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블랑세, 죽으면 안 돼!”
“…뭐?”
“살다 보면 좋은 날 올 거야!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남 눈치 보지 말고 마음대로 살아!”
나는 블랑세를 꼭 끌어안고 다급히 외쳤다. 그런데 블랑세는 나를 흘긋 돌아보더니, 침착하게 내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네가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오해?”
“나는 그저 잠시 나가려던 것뿐이야. 벽을 타고 내려가려고 했어.”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긴 줄이 침대 다리에 튼튼하게 묶여 있었다.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 그녀를 끌어안은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 그렇구나….”
“놀래켰다면 미안. 그래도 네 말은 인상 깊었어.”
“그, 그래?”
“응.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는 건지 물어볼 틈도 없이 블랑세는 잽싸게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한 시간쯤 후 다시 창문으로 들어왔다. 초콜릿과 사탕 등등 금지 반입 품목을 잔뜩 들고서 말이다.
“설마 이거 가지러 몰래 나간 거야?”
“당연하지.”
블랑세가 싱긋 웃더니 대답과 함께 내 입에 초콜릿을 쑤셔 넣었다.
“블랑세, 이거 들키면 쫓겨나.”
“그러니까 얼른 먹어. 증거 인멸해야 하니까.”
해맑게 다른 봉투를 뜯으며 블랑세는 말했다. 그 와중에 초콜릿은 맛있어서 나는 계속 웅얼거리며 물어보았다.
“…왜 이러는지 물어봐도 될까?”
“음….”
블랑세가 잠시 대답을 생각하며 웃었다.
“공작가 후계자인 너도 백마법사 한다는데, 내가 세상을 너무 좁게 본 것 같아서! 좀 더 자유롭게 살아 보면서 세상을 구경할까 해.”
“왜 당연히 내가 후계자가 될 거라고 믿어?”
“그야 윈터로드 제국은 성별이나 출신을 불문하고 일반적으로 첫째에게 작위를 계승하잖아.”
“아하.”
가문에서 시엘리나의 처우가 개차반이었기에 잠시 잊고 있던 설정이었다.
여하튼 정말 세상을 구경한다는 이유라기엔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블랑세의 기행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성전 책상에서 잠시 엎드려 잠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블랑세가 차가운 눈빛과 차분한 분위기로 나를 내려다보던 적도 있다.
그러다 평소처럼 싱긋 웃었지만 말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소름이 돋았다.
정신 나간 여주 때문에 정신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한 달째.
그날은 창문 밖으로 뛰쳐나간 블랑세가 한 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간쯤에는 돌아왔는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렇게 늦은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블랑세가 걱정돼서 어쩔 수 없이 방을 나가 보았다.
복도를 지나 걷고 또 걷다가, 야외 정원까지 다다랐다.
‘깜짝이야!’
정원에는 누군가 뻗어 있었다. 모자가 달린 망토를 눌러써서,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졌다.
그리고 다행히도 일단 블랑세라고 하기엔 체격이 너무 컸다.
다만…. 피처럼 보이는 얼룩이 새어 나와 풀을 적시고 있었다.
‘살해 현장?!’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손으로 입으로 막았다. 성전의 결계는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결계가 반응하지 않으니 위험한 사람은 아닐 거야.’
나는 일단 가까이 다가가 정체를 확인하기로 했다. 턱 선은 날렵했고 달빛을 받은 피부는 하얬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고통스러운 듯 살짝 벌어져 있었다.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슬쩍 후드를 들어 올려 보니, 살짝 젖은 검정색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이 드러났다.
‘설마.’
의심이 들어 망토를 슬쩍 들쳐 보자 허리춤의 마검이 드러났다. 그로써 정체가 확실해졌다.
에카르트 크로덴!
잘생긴 하관만 봐도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려야 했는데.
차마 지금의 모습만으로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누군들 그인 줄 알아보겠는가 말이다!
원작에서 에카르트는 전장에서 돌아와 빛의 성전을 급하게 찾는다. 그러다 치료를 받기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운명처럼 블랑세와 만난다.
‘그런데 내가 먼저 발견했잖아!’
그대로 달아나려다가 순간 걱정이 됐다. 원작에서 <에카르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라고 서술했을 뿐, 그의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하여, 지금 이 상황이 원작에서 말한 블랑세와 에카르트의 만남 장면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가를 탓할 시간이 아니었다.
에카르트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숨도 간신히 붙어 있었다. 이렇게 내버려 뒀다간 죽을 것만 같았다.
‘잠깐, 만약 에카르트가 여기서 죽으면…. 멸망을 막을 기회인가?’
미안하지만 원작을 알고 있는 나로선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마법을 배우는 이로서는 역시 피범벅이 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속세와 내 안전을 좇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 있었다.
그가 미래의 흑막이라고 해서 지금 죽게 내버려 둘 수야 없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에게 치유 마법을 걸고 있었다.
마법이 없는 세상은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고 아프면 약도 먹어야 했지만, 이 세계는 달랐다.
대부분의 부상은 백마법사의 마력을 소모하면 곧바로 나을 수 있다.
잠시 후 그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아직 치료할 게 남았지만…. 이쯤에서 가야겠어.’
나는 에카르트가 정신을 차려 내 얼굴을 보기 전에 그대로 도망쳤다.
숙소에 돌아오니 블랑세가 이미 와 있었다.
“블랑세, 왜 이렇게 늦었어?”
“보초병에게 들킬 뻔해서 한참 돌아왔지 뭐야. 시엘은 어디 갔었어?”
“너 찾으러 갔었지!”
너와 엮였어야 하는 서브 남주를 내가 먼저 만난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말은 속으로 삼켰다.
“시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저 아무 일도 없길 바랄 수밖에. 나는 블랑세를 지나쳐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에 잠겼다.
원래 여주가 했었어야 하는 일을 내가 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도 엄습해 왔다.
‘그냥 마법사 단장에게 보고할 걸 그랬나? 안 돼, 그러면 그 시간에 왜 숙소를 나왔는지도 해명해야 하잖아.’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음 날 아침. 백마법사 단장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접견실에서 시엘리나 양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누군지 묻지도 못할 만큼 엄숙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누군가 나를 찾은 적은 없었다. 설마 루솔릿 공작가는 아닐 테고. 황실인가? 수료 전에 성적 좋은 애들은 스카우트한다고도 하던데.
불안한 예감을 무시하고 애써 행복 회로를 돌려 봤지만, 응접실엔 아니나 다를까 에카르트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접견실로 들어오는 나를 보자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싱긋 웃었다.
“그럼 공작님, 저는 가 보겠습니다. 공녀님과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단장은 접견실 깊이 나를 들이밀고 문을 닫았다. 아련하게 문고리를 만지작거리자 에카르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으십시오.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
순간 왜 내게 존댓말을 쓰는지 의아했다. 원작의 시엘리나에게도 반말을 사용했던 터라, 그가 유일하게 말을 높이는 사람이라곤 황제 부부뿐이었으니까.
나는 더더욱 그를 경계하느라 최대한 멀리 떨어진 대각선 방향으로 앉았다.
“에카르트 크로덴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처음 보는 루비색 눈동자는 보석처럼 맑고 예뻤다. 검술로 단련된 몸은 다부져 보였다. 아무리 제국을 집어삼킨 흑막이라고 해도 탈인간 급 외모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젯밤의 일 기억나십니까?”
“어젯밤요?”
“네. 공녀께서 어제 제 몸을 더듬다가 치료 마법을 걸고 도중에 도망치셨죠.”
“더, 더듬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물론 내가 치료를 제대로 끝내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검을 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슬쩍 망토를 들췄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억울하게 다른 혐의까지 뒤집어쓰기 전에 발뺌했다.
“으음, 저 아닐걸요. 확신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그렇게 말씀하실까 봐 영상석도 확인했습니다.”
“…설마요.”
성전 몇 군데에 영상석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공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죠. 백마법사 초상화 목록을 받아서 얼굴을 대조해 봤습니다.”
좌우지간 흑막답게 쓸데없이 준비성이 철저했다.
‘혹시 단장님도 이 사실을 아시는 걸까?’
나는 애써 어깨를 빳빳이 펴고 허세를 부렸지만,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했다.
에카르트가 나를 샅샅이 파헤칠 것처럼 빤히 바라보았다.
“공녀께서 저를 대충 치료하고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게 될까요? 공녀의 위치를 생각해서 그전에 먼저 사정을 들어 보려는 겁니다.”
수습 마법사가 멋대로 외부인을 치료하는 건 금지였고, 게다가 그의 주장에 따라 여러 혐의까지 덮어쓰면 퇴출 위기였다.
적진에서 잡힌 포로가 이런 심정일까.
나는 괜히 있는 기회를 날리기 전에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치료하다가 그만두기는 했지만 맹세코 더듬은 적은 없어요!”
“왜 그만두셨죠?”
“뒤척이니까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러자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을 땐 이미 늦었다.
“사실 영상석은 없습니다.”
“네?”
“어쨌든 자백을 들었으니 마저 이야기하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낚다니! 하지만 그는 내가 화내기도 전에 다시 내 마음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병력인데, 어젯밤 당신에게 의료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료 사고?”
어휘 선택이 교묘한 것이 정말 미래의 흑막 같았다. 나는 혹시 수습 자격을 박탈당할까 봐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네,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으셔서 아직도 힘이 불안정하죠. 하지만 공녀가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흑막 같다는 말은 취소. 지금은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생 라멜도, 여주 블랑세도 원작과 다른데, 흑막 남주가 의외로 상냥할지도.
“당분간 제 전담 마법사가 되어 주시면 없는 일로 해 드리죠.”
전담 마법사. 백마법사는 대개 일반 군대의 치유나 버프를 맡지만, 일부는 지휘관 급 인물을 일대일로 담당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의 전담 마법사가 되다니….
장차 제국을 멸망시킬 사람과 깊이 엮이고 싶지 않으니 슬쩍 둘러댔다.
“으음, 제가 아직 수습이라서 다른 마법사를 구하는 게 더 나으실 거여요.”
“물론 그래도 되긴 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그가 무시무시한 말을 덧붙였다.
“혹시 다른 백마법사가 왜 이렇게 제 상태가 심각한지 물어보거든,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가 저를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제, 제가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카르트가 단칼에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