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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9화 (9/115)

#9화

당신이 저 사람들의 주군이라는 당연한 말은 통하지 않겠지. 여태 부하의 도움 없이 홀로 전장을 제패한 그에게 설득이 무슨 의미 있을까.

“공작님을 위해서요. 더 넓게 바라보면 세상이 더 넓어질 거예요.”

“저를 위해서라.”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에카르트가 태어난 후 가장 많이 본 건 마수가 가득한 북부였다. 피가 튀기고 사체가 쌓일 때까지 계속 적을 베어 내던 참혹한 곳이었다.

‘그랬기에 그에게 평화를 갖다 준 백마법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 테지.’

하지만 나는 그가 집착 외에도 다양한 감정을 알길 바랐다.

고마움, 소중함, 애정, 애틋함. 여러 기억이 집착이란 감정 아래에 전부 묻히고 좌절만 남았을 때 마검의 목소리에 휘말렸으니 말이다.

“공작님의 세상이 여러 기쁨으로 가득하길 바라요.”

한동안 바람 소리만 들렸다. 에카르트는 내 말에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제넘은 말이었나요?”

붉은 눈동자가 한없이 차가운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나를 볼 때면 무엇이든 녹일 정도로 일렁일 때가 많았다.

내가 슬쩍 시선을 돌리자 에카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시엘리나. 그보다 나뭇잎이 묻었는데. 떼어 드려도 될까요?”

“벌레인데 나뭇잎이라고 하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저렇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 누가 흑막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그의 웃음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카르트는 내 붉은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리고 초록색 나뭇잎을 떼어 냈다. 커다랗고 힘줄이 돋은 손이 슬그머니 귓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잠시 묘한 기류가 흘렀고 그가 나뭇잎을 내게 보여 주며 농담했다.

“책갈피로 쓸까요?”

“그걸 왜. 어서 버려요.”

“네.”

진담이었는지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나뭇잎을 풀밭에 내려놓았다. 무슨 기술인진 모르겠지만 나뭇잎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잘 꽂혀 있었다.

어느덧 휴식 시간이 끝났다. 다시 집결한 기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가기 싫군요.”

“그래도 가셔야죠. 공작님이 수장인데.”

“은퇴할까 봐요.”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는 1분이라도 더 미루다가 마지못해 떠났다. 잔물결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내 가슴에 슬쩍 손을 올려보니 아까부터 빠르게 뛰고 있었다.

‘더워서 그런가.’

나는 다시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동안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은색의 머리카락이 느티나무 잎처럼 내려왔다.

“블랑세?”

“시엘, 여기 있었구나! 나를 두고 가다니.”

“응? 공작님이 네가 혼자 있고 싶었다고 하기에.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어.”

“…나 그런 말 안 했는데?”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저 치졸한 남자가 결국 블랑세만 따돌리기 위해 내게 대충 둘러댄 모양이었다. 블랑세는 어느새 내 옆에 풀썩 앉으려고 했다.

“앗, 잠깐만. 손수건.”

품을 뒤적거리다가 아까 에카르트에게 손수건을 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돌려주지 않고 그냥 가져갔고. 훈련 중인데 달라고 할 수도 없기에, 나는 블랑세에게 내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다.

“여기 앉아. 손수건 깔려 있어.”

“누구 꺼?”

“공작님이 주셨어.”

“뭐? 그럼 나도 내 꺼 줄게.”

극구 사양했는데 결국 나만 손수건 두 장을 깔고 앉게 되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서 하나씩 까먹던 딸기맛 사탕 세 개를 내밀었다.

“먹을래?”

“응.”

블랑세는 맛있다고 웅얼거렸다. 에카르트가 줬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녀의 안색이 굳었다.

“…뱉을까. 아냐, 시엘이 준 거니까.”

그러고 그녀는 에카르트의 실력을 파악하듯 빤히 바라봤다. 눈으로 좇기 힘든 움직임인데도 집요하게 관찰했다.

“블랑세도 검술에 관심 있었어?”

“전혀.”

햇빛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냥, 저런 사람을 이기려면 얼마나 강해야 할까? 한 군단, 제국군 전부로도 불가능하겠지.”

“아무래도 그러겠지. 잠깐, 그건 왜! 설마 공작님과 싸울 건 아니지?”

“너를 쟁취하려면 싸워야지.”

“블랑세!”

잠시 티격대던 그녀는 문득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시엘. 너는 만약 강한 힘을 가지면 어디에 쓸 거야?”

“얼마나 강한 힘?”

“공작님만큼 강한 힘 말이야. 잘 알려지지 않은 초월적인 능력이라거나.”

“으음.”

나는 성력과 마력 둘 다 넘치게 갖고 있었다.

만약 능력이 부족했다면 루솔릿 공작성을 뛰쳐나올 수도 없었을 테고, 나중에 다른 나라로 도주해 먹고 살기도 어렵겠지. 그랬기에 그저 딱 만족스러운 정도라고 생각했다.

“지금이 좋아. 이 이상의 힘은 내가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네.”

마검의 저주처럼 어떤 힘은 오히려 해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풀밭을 쪼았다. 벌레 한 마리가 잡아먹히는 광경을 보던 블랑세는 무릎을 감싸 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시엘.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건 왜 물어봐?”

“사후 세계라든가, 환생이라든가. 그런 게 있을 것 같아?”

내가 아까 다칠 뻔한 후로 그녀는 어딘가 이상해졌다. 설마 우리 여주에게 시한부 설정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걱정된 나는 블랑세의 손을 꼭 잡고 다그쳤다.

“블랑세. 어디 아픈 데 있어?”

“그럴 리가.”

“근데 왜 그래. 뭐 힘든 거 있으면 꼭 말해 줘.”

“…그래.”

블랑세가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로 답하며 손을 빼냈다.

하루라도 빨리 둘을 떠나려고 했지만 그녀를 신경 쓰는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원작을 비틀었으니 블랑세가 이번엔 오래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대신 말이다.

***

서부 루솔릿 공작령 중심에 있는 공작성. 라멜은 또래 귀족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어서 오세요. 햇빛이 따사로워서, 여러분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고 싶었어요.”

그녀가 생긋 웃자 남녀 귀족은 모두 사르르 녹았다.

라멜의 손가락엔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색 루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 반지를 드러냈다.

귀족들은 처음엔 시엘리나의 행방을 궁금해했지만, 공작이 라멜을 눈에 띄게 챙겨 주자, 일단은 잘 보일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리타와 라멜 모두 슬슬 혼담이 나올 시기가 되었고 말이다.

“라멜 공녀, 정말 사랑스러운 티파티에요. 야외 정원이 어쩜 이렇게 관리가 잘 되었을까요?”

“트레이의 모든 디저트가 맛있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네요!”

“저도 공녀님의 감각을 배우고 싶어요.”

라멜은 귀족들의 찬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화기애애하게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영애 한 명이 슬쩍 에카르트 이야기를 꺼냈다. 젊고 잘생기고 부유한 데다 북방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그는 모든 귀족의 관심사였다.

“크로덴 공작님께서 또 북부를 토벌하고 복귀하셨다죠.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네. 남은 기사와 백마법사도 오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아, 시엘리나 공녀께서도 이번 전쟁에도 참여하셨으려나요?”

“정말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에요. 이전에 공작님의 전담 마법사로 활약하셨다는데. 이러다 두 분이 사귀는 거 아닐까 몰라요!”

3년.

시엘리나가 공작성을 나간 후 3년 내내 라멜은 속이 탔다. 늘 천대받던 그 벌레가 공작성 밖에서 그렇게 활약하고 있다니.

물론 라멜은 티를 내지 않았다.

아니, 꺼릴 만한 주제인데도 오히려 그간 시엘리나를 좋게 언급해 왔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원래의 알을 밀어내고 둥지를 차지한 뻐꾸기 새.

정말 그런 취급을 받지 않도록, 라멜은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 성녀처럼 행동했다.

그랬기에 다른 귀족들도 선뜻 시엘리나의 이야기도 함께 꺼낸 것이다. 하지만 라멜은 더 이상 듣기가 싫었다.

“저도 백마법사로 활약하는 언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라멜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풀 죽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일부러 시엘리나를 그리워하는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언니 이야기를 하니까 언니가 보고 싶어지네요.”

“그럼요!”

“라멜 공녀,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우리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라멜을 칭찬했다.

티파티가 끝난 후. 라멜은 혼자 남아 차를 음미했다. 그때. 이젠 제법 소년티를 벗은 리타가 다가와 아는 체했다.

“누님. 티파티는 즐거우셨습니까?”

“그럭저럭.”

라멜의 심기가 거슬린 이유를 눈치챈 리타는 짐짓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이 있으신가 보군요.”

“응, 그 벌레 말이야. 자기가 뭔데 그렇게 활개 치고 다녀!”

리타는 라멜의 어린 시절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전 공작 부인, 체닐이 죽기 전에 숨겨진 여자에 불과했던 리셀은 공작성 외곽 마을에서 살았다. 양육비를 받아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래서 라멜은 평민들에게 아빠가 없다고 무시당했고, 걸핏하면 새아빠를 들이는 게 어떠냐고 개나 소나 접근했다.

그때 생긴 마음의 구멍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았기에 라멜은 사람들의 애정을 닥치는 대로 쏟아부으려 했다. 아니, 받으려고 하였다. 가득 차길 원하며….

리타는 그 점을 잘 알았다.

“네, 공녀의 직함도 크로덴 공작과의 관계도, 백마법사의 능력까지 전부 다 누님의 것이어야 하는데요.”

능력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리타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변했지만, 제 감정에만 빠져 있던 라멜은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요. 아, 이렇게 하는 건 어떠신가요.”

“좋은 수가 있어?”

“에카르트 크로덴 공작님께 연락하는 겁니다. 둘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누님의 존재를 드러내야 합니다. 아버님이라면 기꺼이 부탁을 들어주시겠죠.”

라멜에겐 에카르트에게 접근할 방법인 동시에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할 기회였다.

혹시나 라멜이 나중에라도 공작가 후계자 자리까지 욕심내지 않도록, 리타가 은근히 라멜을 부추겼다.

***

에카르트는 대련을 마친 후 집무실로 들어왔다.

시엘리나의 얼굴이 불현듯 생각났다. 싱그러운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모습. 세상이 넓어질 거라는 나지막한 속삭임은 요정처럼 신비로웠다.

‘과연 세상이 더 넓어질까.’

북부를 주기적으로 침입하는 마수와 저주의 고통이 그의 세상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금도 마수 출몰에 대한 보고가 쌓여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마수를 살육했다. 아무리 베어도 마수는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은 그나마 다행히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제 선조부터 계속해 온 임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처럼 느껴졌다.

지긋지긋했다.

시엘리나를 만나기 전까진 생각도,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그런 삶이 전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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