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루솔릿 공작이 초조하게 리셀의 마차를 쫓아갈지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아빠~!”
라멜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라멜은 공작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곧바로 눈치챘다.
‘이런, 크로덴 공작에게 답장이 왔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질문은 잠시 미루기로 한 라멜이었다. 일단 먼저 아버지의 기분을 풀어 주기로 했다.
“…아빠, 엄마가 가셨어요?”
“그래.”
라멜은 짜증이 치밀었다.
애초에 리셀이 한 번도 제대로 저를 돌봐 준 적도 없어서 그저 생물학적 어머니라고 인지할 뿐,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공작 부인이 됐으면 처신 잘해야지. 안주인 역할 제대로 하는 건 기대도 안 해. 창부일 때 버릇이라도 버리든가!’
그러다 공작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라멜은 혹여 저와 리타까지 시엘리나 같은 천덕꾸러기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더 애교를 부렸다.
“아빠, 저랑 같이 정원 산책할까요?”
“산책이라니! 좋구나. 아빠와도 티타임을 갖자꾸나.”
루솔릿 공작은 속도 모르고 귀여운 딸의 애교를 보며 기뻐했다. 물론 라멜은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지금처럼 공작의 사랑을 받아야 해. 이전처럼 거지같이 살고 싶지는 않아.’
그녀에게 시엘리나나 리타처럼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사랑받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라멜이었다.
***
블랑세에게 역지사지를 깨닫게 해 주겠다는 계획을 고작 이틀 만에 포기할 수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해가 진 후 나는 다음 작전에 돌입하기로 했다. 나는 니나에게 은밀히 물어보았다.
“니나. 혹시 밧줄 있나요?”
“밧줄요?”
“네. 사람이 매달려도 튼튼한 거로요.”
“대, 대체 뭘 하시려고요!”
걱정할 필요 없었다. 단지 그녀의 방 창문으로 잠입하려는 것뿐이니까.
그러나 니나와 내가 격식 없는 사이라 해도, 내 위대한 계획을 설명하기엔 이상해 보일 터. 답하기 곤란해하자 니나는 내 손을 꼭 잡고선 단호히 말했다.
“사랑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렇게 속상해하지 말아요.”
“예?”
사랑 때문인가.
“제가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 테니 블랑세 양은 잊으세요. 항상 공녀님을 아끼는 사람이 많다는 거. 아시죠?”
“네? 네….”
“다행이에요. 나쁜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그녀는 해사하게 웃고 삼단 트레이로 쌓은 디저트를 잔뜩 내왔다. 엉뚱한 구석이 있었지만 착한 하녀였다.
나는 트레이의 마카롱을 집어 먹으며 이따 창문으로 잠입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날 밤 몰래 귀빈실을 빠져나와 외벽 앞에 섰다.
‘3층 맨 오른쪽이 블랑세의 방이지.’
그 아래에서 지팡이를 꺼내 집중했다. 성전에서 수련한 덕분에 마력을 원하는 형태로 좀 더 정교하게 바꿀 수 있었다.
지팡이 끝에 빛이 모여들더니 끈처럼 길게 늘어났다. 내가 초목 속성의 주문을 읊자 빛은 초록빛으로 물들고 튼튼한 재질로 바뀌었다. 마치 넝쿨 같았다.
‘좋아. 이제 이걸 걸쳐서….’
나는 마법으로 만든 넝쿨을 올가미처럼 빙빙 돌려 던졌다.
넝쿨은 3층 창가 근처의 돌출된 외벽에 걸쳐졌다. 몇 번 넝쿨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튼튼한가를 확인한 후 벽을 타기 위해 발을 올렸다.
하지만 벽을 오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대체 블랑세는 어떻게 매번 성전을 빠져나간 거야?’
팔에 힘이 부족해서 자꾸만 벽에서 미끄러졌다. 부드러운 촉감인데도 넝쿨을 쥔 손바닥이 아파져 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2미터쯤 올라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넝쿨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만들어 냈기에 집중력이 떨어지면 효과가 다하는 것이다.
‘앗, 사라진다!’
추락하기 직전 방어 마법을 발동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마법이 아니라 뭔가 나를 탄탄한 두 손으로 받쳐 주고 있는 듯한데.
슬그머니 눈을 뜨자 에카르트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고 있었다.
“시엘리나! 다친 곳은 없습니까?”
날카로운 눈이 놀란 듯 커다랗게 되는 그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내 앞에서 무방비한 표정을 지을 때면, 제국을 무너뜨린 흑막이 아니라 무구한 청년 같다. 그게 낯설었던 나는 감사 인사도 뒤늦게 하고 말았다.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여기서 뭐 하십니까?”
“저 위로 잠입하려고요.”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 알겠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범행을 저지르고 도둑의 소행처럼 위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블랑세를 죽이려는 게 아니에요!”
혼을 냈더니 마치 눈앞의 먹이를 보내 준 맹수처럼 아쉬워했다. 슬슬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괜찮으니 이제 내려 주세요.”
“다쳤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귀빈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괜찮다니까요. 다쳤어도 백마법으로 치유하면 되고.”
“마력은 저를 위해 아껴 두어야죠.”
“네? 대체 얼마나 더 드리길 원하는 거예요.”
“전부 다요.”
언제부터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는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는 나를 안고 성큼성큼 귀빈실로 걸어갔다.
하지만 떨어진 게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는지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
다음 날 나는 좀 더 간단하고 쉬운 방법으로 집착하려고 했다.
바로 블랑세와 꼭 붙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씻으러 간 사이에 마법으로 기류를 조종해 방 안의 온도를 높였다. 이미 방이 따뜻한 와중에 말이다.
‘후끈후끈한 와중에 달라붙으면 싫어하겠지.’
나는 그녀가 씻고 나오자마자 꼭 끌어안았다.
“시엘, 여기 좀 덥네.”
“그치?”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비키라고 말해도 비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응, 잠시만.”
블랑세가 내 품에 안긴 채로 목욕 가운을 벗으려고 했다.
“뭐, 뭐, 뭐하는 거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녀의 품에서 떨어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말 그녀가 벗지는 않을지 흘긋흘긋 바라봤다.
“왜? 이러면 온도가 맞을 것 같은데.”
“그, 그냥 내가 떨어져 있을게.”
나는 후다닥 멀어져서 작은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다행히 내 얼굴이 붉어지는 불상사는 더 이상 없었다.
며칠간 그녀에게 집착하느라 체력을 많이 쓴 데다가, 따뜻해서 그런지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이렇게 무방비해도 되는 거야?”
잠깐의 침묵 끝에 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끔 전부, …하고 싶어.”
눈을 떠 보니 침대에서 블랑세가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었다.
“나한테 뭐라고 했어?”
“응? 아니.”
분명 블랑세의 목소리였는데 꿈결이었나. 눈을 비비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헬라의 등장에 나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하마터면 공작님께 죽을 뻔했습니다.”
“죽을 뻔했다니.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블랑세가 손을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병자를 많이 보았던 백마법사는 그 단어의 무게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전부터 다소 예민하게 반응했다.
‘내가 다칠 뻔했을 때도 그랬지.’
그때 곧바로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나무 문은 발자국 모양으로 패여 있었다. 에카르트가 문을 걷어차고서는 성큼성큼 들어왔다.
“시엘리나.”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문을 박살 내요?”
“당신이 안 보였으니까요. 귀빈실에 없기에 여기에 감금당한 줄 알았습니다.”
“감금이라뇨. 제가 찾아왔는데….”
에카르트는 침대까지 다가오더니 블랑세에게 으르렁거렸다.
“나와.”
“싫어요.”
“그렇다면.”
그는 단번에 마검을 소환했고 나는 곧바로 방어벽을 만들어 냈다.
“마검 집어넣어요. 당장!”
“시엘리나. 대체 왜 저 여자를 보호하시는 겁니까?”
“당신이야말로 블랑세에게 왜 그래요!”
“자꾸 집착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방어벽을 유지하자 에카르트가 한숨을 쉬고 마검을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앉아 있던 내 옆으로 다가와 추궁했다.
“저 인간과 뭐하고 계셨습니까?”
“음, 집착….”
나도 모르게 솔직히 답했다가 급히 말을 바꾸려고 했는데 이미 늦었다. 그의 눈이 불꽃같아졌다.
“그럼 제게 똑같이 하십시오. 저 인간에게 당신의 집착은 과분합니다. 저도 누워 있으면 됩니까?”
에카르트가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이번에 먹잇감을 놓친 표범처럼 나를 바라봤다.
“자리가 좁을까 봐 배려할 필요 없습니다. 저 여자를 치우면 됩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는 남녀가 함께 침대에 있으면 어떤 오해를 받는지,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설명하려다가 참았다.
이후에 블랑세를 뒤쫓을 필요도 없었다.
“시엘.”
귀빈실 방 침대 밑에서.
“시엘!”
정원 나무 위에서.
“시엘~”
드레스룸의 옷 틈에서.
온종일 나를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뒤쫓으려고 해도 이미 그녀가 나를 따라와 있었기에 꼬리잡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CCTV처럼 감시를 받으니까 오히려 내 기운만 빨렸다.
간신히 혼자 남은 사이. 나는 복도 창문에 턱을 괴고 야외를 감상했다. 잘 정리된 정원 너머로 공작성 입구가 보였고 나무와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평화롭네.’
가끔은 도망치겠다는 의지가 사그라지기도 했다. 어쩌면 여기에 남아 빙의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모습을 그려 보다가 에카르트나 블랑세의 집착으로 관두지만 말이다.
그때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헬라가 걸어오고 있었다. 묵례하는 그녀에게 가볍게 눈인사로 답했다.
헬라는 내 옆으로 다가와 창문틀을 만져 봤다. 관리 잘 된 공작성답게 먼지 한 톨 묻어 나오지 않았다.
“바깥을 보고 계셨습니까?”
“네. 바람이 시원하네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그녀와 한담을 나눴다.
“공작성 일은 할 만한가요?”
“그래서… 가끔 한 잔씩 합니다.”
헬라가 연륜이 담은 눈빛으로 중얼거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족을 덧붙였다.
“걱정 마십시오. 마차를 몰거나 근무할 때는 안 마십니다! 도수가 낮기도 하고요.”
“아아, 네. 공작님께는 말하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혹시 공녀님께서도 술을 드십니까?”
“…아뇨.”
이전 생에서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알코올중독에다가 술에 취하면 늘 내게 화풀이하던 아버지. 나는 나 역시 그렇게 될까 봐 술을 마시기가 싫었다. 더러 권하는 사람들에겐 못한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뜻밖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