시엘리나가 공작성을 나갈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라는 시엘리나가 떠난 후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은행 계좌를 만들어 뒀으니 돈을 찾아가라는 말과 반드시 동방으로 떠나 배우고 싶은 걸 배우라는 응원이 적혀 있었다.
한낱 하녀인 자신도 이렇게 챙겨 주는 심성 고운 이에게 받은 은혜를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실라는 공작성을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돌아온다면 힘이 되도록 묵묵히 공작가에 남아 있었다. 시엘리나가 없는 사이 일어난 일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면서 말이다.
***
에카르트가 한나를 납치하고 블랑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긴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루솔릿 공작가가 방문하기로 했다. 가족이 온다는 말에 하녀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내 머리를 정성스레 손질했다.
“루솔릿 공작님이 오신다니요!”
“그렇다면 드디어 공녀님과 혼담을?”
나는 단장을 도와주던 하녀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혼담이라니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그런 말은 없었는데.’
나의 그런 반응을 오해했는지 하녀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다 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앗, 정면 봐 주세요! 그야 주인님과 교류하는 여성분은 공녀님과 블랑세 양이 유일하니까요. 그중에서 공녀님이라면 사족을 못 쓰시죠. 우후훗.”
“우흐흐.”
“후훗!”
음흉하게 웃는 모습이 좌우지간 주인만큼이나 이상했다. 나는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까 봐 확실하게 말해 두기로 했다.
“에카르트 님과는 함께 일하는 사이일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