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5화 (15/115)

#15화

저 여자의 이름은 한나 오렌.

동방 의학 수준을 한 차례 끌어올린 대단한 의사였다.

‘이 분야의 최고자라서 실라도 만나고 싶어 했지.’

중요한 국가 전력이나 고위 귀족은 검증된 백마법사를 고용했지만, 대부분의 평민은 무명 백마법사나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책을 집필하고 환자를 돌보느라 바빠서 얼굴을 보려면 1년은 걸린다는데.

‘대체 어떻게 데려온 거야?’

그녀가 겁에 질린 걸 보니 그다지 평화로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추측은 가능했다.

“윈터로드 제국의 크, 크로덴 공작님께서 저를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

아마 목적도 모르고 납치당한 모양이다.

따지는 건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무슨 도움이라도 받아야겠다. 그전에 나는 에카르트에게 속삭였다.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려 줘도 되나요?”

“걱정 마십시오. 저에 대한 저주는 알고 있을 겁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입막음을 잘 시키면 되니 걱정 마세요.”

입막음이란 단어가 긍정적인 의미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일반인도 알 만한 정보만 꺼내기로 했다.

“저는 공작님의 저주 치료를 돕고 있어요. 한나 님께서는 마검의 저주를 효과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나요?”

그러자 한나가 눈치를 보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인간의 신체는 우주와 자연과 맞닿아 있고, 상성의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하죠. 백마법은 성력을 감돌게 해서 마검의 힘을 억누르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맞아요.”

“혈을 직접 자극해 성력 순환을 원활히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침을 놓으라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녀는 돌팔이로 몰릴까 봐 두려웠는지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그러더니 내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우선 제가 마법사님의 진맥을 짚어도 괜찮을까요?”

“진맥으로 제 마력까지 알아낼 수 있나요?”

“믿어 주세요! 마법 또한 신체를 이루는 하나의 기운입니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흐음.”

나와 에카르트는 동시에 반신반의했다.

전생에 무협지 속에서나 한의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그때도 잘 믿지 않았는데, 여기서도 동방 의학은 결이 같은가 보다.

역시 한국인이 쓴 소설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일단 소매를 걷어 주자 한나가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진맥을 짚었다. 아까까지 떨던 모습은 사라지고 예리한 눈빛이 되었다.

“혹시 마법사님께선 지팡이 없이도 마법을 발동할 수 있습니까?”

“네, 맞아요.”

“그동안은 지팡이로 치유 술식을 발동해 치료하셨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들어 보았다. 한나가 내 손을 쥐었다가 펴 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만져 보기도 한 후 확신했다.

“마법사님의 순수한 힘을 사용하면 더 효과가 좋을 겁니다!”

“순수한 힘?”

“네, 바로 어떤 술식으로도 변환하지 않은, 어떤 속성도 덧붙이지 않은, 태초의 마력 그 자체지요!”

“마력….”

나는 내게 피처럼 흐르는 자연스럽고도 따뜻한 힘을 끌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빛이 모였다. 바로 내 마력이었다.

“오오, 바로 그겁니다!”

한나의 검은색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콧김이 나올 정도로 흥분했다.

“제가 공작님의 혈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력을 끌어낸 상태로 한번 그 자리를 지압해 보십시오.”

“잠깐, 뭐예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주먹을 쥐어서 손끝의 마력이 사라지게 했다.

이전에 루솔릿 공작성을 나오며 나를 막아선 기사들을 위협할 때, 블랑세의 방 창문으로 들어갈 넝쿨을 만들어 낼 때나 썼는데.

‘의료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나?’

백마법도 치료 부위마다 마법진이 다르다는 점에서 동방의 지압과 비슷한 맥락이 있을지 몰라도, 애초에 마력 지압은 듣도 보도 못한 치료법이었다.

“이렇게 두 분야를 융합하는 시도가 전에도 있었나요?”

“아뇨. 공작님의 체질이 마검 때문에 특별하신 데다, 지팡이 없이 마력을 사용하는 분도 드뭅니다.”

“드문 두 가지 체질이라.”

“게다가 보통은 한 가지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나으니 다른 사람에겐 불필요한 방법이지요.”

“흐음.”

완벽하게 원작 인물들에게서 떠나려면 그를 완치시켜야 했다.

차라리 원작의 주인공들은 알아서 흐름대로 만나 해피 엔딩하고, 그를 방해하는 인물인 에카르트를 치료해 주고, 그래서 완벽한 상태로 마수를 소탕하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더불어 그래서 그가 저주의 속삭임을 듣지 못하도록 저주를 없애고 말이다!

원작과 기존 치료 방식은 한계가 존재했으니.

나는 고민하다가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설마 마검의 지배자가 죽기야 하겠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에카르트. 정말 괜찮겠어요?”

“네. 한번 해 봅시다.”

에카르트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나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헬라에게 종이와 펜을 부탁했다.

그 후 한나는 종이에 뭔가를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중지에서 손바닥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스케치하더니 붉은 원을 표시했다.

차마 에카르트에게 직접 손을 대진 못하고 이렇게 그림으로 알려 주려는 모양이다.

“이 자리인가요?”

나는 에카르트의 손을 잡고 그림의 위치와 대조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이제… 조금만 해 볼게요.”

약간 긴장되어 침을 삼키고 소량의 마력을 모았다.

눈을 질끈 감고 에카르트의 중지 아랫부분을 살짝 눌렀다. 손끝에서 나온 빛은 그의 손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시엘리나. 조금 더 강하게 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전에 사람을 날려 보낼 뻔했어요.”

“그런 귀한 광경을 못 보다니 아쉽군요. 하지만 저는 마검의 주인이니 괜찮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좀 더 마력을 모아도 에카르트는 정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해 보인달까.

이내 마력이 그의 몸에 충분히 스며들었는지 사그라들었다.

“어때요?”

“저 여자가 돌팔이는 아닌가 보군요. 물론 당신이 잘하신 덕분이겠죠.”

치료가 성공적이었다는 말에 한나가 열띤 얼굴로 인체를 그려 몇 가지 부위를 더 알려 줬다. 납치당한 와중에 친절하니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한나. 치료하다 공작님이 잘못되는 일은 없겠죠?”

“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크로덴 공작님도 제게는 환자입니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한나는 한 시간 후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에카르트는 한나의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손 외에도 다른 부위가 여러 개 표시돼 있었다. 그는 치료가 아주 만족스러웠는지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저 정도로 좋은가?’

나는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하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얼마 후 에카르트가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는지 한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고 다닌다면 곤란해질 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그, 그럼요! 제발 돌아가게만 해 주십시오.”

“헬라. 한나를 돌려보내.”

그러자 헬라와 기사들이 한나를 연행하듯 응접실 밖으로 데려갔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나마 문 너머로 외쳤다.

“고, 고마워요!”

***

한나를 보내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꽃게가 들어간 스프, 버터 향이 좋은 바닷가재, 연어구이 샐러드였다. 그 외에 내가 이름을 모르는 여러 휘황찬란한 음식이 차려졌다.

‘설마 진짜로 사람을 납치하다니. 한나가 잘 돌아갔을까?’

실라를 만났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걱정스러워서 식사를 깨작거렸더니, 에카르트가 슬쩍 내게 말을 걸었다.

“시엘리나.”

“네?”

“평소보다 적게 드시네요. 요리가 입에 안 맞는지 신경이 쓰입니다.”

그는 태연하게 식사가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접시 위의 바닷가재를 째려보다 포크를 내려놓자 에카르트가 뭔가 결심했다.

“요리사가 식탁에 직접 올라가야 정신 차리겠군요.”

“왜 말을 무섭게 해요?”

나는 뒤늦게나마 에카르트에게 따졌다. 그리고 포크를 들고 삿대질하듯 그를 가리켰다.

“…제가 말입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아까도 사람을 그렇게 납치하고, 사과도 제대로 안 했잖아요.”

“그럼 다시 데려올까요?”

에카르트는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다시 보겠다고 하면 똑같이 납치해서 데려올 거라는 생각에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뻔뻔한 대답에 하마터면 뒷목을 잡을 뻔했다. 결과가 좋으면 방식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정말이지 지구의 초등학교 도덕책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쥐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또 누군가를 납치하면….”

“납치하면?”

“저도 파업하겠어요.”

에카르트가 나중에 흑막이 된다면 그건 다 그의 인성 탓이다. 그간 내가 제국 멸망의 촉매제 역할을 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비위도 맞춰 주고 원작의 악녀처럼 악행도 안 저질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동방 의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이유로 한나가 납치당했다. 마치 그의 악행을 내가 부추긴 듯해서 마음에 걸렸고, 죄책감도 들었다.

‘내가 있는 동안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어떡해?’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그와 딜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포크는 부서졌다.

“…파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파업이요.”

“허.”

접시도 금이 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나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원래의 악녀 같은 얼굴을 잘 활용하며 눈을 부릅떴다.

“파업. 한다고요.”

“시엘리나. 파업은 안 됩니다.”

“왜요?”

“당신은 제 백마법사니까요.”

“그건 애초에 당신이 마음대로 정한…!”

말을 꺼낸 순간 연회장 전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주변의 공기까지 좌우하는 어떤 힘에 의해 본능적으로 말을 삼켰다. 선뜻 뒤에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열을 더 내려고 했는데,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머리를 식혔다.

‘이건 또 무슨 능력이야? 마검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저주가 심해졌을 때와 비슷한 기류였지만 그보다 더 불안정하고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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