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에카르트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흡수되듯 마음 어딘가에 따뜻함이 스며들었다.
그 기분 좋음과 포근함. 이 역시 백마법의 힘일까.
‘아니면 공녀에게 다른 특별한 무언가 있을까.’
아직 자각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다시 펜을 잡고 서류를 넘겼다. 블랑세에게 집착당하고 있을 시엘리나를 생각하니 절로 손이 빨라졌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사 헬라가 돌아왔다.
“공작님, 루솔릿 가문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루솔릿 공작이 보냈나?”
“그렇습니다.”
에카르트는 헬라가 내민 편지칼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 제국의 수호자인 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직접 만나 주신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젊은 공작인 그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목적은 대부분 시답지 않은 혼담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루솔릿 공작가도….’
은근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혼담 요청에 일절 대응하지 않던 그였지만 루솔릿 공작가의 제안이라면 달랐다.
‘결혼이라면 시엘리나에게 평생 치유 마법을 받을 가장 좋은 수단이지.’
전속 백마법사가 싫다면 배우자가 되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에카르트는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마검과 계약하는 순간 저주를 받게 되는데 후대에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물려줘야 하는지도 회의적이었다.
‘일단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 볼까.’
시엘리나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 주기로 했다.
그는 서류를 내팽개치고 곧바로 귀빈실을 찾았다.
***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루솔릿 공작이 저를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네?”
무슨 일이람. 원작에서 두 공작이 만난 이유는 하나였다. 에카르트가 시엘리나를 죽이고 루솔릿 공작가를 몰살할 때.
그런데 지금 공작이 먼저 접근하다니 뜻밖이었다.
“만날 건가요?”
“당신이 원한다면요. 이참에 함께 보시겠습니까?”
나한테는 편지 한 장 쓰지 않은 작자였다. 어차피 당분간 여기 머물러야 한다면…. 변수가 생긴 이유를 알아 두는 게 좋겠지.
“공작님은 언제가 편하신가요?”
“당분간 시간이 비었습니다. 황태자를 협박했더니 휴가를 주셨거든요.”
“황태자 전하를 협박하는 사람은 제국에 당신뿐일 거예요.”
“그리고 그런 저를 치유하는 백마법사는 공녀뿐이고요.”
그가 편지를 다시 품에 넣으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시엘리나. 이참에 느긋하게 공작을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네?”
“이 편지가 당신을 머물게 할 좋은 구실이 될 것 같은데요.”
그가 내게 한발 다가왔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에 오뚝한 콧날과 매혹적인 입술이 가까워졌다. 흑막답게 오싹한 목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까 연무장에서처럼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기에 나는 시선을 황급히 돌리며 말했다.
“저, 저는 이만 자야겠어요.”
그가 소리 없이 웃더니 내 손을 꼭 쥐고 다시 입을 맞췄다.
“좋은 꿈꾸십시오. 아침에 뵙지요.”
그리고 천천히 손을 놓고 물러났다. 문이 달칵 닫히고 혼자 남았는데도 여전히 그에게 잡혀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덥지도 않은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보니 두려운 게 분명했다. 이 상태를 두려움이라고 넘겨짚으니, 전에 에카르트가 사람을 죽인 모습이 불현듯 생각났다.
***
전장에 있을 때 나는 가끔 잠에 들지 못했다.
마수가 요새에 쳐들어오기도 하고 부상자가 있는 환경보다, 에카르트와 함께 있는 게 적응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새벽에 잠시 숙소를 나와 걸었다.
그런데 입에 재갈이 물린 기사 세 명이, 에카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읍, 으읍!”
“시끄럽군.”
그는 마검을 들어 올렸고 기사들의 눈동자는 공포로 질렸다. 내가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두 개의 머리가 툭 떨어진 후였다.
피에 젖은 칼날이 붉게 타올랐다.
에카르트가 검을 들고 마지막 남은 기사를 베려고 할 때였다.
“…….”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검을 높게 올렸다가 검집에 도로 넣었다.
“이자는 감옥으로 데려가.”
그리고 검을 내려놓고 다른 부하를 불러 무덤덤하게 명령했다.
그는 제게 튄 피를 닦아 내고, 내가 있는 쪽을 흘긋 봤다. 나는 후다닥 담벼락 뒤로 숨었다.
에카르트가 망설임이 없는 데다 태연하기까지 한 게 너무 충격이었다. 그야 원래 냉철했고 기사도 처형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지만 저렇게 쉽게….
그 기사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랐지만 그때의 기억은 내게 종종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황태자를 협박했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데.
블랑세의 성격도 바뀐 데다가 나는 그동안 에카르트의 백마법사로 활동했다.
원작이 어느 정도 비틀린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제국이 멸망할 가능성은 둘째 치고 둘을 떠날 생각은 그대로였다. 나를 향한 도가 지나친 집착이 때론 버겁게 느껴졌다.
‘자유롭게 살아가려면 하루빨리 도망치는 게 답이야.’
일단 에카르트가 줄곧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백마법 단 하나. 이 연결 고리를 끊어 내면 그가 나를 놓아줄까?
***
자는 동안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비비며 눈을 떴더니….
내 침대에 블랑세가 누워 있었다.
‘분명 다른 방으로 안내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조심스레 이불을 들추고 욕실로 갔다. 씻고 나오니 블랑세가 어느새 테이블에 앞에 앉아서 로즈마리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어제 하녀에게 모닝티로 부탁한 거였는데 어느새!
“시엘, 잘 잤어?”
“아니.”
“왜? 내가 옆에서 지켜봤잖아!”
“그래서 그랬다는 생각은 안 드는구나.”
블랑세가 내 말은 못 들은 척 태연하게 차를 마시다가 물어보았다.
“시엘. 그런데 원래 이런 차를 좋아했어?”
“응.”
“…언제부터?”
“글쎄….”
빙의하기 전 시엘리나와 몇 가지 취향이 달랐다. 그녀는 상큼한 맛을 좋아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애매모호하게 답하자 블랑세가 수긍했다.
“뭐, 그럴 수 있지. 나도 취향이 바뀌는걸.”
나 역시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직 실내복인 나와 달리 블랑세는 이미 외출할 준비가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블랑세. 어디 가?”
“비밀!”
블랑세가 단호하게 잘라서 말했다.
이번에도 예측할 수 없는 기행을 저지를까 봐 걱정스러웠다.
원작에서는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휩쓸려 안타까웠는데, 빙의하고 보니 고삐 풀린 망아지보다 제멋대로였다.
“아니, 왜 비밀이야. 대체 뭘 하려고?”
“때가 되면 말할게.”
“그때가 언젠데.”
“글쎄? 시엘이 나와 결혼하면 지금 알려 주고.”
멋대로 나를 따라와 놓고 정작 본인은 이런 식으로 말이나 돌리고!
내게 집착하면서 정작 본인은 비밀이 많은 게 불공평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테이블에 못마땅하게 손을 올렸다.
“블랑세. 너는 나를 감시하면서 정작 너에 대한 건 숨기고. 이게 대체 무슨 사이야?”
그러자 블랑세는 찻잔을 내려놓고 멈칫했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가 빛을 잃고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가 스윽 일어났고 나도 테이블에서 손을 뗐다.
뭐 잘못 말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정색한담.
“시엘. 너도 내게 숨기는 거 있지 않아?”
“…없는데.”
“네가 우리 사이를 운운하다니 의외야.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생각해 봤다면 그렇게 동방으로 도망치지 않았겠지.”
그녀답지 않게 낯설게 내리깐 목소리가 섬찟했다. 나는 일단 당시의 상황을 부정했다.
“도망치다니. 내가?”
“그래. 동방의 의사를 만나기 위해 가려던 게 아니었잖아?”
“…….”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본다면 내 목적을 인정하는 게 된다.
물론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처음엔 죽어야 했던 운명에서. 그리고 이젠 둘의 집착을 받게 된 운명에서. 그런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침묵을 지켰더니 블랑세가 쏘아붙였다.
“그러니 내가 숨긴다고 뭐라고 할 자격 없어.”
“뭐?”
순간 황당하고 답답한 마음에 똑같이 뾰족한 말이 나왔다.
“내가 이런 질문할 자격이 없다면… 블랑세. 너도 내게 집착할 자격 없잖아!”
그러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다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엘리나. 나도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 너는 아무것도 몰라!”
블랑세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무슨 사정인지 당연히 모른다.
어디로 도망치고 싶은지. 왜 도망치고 싶은지.
그리고 내게 집착하는 이유가 정말 내가 좋다는 이유가 다인지.
“그럼 말해 줘. 네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내가 모르는 게 있다면 알려 주면 되잖아.”
“나는-.”
잠시 망설이던 블랑세가 뭔가를 말하려던 그때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 이럴 때 에카르트가 등장하다니. 이 성의 주인께서는 산산이 부서진 나뭇조각을 밟고 들어왔다.
“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기사를 세워 뒀건만.”
“저는 창문으로 들어왔거든요.”
나는 에카르트를 돌려보내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블랑세는 말할 생각이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다시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브이 자를 그리고, 파란 눈이 다시 장난스럽게 반짝거렸다.
“블랑세. 아까 하려던 말-”
“말하려고 했는데 잊어버렸어.”
내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무마했다. 한편 그사이 에카르트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기사단을 다시 훈련시켜야겠군.”
“아침, 아침을 먹으러 가요!”
나는 애꿎은 기사들이 연무장을 백 바퀴 돌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블랑세와 에카르트는 평소처럼 티격태격했다. 아까 블랑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
‘블랑세도 나를 모르면서. 왜 내가 아무것도 몰라준다고 그러는 거야?’
게다가 난 빙의자인데.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은 동시에 짜증이 났다. 만약 그녀가 먼저 털어놓지 않는다면 먼저 내 입장을 알려야겠다.
“블랑세. 내가 왜 도망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면 먼저 이해시켜 줄게. 각오해.”
“각오?”
“미리 경고했어.”
내가 집착하면 그녀의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지 역지사지를 알겠지. 그리고, 내게 하려던 말도 다시 털어놓을지 모른다.
***
나는 그날 밤 조용히 블랑세의 방을 찾았다.
그녀는 자고 있었다. 달빛이 은발을 비춘 모습이 신성한 천사 같았다. 나는 침대에 살포시 앉고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전을 실행했다.
‘아침에 같이 누워 있는 걸 보면 깜짝 놀랄 거야.’
그런데 내가 이불을 들추고 옆에 눕기도 전에 이불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