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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4화 (14/115)

#14화

그 참혹했던 장면을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을 쥐어 짜내고 망치로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아냐. 막을 수 있어.’

블랑세는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젓고, 다시 술식을 풀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마법은 걸 수도 있듯이 해제할 수도 있었다. 이 결계를 해제하면 문 너머가 드러나겠지.

블랑세의 손짓에 복잡한 기호와 도형, 문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이윽고 최종 술식을 완성했다.

드디어! 마지막 남은 결계가 사라지고 문이 열렸다.

“하.”

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블랑세가 허탈하게 웃었다. 겨우 뭔가를 알아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난관이 남았다니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3년이나 몰래 이 술식을 해결하는 데에 공을 들였는데.’

블랑세는 실망을 뒤로하고 우선 새로 드러난 문을 살펴보았다. 문 중앙에는 얇고 긴 홈이 패여 있었다. 20cm 정도의 길이였고 중간 부분에 동그란 문양이 파여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일단 모양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힘을 얻어야 해. 내가 더 강해져서 그 일을 막겠어.’

저 문 너머에는 그녀가 알 수 없는 힘이 숨겨져 있다. 불길할 정도로 강했다. 블랑세는 그 힘을 이미 얻은 듯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

나는 더 이상 블랑세에게 집착하는 대신, 에카르트의 치료법을 마저 연구하기로 했다.

“시엘리나. 임시 연구실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책상과 의자가 두 개 있는 거대하고 번듯한 방을 마련해 주었다.

“두 개까지는 필요 없는데요.”

“하나는 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느긋하게 서류 업무를 하겠습니다.”

“네? 집무실을 놔두고요?”

“시엘리나도 제가 가까이 있어야 실험하기 편할 겁니다.”

내 의사가 어찌 됐든 이미 헬라가 그의 책상에 서류를 잔뜩 쌓아 놓고 갔다. 에카르트는 맞은편에 앉아 태연히 서류를 펼쳐 들었다.

내쫓을까 하다가 이미 그가 업무에 집중한 듯해서, 나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블랑세가 원작에서 만들었던 연고를 업그레이드해야겠어.’

그 연고의 유통기한을 늘려서 만들면 직접적인 백마법 치료를 대체할 수 있으니, 에카르트와 몇 년은 떨어져 있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시중에 판매하는 회복약은 에카르트의 저주에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에선 블랑세가 특별한 마력을 담은 특별한 연고를 제작했다. 그 연고는 에카르트가 이후에 몇 달간 출정을 갔을 때 임시로 사용했다.

‘다른 재료를 섞어서 유통기한을 늘려야지. 몇 년은 쓸 수 있게 말이야.’

연고를 잔뜩 주고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다 보면 나를 잊을 것이다.

물론 원작에서 그 연고는 멀리서도 블랑세를 그리워하는 효과를 낳았지만, 나에 대한 감정은 그런 애정과 사뭇 다르니 말이다.

에카르트는 내 백마법으로 편안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가 없어도 만족할 테니까. 치료 방식은 상관없을 것이다.

블랑세가 사용한 재료와 양도 확실히 기억했다. 나는 재료 목록을 작성해 에카르트에게 넘겼다.

“연구에 필요한 재료들이에요.”

“네. 제가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이전에 백마법사가 없다고 둘러댄 전적이 있다. 또 발이 묶이는 상황이 생길까 봐, 나는 단호하게 당부했다.

“안 구해 주면 직접 사러 갈 거예요.”

“…시엘리나.”

뭔가 못마땅한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에카르트였다.

그가 마수들을 종이를 베듯 해치우던 모습이 생각났다. 내가 알지 못하게 부하들도 직접 죽였던 장면도.

하지만 나는 오기가 생겨서 멋대로 나가기로 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되지. 내가 아직도 공작성에 있는 것도 누구 때문인데!’

“왜요? 저도 발 있어요. 마법사치고 체력도 좋고요.”

“재밌군요. 저를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되셨습니까?”

“그, 그런 거 알아서 뭐하죠?”

“저는 당신에게 휘둘리는 게 나쁘지 않거든요.”

에카르트가 여유롭고도 카리스마 있는 미소를 지었다. 휘둘리긴 무슨. 꿈쩍도 하지 않았으면서.

나는 괜히 블랑세도 모자라 에카르트에게까지 진 기분이 들었다.

헬라가 재료를 몇 시간 만에 모두 구해 왔다.

그녀가 내민 주머니엔 돌이 된 용의 꼬리 조각, 수호 나무가 떨어뜨린 잎사귀, 만년설 100그램 정도가 들어 있었다.

“구하기 힘든 희귀한 재료였는데요!”

“크로덴 가문의 집사인 제게 이 정도 심부름은 간단합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내가 진심으로 놀라며 칭찬하자 헬라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괜히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공녀님이야말로 대단하죠.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정말 간단한 일이죠.”

“별거 아니긴요. 정말 멋진데요! 고마워요.”

“머, 멋지다니 과분합니다! 어, 어쨌든 시키실 일이 있으면 또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어른스럽고 완벽해 보였는데 칭찬에 약하구나….

상사가 에카르트이니 고용인을 칭찬하는 데에 야박했겠지. 지금도 그는 작업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서류를 꾸깃꾸깃하게 쥐고 헬라를 노려보니 말이다.

“헬라.”

“네, 공작님.”

“드렸으면 썩 나가.”

“…알겠습니다.”

에카르트가 내뿜는 흉흉한 기세 속에서 나는 그녀가 가져온 재료로 열심히 연고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마력을 담은 후 에카르트에게 내밀었다.

“완성했어요. 한번 발라 보세요.”

“발라 주십시오.”

“아, 네.”

그렇다고 해서 손이 닳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자.

나는 일회용 막대를 들고 연고를 덜어 낸 다음 그의 손등에 문질렀다.

검사답게 힘줄이 돋고 굳은살이 박여 있으면서도 하얗고 손가락이 길어 귀족 같은 손이었다. 연고가 빠르게 손등에 스며들어 갔다.

“효과가 어떤가요?”

그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스쳤지만 이내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직접 치료해 주는 게 더 좋습니다.”

“…그래요?”

나는 조제법을 다시 확인하고 내 손등에도 발라 보았다.

<효과가 좋군요. 다음 전투에 이 연고를 가져가겠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원작에서 블랑세가 줬을 때는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효과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있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살필 필요는 없겠지. 본인이 직접 치료해 주느니만 못하다는데 어쩌겠는가.

“제가 뭔가 잘못 만들었나 봐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리자 에카르트가 당황해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손등에 연고가 아직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건 아닐 겁니다! 문제는 저한테 있습니다.”

“에카르트에게요? 어쨌든 이 연고는 폐기해야겠어요.”

“…싫습니다. 간직할 거예요. 당신의 마력 단 한 점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더니 내 손등에 발린 연고까지 제 손바닥에 싹싹 문질러 갔다. 연고도 어느새 제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말이다.

‘핸드크림 같은 게 아니라고! 저 마력 집착남 같으니….’

나는 재료 몇 가지를 바꿔 다른 연고도 제작하기로 했다.

그는 내가 연구하는 동안 슬쩍 곁으로 와서 말을 걸기도 하고, 책상에 펼쳐 둔 재료도 훑어보았다.

“고대 아귀의 비늘은 독 아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다른 약초와 조합하면 회복약으로 활용할 수 있죠. 희귀한 재료인데 바로 알아보셨군요.”

“어렸을 때 자객이 제게 이 독을 썼습니다.”

속으로 내심 다른 사람을 독살하느라 알 것이라고 오해한 바람에 약간 미안해졌다. 원작을 알다 보니 편견이 남아 있달까.

내가 종지에 대고 약초를 빻으려고 하자 에카르트가 슬쩍 유발을 가져갔다.

“힘쓰는 건 제게 맡기십시오.”

그러더니 책상이 박살이 날 정도로 약초를 찧기 시작했다.

과하긴 해도 염치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와 함께 두 번째 연고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훈훈한 감정은 곧바로 증발했다.

***

한 시간 후.

두 번째 연고도 직접 치료할 때와 효과가 같지는 않다는 반응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세 번째 방법을 고안했다. 그러는 동안 헬라가 다시 연구실로 들어왔다.

“공작님. 응접실로 데려왔습니다.”

데려오다니. 누구를? 궁금증에 내가 마법 술식을 가득 적은 종이에서 얼굴을 떼자, 에카르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시엘리나.”

“네.”

뚜벅뚜벅 구두 소리가 내 책상과 가까워졌다. 어느새 그가 의자 뒤로 다가와, 내 어깨를 스치듯 감쌌다.

“동방 의사를 응접실로 데려왔습니다. 마음껏 고문하거나 취조하십시오.”

“네-에?”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벌떡 일어난 사이 에카르트가 허리를 숙인 바람에 하마터면 얼굴이 부딪칠 뻔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도무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한 천진한 눈빛이었다. 오히려 칭찬을 바라는 악당 같달까. 그의 손가락이 뱀처럼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감쌌다.

“제게 필요한 일요?”

“당신이 제 치료를 돕기 위해 동방으로 떠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공작성으로 동방 의사를 데려왔다고요?”

대체 사고 회로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동방이라니. 제국에서 몇 개의 왕국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곳이라, 대다수는 동방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곳의 의사는 또 어떻게 만났단 말인가!

“마침 제국에 있기에 포획했지요. 지금 보러 갑시다.”

오래 붙잡을수록 그 가엾은 동방 의사는 겁에 질리겠지.

생각지도 못한 행동력에 나는 넋이 나갔다. 그 바람에 우리가 손을 잡고 걸어왔다는 사실도, 응접실까지 도착하고서야 깨달았다.

응접실에는 나처럼 안색이 새파란 중년의 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뒤를 두 명의 기사가 지키는 중이었다. 여자가 초조하게 손깍지를 풀었다가 꼬았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의학 자료집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인데.’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동방 의학의 대가라고 불리는 한나잖아요!”

“그렇습니까? 일단 제일 유명한 인간으로 데려왔습니다.”

에카르트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천연덕스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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