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상대적으로 정상 같은 에카르트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 내 왼손을 슬쩍 잡더니 입을 맞추고 웃었다.
“빛도 안 드는 지하실보다 성이 좋을 겁니다.”
“…네?”
“제가 휴양지에 성 한 채를 지어 드릴 테니 거기서 천 년쯤 푹 쉬십시오. 한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 놓겠습니다.”
규모가 커졌을 뿐 나를 감금하고 싶다는 뜻은 그나 그녀나 똑같아 보였다.
역시 여주와 서브 남주는 피폐물 소설 속의 주인공들답게 글로 표현된 것보다 더 미쳤다. 그것이 그들과 엮이고 내린 결론이었다.
‘에카르트를 치료해 준 다음에 블랑세도 떼어 놓고 다시 도망쳐야겠어. 반드시!’
“일단… 공작님 댁으로 가죠. 블랑세도 마차가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데려가야 해요.”
“좋습니다.”
“에휴.”
터덜터덜 에카르트와 블랑세 이렇게 셋이 함께 마차로 돌아왔다. 둘은 내 자리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시엘리나. 어디 아픕니까?”
“아뇨,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그러자 에카르트가 원망스럽게 블랑세를 바라보았다.
“가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니. 그런 기행을 보고 심장에 무리가 가셨으면 어떻게 책임질 건가.”
“시엘이 제 미모를 보는 데에 마음의 준비는 필요 없어요. 편지 한 장 때문에 전장에서 돌아온 공작님이야말로 광기 수준이죠. 그런 남자는 최악이에요.”
또다시 싸울 듯이 둘 사이에 불꽃이 튀자 나는 제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둘 다 조용히 좀.”
“알겠습니다.”
“응!”
잠시나마 눈을 붙이려고 할 때, 둘은 어느새 내 양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덕에 가뜩이나 좁았던 마차 좌석이 꽉 끼었다.
“주무실 거라면 제 어깨를 빌려 드리겠습니다. 어서 기대세요.”
“아니, 내 무릎에 눕는 게 더 편할 거야.”
그러더니 나를 사이에 두고 또 으르렁거렸다.
마차는 다시 수도로 되돌아가 크로덴 공작 저로 향했다.
***
둘이 티격태격하던 상황에서도 놀랍게도 잠들었다. 눈을 뜨니 나는 탄탄한 어딘가에 기대 있었다. 에카르트의 어깨였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슬며시 고개를 들고 정자세를 유지했다.
“30분씩 번갈아 가면서 기대게 했습니다.”
“그렇군요.”
알고 싶진 않았지만 에카르트는 블랑세와 그렇게 합의한 모양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블랑세가 듣지 못하게 귓속말했다.
“제가 15분 정도 더 오래 빌려 드렸습니다.”
“시엘, 일어났으면 이제 나한테 기대!”
“…….”
“시엘리나. 혹시 요정입니까?”
“네-에?”
현실감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손으로 입을 ‘헙’ 하고 막았고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요정들은 꿈꿀 때 마력이 새어 나온다고 하던데요. 이렇게 제 품에 기대어 있으니 백마법을 치료할 때처럼 마음이 편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 흑막 서브 남주야! 요정이니 꿈이니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빙의자인 나도 처음 들어 봤다. 애초에 그의 성격과 백만 광년쯤 떨어진 단어였다.
“그리고 접촉면이 더 많아져서 그런지…. 손을 잡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습니다.”
“아, 네. 그럼 아예 같이 누우면 최상의 효과가 나오겠어요.”
“정말 그래도 됩니까?”
비꼰 건데 이 마력 집착남은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공작님. 누가 봐도 그런 수상한 치료 행위를 요구하는 환자는, 성전에서 블랙리스트로 지정해 백마법사와 접근 금지령을 내린답니다.”
블랑세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경험을 통해 합리적인 가설을 세웠을 뿐이네만.”
“실험할 가치는 새 발의 피만큼도 없는 가설이네요.”
“둘 다 조용히 좀.”
다행히 마차는 곧 으리으리한 크로덴 공작 저 앞에서 멈췄다. 이전에 그의 치료를 위해 온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적응 안 되는 규모였다.
수많은 고용인이 마차를 발견하고 나와서 바로 예를 차렸다. 에카르트는 내가 마차에서 편하게 내리도록 손을 잡아 줬다.
“공작님,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시엘리나 공녀, 블랑세 양.”
젊은 집사 헬라가 고용인 대표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헬라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눴다.
“잠시 쉬고 계시면 만찬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에카르트가 내게 말했고 나는 슬쩍 기대되었다. 잡혀 오긴 했지만 공작성의 요리는 꽤 맛있었다.
“두 분을 각각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헬라가 하녀 둘에게 안내를 명령하자마자 블랑세는 항의했다.
“시엘과 같은 방으로 가고 싶은데요.”
“아니. 나는 혼자 있고 싶어. 이미 성전에서 충분히 같은 방을 썼어.”
더 같이 있다간 기운이 빨릴 것 같아 나는 칭얼거리는 블랑세를 무시하고, 하녀를 따라 귀빈실로 걸어갔다.
“목욕부터 하시겠어요? 욕실에 물을 받아 두었답니다.”
“네, 좋아요.”
나는 하녀와 함께 욕실로 들어오며 문을 잘 잠갔다.
안 그러면 블랑세가 들어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익히 룸메이트로 지내 오면서 그녀의 전적을 알기에 이참에 창문까지 꼭 닫았다.
‘드디어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겠구나.’
처음에는 아무리 귀족이라도 같이 욕실에 들어오기가 어색했지만, 공작성의 하녀들은 너무나도 시중을 잘 들어주었다. 그래서 편히 몸을 맡기게 되었다.
기분이 좋게 욕조에 몸을 담그려고 할 때, 향유가 종류별로 놓인 선반이 보였다. 그중엔 품절이 되는 바람에 내가 구하지 못한 종류도 있었다.
“저건….”
“공작님께서 공녀님이 좋아하시는 건 늘 준비해 놓으라고 하셨어요!”
문득 에카르트의 섬뜩한 말이 생각났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 놓겠습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묘하게 상황이 겹쳐지니 소름이 돋고 몸이 떨렸다.
“어머, 추우신가요? 어서 욕조로 들어가세요.”
“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어휴, 공녀님. 별말씀을요! 주인님을 모시는 일에 비하면 아주 간단한 걸요.”
하녀는 슬쩍 에카르트는 얼굴값과 월급값을 한다고 덧붙였다. 평소 에카르트가 고용인들을 얼마나 얼음처럼 대했을지 눈에 훤했다.
“헉. 이런 말하면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하녀가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고 걱정했다.
“괜찮아요. 공작님께 말 안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저, 이름은 니나에요. 편히 말을 놓으세요!”
“그래도 저는 손님일 뿐인걸요.”
“공녀님…. 너무 상냥하시네요.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있죠! 제가 진짜 열심히 모실게요.”
감격해서 눈이 반짝반짝해진 그녀였다. 실라와 나이 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실라. 동방으로 갔으려나? 적어도 공작성에 남아 있진 않겠지.’
백마법사로 일하는 동안 돈을 보낸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
한편 에카르트는 빠르게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귀빈실로 향했다. 하지만 블랑세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녀에게 방을 안내하라고 명했건만. 도로 나왔는지 바깥에서의 옷차림 그대로 말이다.
“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 성의 주인은 나다.”
둘은 으르렁거리다가 짤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시엘리나 님이 동방으로 떠나려고 했다니 여전히 믿기 어렵군.”
“네, 제 눈물 연기도 통하지 않았죠.”
두 사람이 만난 이래 처음으로 마음이 통했지만, 그 이상으로 감정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다.
“넌 언제 떠날 거지?”
“글쎄요. 아마 다음 주쯤요.”
에카르트는 그녀의 사정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일찍 떠날수록 좋았다.
“마차가 필요하면 집사에게 말해. 지금 당장도 준비해 줄 수 있다.”
“너무 기뻐하시네요. 시엘에게 음흉한 짓 할 생각 말아요. 저는 아직 당신을 완벽히 믿지는 않으니까.”
사람을 뭐로 보는가. 에카르트는 파렴치한 취급을 받아서 불쾌했다.
“어쨌든 시엘에게 고마워하세요.”
“당연한 말을.”
“그 애가 아니었으면 당신이 더 원망스러웠을 거예요.”
블랑세는 복잡한 마음이 담긴 눈빛으로,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한숨을 쉬고 귀빈실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에카르트는 자신보다 시엘리나를 잘 아는 듯 말하는 태도가 거슬렸다.
곱씹을 가치도 없는 대화였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내가 공녀의 백마법에 집착하기 때문에 싫어하던 게 아닌가?’
의아해도 다시 물어볼 정도의 관심은 없었다. 블랑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오직 그가 시엘리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
에카르트가 깔끔하게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 목욕을 마쳤는지 좋은 향기가 났다.
‘키가 훤칠해서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네.’
그는 필요에 따라 마검을 소환할 수 있었기에, 이런 평상시에는 마검을 밖으로 착용한 것처럼 드러나 보이게 하지 않았다.
“시엘리나.”
나는 에카르트가 마련해 준 실내복을 살짝 펼치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저한테 딱 맞아요.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고른 옷입니다. 여벌이 서른 벌 정도 있으니 계시는 동안 편하게 입으세요.”
“…블랑세 꺼는요?”
“모릅니다. 하녀가 알아서 했겠죠. 우리끼리 먼저 연회장으로 갈까요?”
블랑세를 따돌리자는 말인가.
거절하려던 그때 깔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블랑세가 등장했다. 옷이 고급스럽긴 했지만 내가 입은 것처럼 마법 작물로 만든 건 아니었다.
“시엘, 기다렸어? 어서 가자!”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에카르트는 내 손을 에스코트하듯 잡고 블랑세는 내 팔짱을 껴서, 둘이 나를 연행하는 자세가 되었다.
연회장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음식이 가득했다.
“시엘, 나 먹여 줘. 내 부인 같고 좋겠다.”
“턱없는 소리를 하는군. 시엘리나 공녀라면 최소한 공작 부인은 되어야지.”
둘의 눈에 또 불꽃이 튀었다. 내가 못마땅하게 둘을 쳐다보자 먼저 사과를 한 건 에카르트였다.
“경솔하게 말해서 죄송합니다. 멋대로 부인이라는 칭호를 언급하다니 생각이 짧았군요.”
“알긴 아는군요.”
이런 거로 기특해하면 안 되는데 둘 중 하나라도 당연한 상식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에카르트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이 말했다.
“네. 시엘리나 님은 공작가의 후계자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루솔릿 공작 부군이 되어야 하는 거겠지요.”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