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술과 연관된 상념을 멈추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뜻밖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헉.”
어느새 블랑세가 성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나를 따돌렸을 줄이야.
‘어딜 가는 거지?’
나는 급하게 귀빈실로 돌아가 스카프를 두르고 나왔다. 이전 세계의 드라마에서 본 건 있어서,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가리고 변장하려는 용도였다.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는 헬라를 두고 계단을 후다닥 내려갔다. 블랑세를 뒤쫓아 막 성문을 빠져나려던 찰나.
“시엘리나. 어디 갑니까?”
어디선가 등장한 에카르트가 나를 붙들어 세웠다. 블랑세가 나가는 것도 봤을 텐데, 인사도 없이 그냥 보냈으면서!
“블랑세 따라가려고요.”
“그 여자를요? 그렇다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국의 수호자가 그렇게 한가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린다고 순순히 따를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동행을 허락했다. 게다가 미행은 내 전문 분야와 거리가 머니까 오히려 그와 함께하는 게 들킬 확률이 적을지도.
“…대신 다짜고짜 난입하는 건 금지에요.”
“당신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판단은 제가 할게요.”
그렇게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블랑세를 추적하기로 했다.
***
블랑세는 중간에 마차에 탑승했고, 우리도 마차를 구해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수도 중심가까지 왔다.
임시로 구한 마차이다 보니 공작성의 마차보다는 좁고 불편했다. 에카르트는 스카프를 머리에 둘둘 말은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그렇게 이상한가요?”
“아뇨. 시엘리나는 뭘 하든 아름답습니다.”
1 더하기 1은 2라는 게 당연한 사실처럼 그가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런 말을 잘도 한단 말이야.’
만약 그에게 사랑받았다면 이미 나는 외부와 모든 접촉이 차단되었을 터였다. 이렇게 나와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안 되었을 것이다.
상대 주변의 모든 걸 제거하고, 오직 저만 남기는 게 그의 사랑법이었다. 그나마 내 백마법에만 집착하기에 블랑세를 내버려 두는 거겠지.
비록 틈날 때마다 죽이려 해도 어쨌든 살려는 두고 있으니 말이다. 신경 쓰이긴 해도 칭찬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블랑세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이 방향은 신전 같습니다.”
“신전이라….”
빛의 성전과 신전. 둘의 이름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 많다.
성전은 마법 연구가 주로 이뤄지는 반면 신전은 종교적 역할을 한다. 제례를 주관할 뿐만 아니라 기부금을 활용해 빈민을 돕는다. 게다가 결혼과 이혼 절차를 맡고 친자 검사까지 한달까.
‘블랑세도 신전에서 자랐지.’
신관들은 그녀가 부모에게 버려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키웠다.
작가가 설정을 짜다 말았는지 끝내 출생의 비밀도 밝혀지지 않았고, 블랑세 역시 딱히 부모를 찾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이미 나온 신전에는 무슨 볼일로 왔지?’
블랑세는 마차를 세우고 에카르트의 추측대로 신전에 들어갔다.
신전 앞은 두 명의 치안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치안 기사는 별도의 심문 없이 블랑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우리도 마차에서 내려 따라갔다.
“신전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사가 앞을 가로막았으나 에카르트가 로브를 들어 올리자 모든 일이 해결됐다.
“힉, 크로덴 공작님.”
기사 둘이 양옆으로 공손히 비켜섰다.
신전은 오래돼서 벽에 금이 간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조용했다.
신관들은 걷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몸가짐이 단정했다. 내가 에카르트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까 공작님의 얼굴만 보고도 바로 들여보내던데요.”
“네, 크로덴 가문에서 기부한 금액이 상당하니까요.”
“얼마나 되는데요?”
“신전 전체 기부금의 절반은 넘게 차지할 겁니다.”
“그렇게 많이!”
“어머니께서도 이곳을 자주 찾으셨죠.”
그의 어머니라면, 에비게일 크로덴. 선대 공작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가족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제국에 익히 알려져 있었다.
에카르트가 일곱 살 때 암살당한 선대 공작 부부. 암살자가 방화까지 저질러 집은 전소됐고, 어린 에카르트는 그 현장을 목격했다.
범인은 작가가 이름도 대충 지은 엑스트라 후작 가문이었다. 암살 동기는 공작가의 권력이 질투가 나서였다나.
‘고작 엑스트라 후작이 공작 부부를 죽이다니 설정 붕괴 같지만 말이야.’
공작인 어머니가 마검의 주인이었고, 부군인 아버지가 성전의 백마법사였던, 먼치킨 부부였는데 말이다.
에카르트는 복수하기 너무 어린 나이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후작가는 전부 황실에서 처형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카르트는 마검을 물려받고 각성해 공작이 되었다.
그리곤 제 힘이 더 강했다면 부모를 지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책으로 읽을 때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소설은 지금의 나에겐 실존하는 세계였다. 불행한 어린 시절이 있다는 설정 역시 그에게 실제 일어났던 비극이었다.
“어머니는 신전에서 무슨 기도를 하셨던 걸까요?”
에카르트가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였다.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대답을 해 주듯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선대 공작이 무슨 기도를 했든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까.
“에카르트. 그냥 여기서 돌아갈까요?”
블랑세를 계속 뒤쫓는다면 뭔가를 알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에카르트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당신과 같이 있으니까요.”
‘내 마력이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나?’
“다행이에요. 그래도 무리하진 말아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블랑세를 따라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주교실이었다. 하얀 신관복에 녹색 띠를 두른, 중년의 남자 주교가 블랑세를 반겼다. 개방된 곳이었기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렸다.
“어서 오너라, 블랑세. 신전에 이렇게 종종 와 줘서 반갑구나.”
“주교님께서도 잘 지내셨어요?”
“그럼. 무슨 일로 왔느냐?”
“음. 결혼 서류를 미리 작성하려고 하는데요.”
“결혼이라!”
나는 거기서 불길함을 느꼈다. 주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랍에서 서류를 가져왔다.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는 펜을 내밀었다.
“틀림없이 성품이 어질고 바른 자제겠지.”
“그럼요. 게다가 아름다워요.”
“이름은 무엇이냐.”
“시엘리-”
블랑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녀가 서류에 펜촉을 가져다 대기도 전에, 에카르트가 마검을 꺼내 달려간 것이다.
마검이 순식간에 책상을 갈랐다. 아마도 혼인 신고서로 보이는 종이가 반듯하게 반으로 베였고, 책상 역시 깔끔하게 무너져 내렸다.
에카르트는 그에 그치지 않고 몇 번 더 검을 휘둘렀다. 마치 파쇄기에 갈아 넣듯 서류가 갈기갈기 잘려져 나갔다.
심약해 보이던 주교는 결국 얼굴이 새파래져 가슴을 부여잡았다. 에카르트가 품에서 금화를 꺼내 주교에게 툭 던졌다.
“나머지는 기부금으로 쓰도록.”
나는 더 이상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무리 크로덴 공작이라고 해도 더 이상 행패를 부렸다간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주교실로 들어가서 왼손으로 블랑세의 손목을, 오른손으로 에카르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둘을 질질 끌고 나왔다.
계속 웃음을 참던 블랑세는 신전 밖까지 나오자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 시엘. 이렇게까지 집착해 주다니. 너무 성실하잖아!”
“…너, 내가 따라오는 거 알고 있었지?”
“그럼. 누구의 음침한 기운도 느껴지는데 모를 리 없잖아.”
주어를 생략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시엘이 어디까지 따라올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블랑세, 너 진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사이 그녀가 내 팔짱을 꼈다.
“뭐,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대신 맛있는 거 살게. 물론 공작님은 두고 우리끼리 가자.”
“누구 마음대로 공녀와 함께 가겠다는 거지?”
“공작님까지 사 드릴 돈은 없는데요.”
“계산은 내가 할 테니 자네는 시엘리나와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는 게 좋겠군. 아니면 다른 가게도 나쁘지 않아.”
일단 둘의 싸움을 막는 게 우선이었기에, 나는 다시 둘의 손을 하나씩 잡고 말했다.
“가자. 다 같이!”
그렇게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결한 후. 우리는 같은 마차를 타고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블랑세는 늦은 밤 내 방을 찾아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시엘.”
“…블랑세?”
잠이 들었던 와중이었기에 비몽사몽하게 눈을 비비며 답했다.
“시엘. 다음에도 또 집착할래?”
“…또?”
“네가 하는 집착은 좋았거든.”
그러고 그녀는 “다시 올게.”라고 속삭인 후 홀연히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
공작 저에서 빠져나온 블랑세는 신전에 조용히 잠입했다. 구름에 달이 가려져 더 어두운 날이었다.
그녀는 비밀스러운 길을 지나, 어스름한 불빛에 의지한 채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을 걸어 평범한 창고가 나오자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숨겨진 틈을 찾아내 반대쪽으로 밀었다.
그 바닥 아래로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긴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잠시 바라보던 블랑세는 내려간 후 틈을 닫고 계속 아래로 향했다.
계단이 끝난 자리엔 커다란 날개를 가진 천사 조각상이 보였다. 블랑세가 익숙하게 조각상의 손과 손깍지를 끼자, 조각상에 신비로운 힘이 감돌더니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문은 막혀 있었으나 그 너머로 초월적인 미지의 힘이 느껴졌다.
‘강력한 힘이라.’
그녀는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무너진 집과 불타는 마을. 울부짖던 사람들. 마수가 뒤덮인 하늘과 피가 흩뿌려진 땅.
“살려 주세요!”
“…님! 부디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리고 침묵. 지금으로는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