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참으로 신사다운 협박에 나는 그를 따라서 불쑥 일어나 외쳤다.
“자, 잠시만요! 저, 앞으로 열심히 해 볼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싱긋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손을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그렇게 협박에 못 이겨 한동안 에카르트와 전장을 함께하게 되었다.
제국 북부는 뒤로 안개에 휩싸인 산맥이 있었고 요새를 제외하면 황무지와 다를 게 없는 땅이었다. 그의 임무는 마수 떼가 민간인의 영토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 내는 것.
에카르트가 집채만 한 마수들과 대적하는 동안, 나는 멀리서 대기하다가 그를 치료했다. 어느 날 그렇게 물어봤더니.
“무섭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해 오던 일이라 괜찮습니다.”
이렇게 에카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아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이 짠해지다가도, 이내 마음만 먹으면 제국을 멸망시키는 흑막이라 경계심은 풀지 못했다.
“…그, 마검의 힘은 꼭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쓰세요.”
“제가 다른 용도로 쓰는 걸 보여 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네, 잘하셨어요. 앞으로도 그러시길 바라요.”
“잘했으면 뭔가 보상이 있는 겁니까?”
당연한 일을 하는 데에 무슨 보상이 필요한가!
“글쎄요….”
“흐음, 제가 생각해 볼까요?”
그는 뭔가 흡족한 보상을 떠올린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니에요. 크로덴 공작님께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알아서 잘하실 텐데, 그렇죠?”
“…….”
그러자 그는 못마땅한 듯이 나를 내려다봤다. 잘생기긴 했어도 무서운 인상이었기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무리한 보상을 얘기할까 봐 더 이상 그를 교육하진 않았다.
사실 전장은 에카르트보다 내 처지를 더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그래도 공녀라는 위치 덕분에 별다른 텃세를 겪진 않았지만, 병사끼리 사소한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오고 갔다.
***
“수습 백마법사가 크로덴 공작님을 치료한다니.”
“혹시 알아? 공녀가 다른 흑심을 품고 공작님께 접근하는 걸지.”
“하하! 저런 곱상한 귀족이 북부에서 얼마나 버틸지 내기하자고. 내일이라도 당장 울며불며 짐을 싸서 도망칠지도 모르지.”
가뜩이나 에카르트 때문에 반강제로 전장에 오게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뒷말이 오고 가니 상당히 불쾌했다. 그래서 나는 참다못해 내 얘기를 하던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제 얘기하셨나요?”
“…네?”
병사는 내가 직접적으로 묻자 당황한 듯했다. 내가 저런 말을 듣고 눈치 볼 줄 알고? 나는 미친 척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재밌는 농담이었어요!”
나는 해맑게 웃으며 평상복 차림 병사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영문도 모르고 등짝을 맞은 병사는 경악했다.
“악! 고, 공녀님.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병사의 물음은 무시하고 계속 웃으며 그의 등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전 세계에서도 힘순이라고 불리던 나였으니 눈물이 핑하고 돌 만큼 아프겠지. 그래도 이런 놈들은 맞아도 싸다.
“아하하!”
“그, 그만!”
병사는 웃으면서 때리는 나를 보고 광기를 느낀 듯했다. 나머지 병사 한 명도 차마 말릴 생각을 못 했다. 나는 한참 후 정색하고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며 변명했다.
“어머, 제가 웃을 때 상대방 등을 때리는 게 습관이거든요. 하도 어이없는 이야기라서 한참 웃었지 뭐예요!”
“하, 하하하…. 그러셨군요.”
“너무 자신 있게 말하기에 본인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역시… 농담이었던 거죠?”
나는 스윽 목소리를 깔고 물어봤다. 병사가 슬그머니 제 등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럼요.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쵸, 생각하니까 또 웃기네요.”
내가 또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자 병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 전장의 지휘자는 에카르트. 만약 내가 기사를 구타했다는 이야기가 돌게 된다면 일단 변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내 뒷말을 했던 병사들이 돌연 증발했다. 에카르트에게 그들의 행방을 물었더니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마수가 물어갔나 봅니다.”
“마수가요?”
“네. 요새 안은 결계를 쳐서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런가 하면 내 치료를 훼방할 때도 있었다.
잠시 쉬는 동안 다친 남자 병사를 부축하며 다른 여자 병사가 다가왔다.
“백마법사님.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에카르트를 위해 오긴 했어도 다른 사람까지 치료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 마력은 충분하니 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에카르트가 등장했다.
“꺼져.”
“히익!”
가엾은 병사 둘은 새파랗게 질려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른 백마법사를 찾으러 도망치듯 떠났다.
나는 에카르트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하인데 왜 내쫓아요? 겸사겸사 부하도 도우면 좋잖아요.”
“겸사겸사?”
그가 오싹한 목소리로 묻더니, 우아하게 치료용 침대에 걸터앉았다.
전장을 한차례 휩쓸고 와서 여기저기 피가 튀기고 차림이 흐트러졌는데도 여전히 귀공자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공녀. 겸사겸사라는 단어의 뜻을 다르게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네?”
“제가 생각하는 겸사겸사는 이럴 때 씁니다. 겸사겸사 제 상태를 살피기. 저주를 치유하면서 겸사겸사 생채기를 치료하기 등이요.”
“아니, 뭐 저런 욕심쟁이가….”
“뭐라고 하셨습니까?”
작게 내뱉은 혼잣말이 들렸는지 그가 나지막이 물어보았다.
“멋쟁이라고 했어요.”
“네, 감사합니다. 한데 애초에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건 안 좋습니다. 전혀 좋지 않아요.”
“뭐가 그렇게 안 좋은데요?”
“제 기분이 말입니다.”
“…….”
그가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런가 하니 손등이 얕게 긁혀 있었다.
“저도 다쳤습니다. 어서 치료해 주십시오.”
누가 봐도 아까 병사들이 더 위독했건만 그는 뻔뻔하게 굴었다. 사람은 아무리 자기 상처가 남의 상처보다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라지만 그의 인성엔 큰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전장에서 돌아온 후엔 에카르트와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이제부터 다른 백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으세요. 빚은 갚았잖아요.”
“알아봤는데 제국의 백마법사가 다 일정이 차 있더군요.”
“네? 그럴 리가요!”
“저는 이미 공녀의 마력에 적응이 되었습니다. 이참에 제 전담 마법사가 되는 게 어떻습니까?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리지요.”
그가 능청스럽게 질문 아닌 질문을 하더니 이미 다 정해졌다는 듯이 일축했다.
“이번 주말에도 저를 진료하십시오. 제가 성전으로 오면 되지요?”
“주말요? 약속이 있는데요.”
“누구와 말입니까. 혹시 블랑세라는 작자입니까?”
원작이 피폐물이다 보니 가끔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만날 사람은 인연이 닿기 마련이기에, 나중에라도 집착으로 얼룩진 인연이 되지 않게 자연스럽게 소개하고자 했는데.
이미 에카르트가 블랑세를 알고 있었다니! 내가 당황해서 바로 답하지 못하자 그는 맞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럼 저도 이참에 같이 봅시다. 이전부터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거든요.”
“왜…요?”
접점은 없어도 블랑세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가? 블랑세가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진 않았어도 그녀의 미모는 이미 유명했다.
한번 전장에 나가면 한 군단이 블랑세의 이야기를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에카르트는 마검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예상치 못한 이유를 댔다.
“당신과 하도 가까워 보이기에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일단은 숙소에서 먼저 블랑세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크로덴 공작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그렇다던데.”
사실 에카르트가 멋대로 전담 마법사를 언급하자 나는 누군가에게 그를 떠넘기고 싶은 충동도 조금 생겼다.
원작과 달리 블랑세는 자기중심이 확실해 보이니, 둘이 만나도 이번엔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믿으며.
블랑세는 뭔가 생각에 빠진 눈빛으로 답했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만났을 테니까.”
주말에 결국 삼자대면의 자리를 마련했다. 둘이 악수할 때 블랑세의 손등에 힘줄이 팍 섰다.
그런 주인을 닮았는지 에카르트의 마검도 적을 만났을 때처럼 힘이 일렁였다.
“블랑세에요. 공작님께선 요즘 시엘의 마력을 빨아먹는군요. 어쩐지 시엘이 피곤해 보이더라니.”
“그쪽이 공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려고 하니 피곤하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시엘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는 시엘리나를 시엘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답니다.”
“나는 그런 애칭 만들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이라 별로 타격이 없군.”
둘은 용과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저기… 블랑세. 공작님께 한번 치유 마법을 써 보는 게 어때?”
“내가?”
“응.”
“나 치유 마법 모르는데.”
블랑세가 방긋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성전은 어떻게 들어왔어?”
“그러게.”
“말도 안 되잖아! 엊그제 실습할 때도 치유 마법을 사용했으면서 왜 모르는 척해?”
“어제까지만 해도 알았는데 지금은 잊어버렸어, 하하.”
“허허, 그게 대체 무슨….”
나도 그녀를 따라 어이없게 허허 웃었다. 내가 웃자 에카르트도 그녀의 말 따윈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
어차피 원작도 행복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둘을 이어 주려는 시도는 깔끔하게 접었다. 블랑세와 에카르트는 그렇게 가끔씩 티격태격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뭘 하든 집착하는 블랑세, 나를 놓아주지 않는 에카르트.
그런 둘에게 3년간 시달리다가 마침내 백마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잘 있어, 집착 여주. 안녕, 흑막 서브 남주!’
그렇게 블랑세를 따돌리고 에카르트에게 편지를 보낸 후 무사히 검문소까지 도착했다.
제국에서 벗어나 조용한 왕국에서 백마법사로 살아가려고 했는데…. 둘에게 딱 걸린 것이다.
“몰래 달아나려던 건 정말 아니지요?”
에카르트의 물음에 나는 지난날에 대한 회상을 정리하고 둘러댔다.
“아-아, 예. 물론 아니랍니다!”
“그렇습니까?”
“네! 침이란 도구로 병을 낫게 한다는 동방 의사가 있다기에, 한번 견학을 가 볼까 했어요.”
“마차로 동방까지 가려면 힘드실 겁니다.”
“…네?”
“제가 동방 의사를 끌고 와서 자리를 주선해 드리죠.”
끌고 오다니. 하지만 지금 반박했다간 동방 의사가 아니라 내가 끌려갈 것 같았다.
“일단 마차에 탑시다. 두 명이 타기엔 충분해 보입니다.”
“두 명요?”
“네, 당신과 저 말입니다. 워프 마법진으로 와서 마차를 준비하지 않았거든요. 물론 저 병사들의 말을 뺏는 방법도 있지만요.”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그리고 최소한 일주일은 저를 살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열도 나고 어지럽군요.”
에카르트가 제 앞 머리카락을 슥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잘 정리된 짙은 눈썹 아래, 긴 속눈썹은 청초한 사슴 같았지만, 그것과 달리 눈빛은 맹수를 닮았다.
“일주일…. 어디서요?”
“수도에 공작 저가 있습니다. 전에 저의 치료를 위해 몇 번 오셨지요.”
공작령은 혹독하고 황량한 북부지만 그가 생활하고 휴식을 취하는 공작 저는 수도 내에 있었다.
에카르트는 북부에서 복귀한 후에는 주로 공작 저에 머물렀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꼭 이런 데에서 살고 싶다고 다짐할 정도로, 수도에 있는 건물 중에서도 황궁 다음으로 크고 화려했다.
‘아무래도 내 도주 계획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데.’
초조함을 숨기기 위해 허허 웃자 블랑세가 번뜩였다.
“시엘, 거기 말고 신전 지하실 가자.”
“지하실?”
“응! 침구도 푹신하게 깔고 요리도 맛있게 해 줄게. 지금까지 그랬듯 나 말고 누군가 찾아오지도 않을 거야. 영원히….”
블랑세가 성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 오른손을 잡고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