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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1화 (11/115)

#11화

블랑세의 침대에 내가 이불을 들추고 옆에 눕기도 전에 이불이 올라갔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나를 잡아끌더니 바디 필로우처럼 꼭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를 밀어냈지만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야. 자는 거 맞아?”

“…으음.”

어쩐지 작위적인 잠꼬대였지만 나는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에게 안겨 있었다. 첫 번째 작전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른 아침. 나는 곧바로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어제 블랑세의 스타일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머리도 풀었다. 그리고 블랑세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블랑세, 잘 잤어?”

“음. 오늘 뭔가 달라 보이네.”

“너 따라 했어. 향유도 네가 쓰던 거로 사용하고.”

그녀가 돌연 코피를 쏟았다. 나는 서둘러 협탁 위의 휴지를 가져다주고, 피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디 아파?”

나는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갑자기 코피가 나다니 정말 어디 아픈 게 아닌가! 하지만 시한부라는 가설에 힘을 싣기엔 블랑세의 혈색은 맑았다.

“아니. 시엘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럼 이제 우리 하나가 된 거야?”

“무, 무슨 소리를!”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더 집착해야 내 뜻을 알아주겠지. 나는 그윽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블랑. 이제 언제, 어디서, 뭘, 어떻게, 왜, 할 거야?”

“블랑이라니. 갑자기 그렇게 부르니 이상하다. 좋긴 한데.”

“그래? 나야말로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내 친구라니 이상한걸. 어디에 있든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어 줘.”

작정하고 느끼한 대사를 했는데 그녀가 오히려 눈을 감았다.

“그래. 너라면 다 가져가도 괜찮아.”

“뭐, 뭘 가져가라는 거야!”

여주인공과 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되기 전에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블랑세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복도까지 부리나케 뛰다가 그만 옷자락을 밟고 휘청였다. 넘어지기 전에 다행히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습니까? 어딜 급하게 가십니까.”

새벽부터 수련을 했는지 갑옷 차림의 에카르트였다. 그는 내가 달려온 방향을 흘긋 보고 멋대로 상황을 추측했다.

“그 여자에게 쫓기고 있던 모양이군요. 역시 응징을 하러-”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지팡이는 왜 들고 있습니까?”

“아, 이건. 블랑세를 진찰하려고 했는데….”

붉은색 눈동자가 심장이 따끔할 만큼 얼어붙었다. 나는 마력 집착남이 더 큰 오해를 하기 전에 해명을 마쳤다.

“그럴 필요 없는 것 같아서 관뒀어요.”

“그랬군요. 잘하셨습니다.”

싸늘하던 얼굴에 싱긋 미소가 번지고 봄 날씨 같은 표정이 되었다.

***

나는 그날 밤 깊은 고민에 빠졌다. 블랑세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건 알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나와 같은 기분을 느낄까?

‘결심했어. 집착 가득한 편지를 쓰는 거야.’

종이 뭉치를 가져와 협탁 위에 펼치고, 펜에 잉크를 찍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어났는데 수십 장의 편지가 쌓여 있다면 블랑세도 놀라겠지.

두 시간 후. 블랑세에게 줄 러브레터가 협탁 위에 몇 장씩 쌓여 갔다.

“어머, 공녀님. 아직 안 주무시네요. 공부하시는 건가요?”

니나가 눈이 나빠질지 모른다며 협탁 근처에 촛대를 더 가져다 놓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아, 아뇨.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편지였군요! 편지에 뿌리는 향수를 드릴까요?”

“네. 고마워요.”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지만 자세히 묻는 대신 향수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편지 문구를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 짜내다가 니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리고 유행에 민감하다 보니 나보다 이런 분야를 잘 알 거라고 믿었다.

“니나. 요즘엔 무슨 사랑 글귀가 유행하나요?”

“사랑 글귀요? 서, 설마 고, 공작님께 쓰시는 건가요?”

“아뇨. 블랑세요.”

“블랑세 양요?”

니나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네. 이왕이면 자극적이고 끈적이는 문구가 좋겠어요. 읽고 오싹할 만큼 강렬한 집착이 드러나면 좋고요. 심장을 쿵 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 그 정도로….”

눈동자의 흔들림은 더욱 커졌지만 그녀는 곧 몇 가지 사랑 노래를 알려 주었다. 나는 편지 뭉치들을 곱게 접어 블랑세의 방으로 들고 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잠이 들은 그녀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

다음 날 아침. 피곤하긴 해도 기분은 상쾌했다. 드디어 나도 제대로 된 반격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공녀님, 오늘따라 더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내 머리를 손질하던 니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블랑세에게 편지를 썼더니 후련하고 행복해요.”

“그, 그렇군요! 잘 되면 좋겠어요. 마음속으로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저도 제 간절한 마음이 꼭 통하면 좋겠어요.”

니나는 왠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평소보다 머리카락을 더 열심히 땋아 주었다. 화장대를 탈출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블랑세의 반응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뭔가 발밑에 차였다.

“…….”

알록달록한 종이가 무릎 정도 높이까지 쌓였다.

다급히 한 장을 펼쳐 열어 보니 블랑세의 글씨로 쓴 편지였다. 요즘 음유시인 사이에서 유행하는 답가가 적혀 있었다.

“…반응이 어떠신가요?”

니나가 옆에서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어봤다.

“원하던 반응은 아니에요.”

“이, 이렇게 정성 들여 거절하다니! 공녀님,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다른 더 좋은 여자 만나실 거예요.”

더한 집착을 받았다는 충격으로 인해 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머지 편지도 한 장 한 장 펼쳐 읽어 보았다. 니나가 알려 준 글귀들과 단 한 가지도 겹치지 않는 정성스러운 연가였다.

- 당신의 인사는 어떤 시간이든 아침으로 만들죠. 더 이상 끝없는 밤을 헤매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해 주면 모든 어둠이 끝날 거예요.

‘…이건.’

나는 그 편지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어딘가 낯익은 문구였다. 원작에서 에카르트가 지나가다 들은 사랑 노래였던 것 같은데.

‘벌써부터 유행했나?’

마지막 편지까지 읽은 나는 니나에게 편지를 전부 보관해 달라고 했다. 그래도 정성이 있는데 버릴 수 없으니까. 니나는 어쩐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에카르트, 블랑세는 연회장에 모여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편지를 쓰느라 늦게 잠든 데다가, 일어나선 너무 많은 정신력을 소모했더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비비자 에카르트가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시엘리나.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까?”

“아아, 네. 조금은요.”

“무엇 때문에요?”

그는 원인을 찾아내 없앨 기세였다. 차마 블랑세에게 편지를 쓰느라 피곤했다고 말 못 하지.

“시엘과 저의 비밀이에요. 그치?”

타이밍을 맞춘 듯이 블랑세가 능청스럽게 대신 답했다. 나는 그녀를 흘겨본 후 “그렇다고 치자.”라고 중얼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에카르트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졸리면 언제든 제 어깨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편히 머리를 기대십시오.”

그러자 블랑세는 포크를 내려놓고서 혀를 찼다.

“틈나는 대로 집적거리지 말아요.”

“나야 틈나는 대로지만 자네는 항상 그러지.”

집적거린다는 말을 부인하는 대신 에카르트가 태연스럽게 비웃었다.

“이건 어떤가, 블랑세? 승부해서 이기는 사람이 공녀의 머리를 쟁취하는 거야.”

나는 잠이 깨다 못해 간담이 서늘해졌다.

“머리를 쟁취한다니요?”

“어깨에 머리 기대는 거 말입니다.”

“그렇게 이상하게 표현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주 때문에 쉬어야 한다면서요!”

나의 타박을 듣거나 말거나 그는 제멋대로 해석하며 행복해했다.

“제 상태를 걱정해 주는 겁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파도 당신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기요. 공작님. 애초에 저렇게 여리여리한 애를 상대로 검을 들고 싶어요?”

“누가 여리여리하다는 겁니까. 차라리 황소가 더 가냘프겠군요.”

“말 좀 예쁘게 해요.”

블랑세와 싸워 이긴다는 게 어째서 나를 지켜 준다는 건지. 내 눈엔 둘 다 똑같아 보인단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사이 둘은 내 접시에 경쟁하듯 음식을 몰아주기 시작했다. 나는 속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분명 역지사지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나만 더 피곤해졌다.

***

루솔릿 공작성 입구.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마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은색 눈동자는 라멜보다 옅었고 검은색 머리는 색색의 보석으로 장식했다. 바로 루솔릿 공작 부인, 리셀이었다.

“부인, 같이 가자니까!”

루솔릿 공작은 쩔쩔매며 부인을 뒤쫓았다. 리셀은 마차에 타고 나서도 남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정면만 쳐다봤다.

“아, 됐어요. 당신이 여자 드레스를 뭘 안다고 따라온대요?”

“그렇다면 라멜과 같이 가. 모녀끼리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잖아. 오는 길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공작이 불안했는지 여러 구실을 만들었지만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수도 멀리 있는 곳이니까 라멜까지 고생할 필요 없어요.”

“주말 안에는 돌아올 거지?”

“봐서요.”

“아이들 안 본 지도 꽤 되었잖아. 리타의 마법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데.”

“애들이야 알아서 하겠죠. 출발해.”

리셀의 호위 기사는 공작의 눈치를 보다 슬며시 마차 문을 닫았다. 마차가 기사와 마부 한 명만을 데리고 쌩하니 떠났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리셀이 부쩍 신경질적이고 외출이 잦아져서, 혹여 외도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멀리까지 간다면서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마차를 타다니.

‘마부에게 어디 들렀는지 알아내야겠군.’

루솔릿 공작을 만나기 전에 리셀은 술집 주인과 사귀는 사이였다.

공작은 그런 리셀을 간신히 꾀어내 하룻밤을 가졌다.

그 하룻밤으로 라멜이 태어났다. 그러자 리셀은 당당하게 양육비를 요구했고 하여 공작은 두 모녀를 몰래 지원했다.

그러다 체닐이 죽자 모녀를 곧바로 공작성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시엘리나에게 리셀은 새어머니가, 라멜은 이복동생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하게 시작한 관계는 종종 공작을 불안하게 했다.

‘나와 그랬던 것처럼 또 바람을 피울지 어떻게 아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 초조하게 마차를 쫓아갈지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공작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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