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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화 (8/115)

#8화

나는 후계자는 리타가 될 거라고 바로잡는 대신 그냥 조용히 식사나 했다.

“맛있다면 더 드십시오.”

탄식을 식사에 대한 감탄으로 착각했는지, 에카르트가 제 몫의 접시까지 밀어 줬다. 블랑세는 내 입에 직접 포크를 가져다 대는 바람에 입가에 치덕한 소스가 묻었다.

“여기 제 손수건을 쓰십시오.”

“나도 손수건 있어, 시엘.”

둘이 동시에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내가 근처에 있던 냅킨을 쥐고 입가를 문지르자 둘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수건을 품에 넣었다.

하! 역시 둘과 같이 있으면 기운이 빨린다. 이 집의 주인을 퇴치할 수는 없으니 나는 일단 블랑세에게 은근히 물어봤다.

“블랑세.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 거야?”

“음, 오래는 못 있어.”

“어머. 잘됐….”

하마터면 눈에 띄게 기뻐할 뻔했지만 참고 물어봤다.

“어디 가는데? 이제 성전도 나왔는데 어디서 지내려고.”

원작에서는 에카르트의 공작성에 살지만, 그가 지금 블랑세를 오래 받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녀는 선뜻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나를 향한 애정 표현으로 얼버무렸다.

“일단, 우리의 결혼식장과 신혼집을 알아보러 가야지!”

“우리 결혼식장?”

어딘가 빠득 소리가 들려서 에카르트 쪽을 바라보니, 그가 들은 나이프 손잡이에 금이 가 있었다.

“항상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군.”

“어머, 농담 아닌데요.”

블랑세의 말과 동시에 손잡이가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둘을 모른 척하고 그냥 열심히 스테이크를 먹었다.

잠시나마 평화로운 식사가 계속될 거라고 믿었다.

블랑세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와 자주 식사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바로 알아차렸다.

‘후추를 잔뜩 뿌려 먹는 걸 좋아하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내가 좀 더 가까운 위치였기에 후추통을 쥐고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고마-”

그때 내가 실수로 내 앞의 찻잔을 쳤다. 찻잔이 엎어진 바람에 김이 나는 물이 테이블에 쏟아졌다.

“시엘리나! 괜찮습니까?”

에카르트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네, 별거 아니에요!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해요.”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는 내 손을 살펴보며 별 탈 없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 니나가 와서 물을 닦아 주었고, 나는 후추통을 다시 블랑세에게 건넸다. 그런데 블랑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블랑세?”

“조심 좀 하지!”

그녀가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나는 놀라서 후추통을 쥔 그대로 굳었다.

“죽고 싶은가 보군.”

“에카르트!”

내가 눈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블랑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 하마터면 네가 다치는 줄 알았다고.”

“응? 그렇다고 해도 내 실수잖아.”

“하지만….”

마치 내가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그녀가 손을 떨었다. 데일 뻔한 거로 저렇게 패닉에 빠지다니 과한 반응이었다.

“만약 시엘이 나 때문에 다치면 어떻게 해.”

내 안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사람은 블랑세와 에카르트였고, 그동안 제멋대로 굴었으면서. 지금은 저 때문에 다칠 걸 걱정하다니.

이해가 안 되는 건 둘째 치고 이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처음 봤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블랑세가 왜 저러지?’

원작에서 그녀가 죄책감을 갖던 장면을 떠올렸다.

‘신전의 규칙이 엄격해서 그런지,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던가.’

내게 집착하는 것과 별개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성격이 남아 있나? 생각하면서 나는 블랑세가 지나친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길 바랐다.

“블랑세. 너도 내가 다치길 원치 않잖아. 뭐하러 그런 걱정을 해?”

“…그렇지만. 그렇지만.”

겁에 질린 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정해. 나, 정말 무사하니까! 그리고 다쳐도 곧바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고.”

“그렇지만. 만약 크게 다치면 어떡해….”

블랑세가 떨리는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시엘. 다치지 마. 더 이상 다치면 안 돼.”

‘더 이상?’

내가 언제 다친 적이 있는지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얌전히 있었다. 대부분 씩씩해 보이던 그녀는 지금 비에 젖어서 떨고 있는 강아지 같았다. 의아했으나 일단 이렇게라도 안정감을 느낀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했으면 그만 떨어지지 그래.”

에카르트가 가차 없이 말했다. 나는 내 입술에 검지를 올려 조용히 하라는 수신호를 보내고 한동안 블랑세를 토닥였다.

***

식사를 마친 후. 에카르트가 나를 따로 공작 저 연무장에 불러냈다.

“블랑세는요?”

“방에서 쉰다고 하더군요.”

“아까도 계속 안색이 안 좋던데 어디 아픈 걸까요?”

내가 가 봐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하자, 에카르트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단숨에 말했다.

“그 작자, 아니, 그 여자는 아무튼 혼자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흐음. 그럼 저는 왜….”

“제가 검술 연습 중에 다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연습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십시오.”

“저주 때문에 힘들었으면서 괜찮겠어요?”

“네. 일반적인 검으로 연습할 테니 저주는 괜찮습니다. 손님도 계시는데 기사단 놈들이 해이해지면 안 되지요.”

마수 수천 마리를 베어 내는 사람이 연습 중에 웬 부상이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만약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겠지.

“그래요. 그럼 저기서 보고 있을게요.”

내가 나무 그늘을 가리키고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에카르트는 나를 졸졸 따라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잠시만요. 이 위에 앉으십시오.”

그는 풀밭에 손수건을 깔아 주고 내 손에 뭔가 쥐여 줬다. 달달한 사탕들이었다. 이전에 북부에서도 이렇게 가끔 챙겨 주더니 습관이 된 모양이다.

“드십시오.”

나는 에카르트도 하나 먹으라고 사탕을 건넸다.

“에카르트도 하나 드세요.”

“직접 까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장갑 때문에 불편해서 그러시나요?”

“사탕에 당신의 마력이 묻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더 달콤할 것 같습니다.”

알약처럼 먹는 게 아니라고, 이 마력 집착남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순순히 사탕을 까서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공작님께서 뭘 드시는 거지?”

“돌을 씹어 드시나 보군.”

주변에 있던 기사 몇몇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크로덴 공작 휘하의 이클립스 기사단이 연무장으로 모여들었다. 대부분은 최전방 북부에 남아 마수의 침입을 대비했고, 3분의 1 정도가 현재 공작 저의 병력으로 있었다.

‘그조차 실력과 규모가 상당하네.’

에카르트는 상급 기사 열 명 정도와 검술을 대련했다. 그는 다른 기사들이 쓰는 평범한 검을 사용했지만 마검을 든 것처럼 위협적인 기세였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어떤 검도 그와 맞부딪치는 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얼마나 실력이 뛰어나든 그의 앞에선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 다른 정예 기사들과 실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타고났다는 단어 외에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저런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마검의 주인이 될 수 있으랴. 그는 작은 틈조차 내어 주지 않고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일 대 다의 합이 오고 가던 때. 기사 한 명이 에카르트의 검을 받아치다가 뒤로 밀렸다. 그 기사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가 겨우 일어났다.

“윽, 역시 공작님의 상대가 되려면 한참 멀었군요!”

“너희 실력이 부족한 거다. 잠시 쉰 후 다시 연습하지.”

에카르트는 기사단 전원에게 명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검술을 지켜봤더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저 기사. 아까 다친 것 같은데.’

나는 잠시 훈련이 중단된 사이 에카르트와 기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나머지 기사들은 물을 마시러 가거나 그늘을 찾아 쉬었다.

“시엘리나!”

에카르트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반기자 옆에 있던 기사는 주군이 아니라 마치 유령을 보는 얼굴이 되었다.

“에카르트. 다친 걸 살펴볼까 하는데요.”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지팡이를 사용하기 위해 반지를 빼냈다.

성전을 졸업한 후에 편의성을 위해 지팡이를 팔찌나 반지, 목걸이 등의 형태로 변환해 사용했다. 내가 반지를 지팡이로 바꿔 잡자 그는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지팡이 끝이 기사를 향했을 때, 그는 핏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내 지팡이를 세차게 잡았다.

“뭐 하는 겁니까?”

북부 눈보라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문제의 원인이 뭔지 알 수 없는 나는 그가 한 말을 되짚어 줬다.

“다치면 치료해 달라고 했잖아요.”

“저를 치료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다른 놈을 치료하라는 말이 아니라요.”

사지도 멀쩡하면서 백마법을 사용해 줄 거라고 기대하다니? 물론 그의 뻔뻔함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이전에도 내게 치료를 요구하던 부하에게 꺼지라고 말했지.’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탈출 시도도 저지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그에게 간섭받고 싶지 않았다.

“일단 기사를 치료하게 해 주세요. 당신 부하예요.”

기사단 앞에서 괜히 에카르트와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곤란했다.

최선의 방법은 여기서 에카르트가 순순히 내 뜻대로 따르는 것. 그는 한숨을 쉬고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십시오.”

“네. 그럼 상처를 좀 볼게요.”

기사는 겁에 질려 온몸이 하얘졌지만, 순순히 팔을 내어 줬다. 내가 마법진을 사용하는 과정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간단히 치료가 끝나자 에카르트가 냉정하게 물어보았다.

“몸은 괜찮아졌는가?”

“네, 넵.”

“누구의 마법인데 당연히 그러겠지. 이제 연무장을 백 바퀴 뛰고 오도록.”

방금 쉬는 시간이라고 했으면서 치졸한 짓을!

저러다 기사들이 먼저 내 치료를 기피하게 생겼다. 뭐라고 나무라기도 전에 에카르트가 해명했다.

“실력이 부족하니 더 연습시키는 겁니다.”

“연습이라고요?”

“그럼요. 병사는 모름지기 자신의 실력을 높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혹독한 수련이 필요하지요.”

“아, 네. 저는 다시 앉아 있을게요.”

내가 그늘로 발걸음을 돌리자 에카르트는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그가 나무에 기대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저대로 계속 서 있을 건가 싶어서 먼저 제안했다.

“…앉으실래요?”

“네.”

품에서 내 손수건을 꺼내 깔아 주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감사합니다. 기다리실 만했습니까? 무료했다면 뭐든 갖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당신 검술이 멋… 신기했거든요.”

“배우고 싶다면 가르쳐 드리죠.”

“저까지 혹독한 수련을 받고 싶진 않은데요.”

“연무장 백 바퀴 뛰는 건 안 시키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에카르트는 집착이 중증일 뿐 내게 상냥했다. 나를 대하는 것의 반의반만큼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좋을 텐데.

“에카르트. 저를 생각하듯이 다른 사람을 생각해 줄 순 없나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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