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그리 생각하니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루넬은 주먹을 꽉 쥐며 두려움을 억눌렀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크리소르 님을 혼자 두고 죽을 수는 없다…….’
루넬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을 보았다. 페르디안 키토 후작은 칼을 막는 것까지가 자신의 역할이었다고 말하듯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너머에서 섬뜩한 핏빛 눈으로 루넬을 주시하는 아딜로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입으로 내 어머니의 명예를 들먹여?”
“……송구, 송구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루넬이 긴장으로 덜덜 떨며 말했다.
아딜로트는 말없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참 뒤, 깊은숨과 함께 말할 뿐이었다.
“……크리소르의 죽음을 바라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고, 나 역시 이 자리에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른 게 아니야. 확답은 못 해 주겠군.”
“폐하……! 부디…….”
“다른 이들과 검토한 뒤 결정하지.”
아딜로트는 그렇게 말하고 더는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듯이 차가운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루넬의 안색이 밝아졌다. 검토의 여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넬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바닥에 대고 몇 번이고 절했다.
“그간 크리소르 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말씀드릴 테니, 부디 크리소르 님의 목숨만은…….”
“루넬!”
크리소르의 비명은 이제 불안한 절규가 되어 있었다.
아까부터 내내 미친 사람 같던 그녀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보다 더 위태로워 보였다.
“네가 지금 나를 배신해……? 네가? 나를 모셔 온 네가!!”
“……크리소르 님.”
루넬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크리소르를 바라보았다.
“저는 크리소르 님이 예전의 크리소르 님으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디 이 마음이 그녀에게 닿길 바라며.
하지만 크리소르는 쉬어 가는 목소리로 재차 외쳤다.
“네가! 나를! 배신해!!”
“저는 크리소르 님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클라우디오 전하의 주박을 끊어 내고 스스로를 위해 살아 가시길 바랄 뿐입니다.”
씁쓸한 표정의 루넬과 달리 크리소르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 아들의 복수가 코앞이거늘! 너까지……! 너까지 나를 배신하면, 나는……!”
“크리소르 님. 클라우디오 황태자 전하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부디 크리소르 님의 삶을 살아 주세요.”
“아니다! 아니야!! 살릴 수 있어!!”
크리소르가 절규했다.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복수의 대상이 황제 폐하가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아아아아악! 듣지 않겠다! 듣지 않아!!”
“그날, 황태자 전하께서 아딜로트 황자 전하를 죽이려고 하는 걸 크리소르 님도 알고 계셨―.”
“아아아아아아악!!”
크리소르는 듣기 싫다는 듯이 손톱으로 얼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금수가 울부짖듯 귀기 넘기는 목소리였다.
말을 삼킨 루넬은 그런 크리소르에게 어르듯 상냥하게 말했다.
“크리소르 님. 이제 우리…… 다시 돌아가요.”
“싫어! 싫다! 누가 저 미친년을 끌어내! 어서!!”
산발한 크리소르는 눈물을 흩뿌리며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아아아아……, 크흑!”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는 단말마 같은 신음과 함께 제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크리소르 님!”
창백하게 질린 루넬이 가장 먼저 그녀를 향해 달려갔고, 그다음은 바루스 그리말디였다.
바루스가 빠르게 크리소르의 상태를 살핀 뒤 말했다.
“돌아가신 건 아닙니다. 하지만 빠른 처치가 필요합니다.”
“그런……!”
루넬은 간절한 눈으로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딜로트는 눈살을 찡그린 채였고, 그런 그에게 옆에 있던 요아힘이 속삭였다.
“폐하. 당장은 살려 두는 것이 좋습니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는 데다, 아마 정신이…….”
아딜로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처치하고 감옥에 가둬 놓도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루넬은 몇 번이고 감읍하다는 듯이 절하다가 크리소르를 따라 이동했다. 기사들이 그녀의 팔다리에 구속구를 채웠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아딜로트는 바루스를 향해 말했다.
“바루스 그리말디. 증언은 고맙지만 그대가 크리소르 밑에서 온갖 실험을 해 온 이라면, 그대 역시 죄를 면치는 못해.”
그의 말에 조용히 서 있던 렌나 그리말디가 눈물을 글썽였다.
바루스 그리말디는 그런 자신의 딸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미아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적어도 사람을 살릴 수는 있었으니까요. 이제야 스스로를 의원이라 말할 수 있게 된 기분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아딜로트에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오르퀘니나의 달에게 무한한 영광 있기를.”
* * *
크라우스 공작도, 크리소르도 사라진 외제니의 홀에는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부 귀족들은 배부른 미소를 지었지만, 대다수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망했다.’
‘믿었던 크라우스 공작가가 무너진 데다, 황제에게 명분까지 줘 버렸다니…….’
늘 멧돼지처럼 드센 카르디날레 공작마저 지금은 아딜로트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접은 채였다.
황제 아딜로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추문이 사라진 상황이니 당연했다.
클라우디오 황태자를 살해했다는 의혹은 바루스라는 의원이 해소해 줄 것이며, 황태후의 측근 시녀인 루넬 피아 역시도 레아 황비의 무결함을 증명해 주리라.
아딜로트는 어느 잡초를 먼저 골라낼지 살피는 정원사처럼 가만히 홀을 살폈다.
귀족들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지?’
그때, 누군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 폐하!”
귀족 중 한 명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아딜로트는 무심하게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왜.”
아무리 황제라도 지나치게 무례하다 할 만한 대답이었으나 누구도 그걸 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귀족은 아딜로트가 답을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동아줄을 잡은 기분이었는지 급하게 외쳤다.
“차,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벌어진 게 아니라 그대들이 만든 거 아닌가?”
“그, 그러니 이 모든 것을 밝혀낸 폐하의 애완동물에게 큰 상을 내리시지요!”
그 순간 의석을 채우고 있던 귀족들의 눈이 한꺼번에 번득였다.
“맞습니다! 그녀의 신분을 복권하고 황후로 올리시는 것이 온당합니다!”
“정말이지 그래야 합니다! 저러한 인재를 죽이지 않고 보살피신 것 역시 폐하의 혜안이십니다!”
“맞습니다! 폐하의 뜻대로 미아 셀레스티얼을 황후로 맞이하소서!”
다급한 외침들이었다.
“……하.”
아딜로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귀족들 역시 이게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의 부끄러운 아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폭군은 당장 자신들의 목을 쳐 버릴 게 뻔했다.
미아는 그런 귀족들의 태도를 여상스러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
그들이 은혜를 구해야 할 대상은 아딜로트지만, 아딜로트는 비비기엔 너무 높은 언덕이다.
그러니 자신을 들먹여 그의 비위를 맞추는 쪽을 택하리란 것쯤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했기에, 미아가 이 순간 택할 행동은 하나였다. 드레스를 우아하게 팔락이며 몸을 돌린 미아는 사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귀족들이 놀랐고, 또 눈을 빛냈다.
‘설마 우리를 살려 달라고……?’
그들의 눈이 반짝였지만, 미아는 귀족들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반역자 셀레스티얼의 딸, 미아 셀레스티얼입니다. 부디 제게 발언을 허락해 주세요.”
무심하고 냉정한 낯으로 미아가 말했다. 깍듯한 태도는 그녀가 지금 아딜로트를 황제로 대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딜로트는 조금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말해. 그리고 앞으로 그런 식으로 발언 요청할 필요 없어.”
미아가 쌕 웃었다.
“그러시다면, 폐하의 은덕에 빌붙어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슐츠 공작이 살짝 반색하며 나섰다.
“미아 님의 복권은 온당합니다. 과거에도 황제의 목숨을 구한 노예가 평민으로 승격한 적이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미아는 슐츠 공작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복권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
놀란 사람들과 달리 아딜로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미 미아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챈 듯했다.
“꼭 그래야겠어?”
“폐하.”
미아가 어르듯 말했다.
“저 역시 이 자리에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른 게 아닙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르디안이었다.
‘내가 싫었을 텐데도 그 이후로는 정말 많이 도와줬지.’
페르디안 뒤로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세레니티가 보였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루넬 씨의 마음을 바꾼 건 아마 렌일 테고.’
그 외에도 자리에 없는 지로티 공작, 냉정하지만 항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요아힘, 용기를 내어 나서 준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 등.
정말 많은 도움으로 미아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미아가 옆을 바라보았다.
‘시즈가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겠지.’
율리시즈는 연한 갈색의 눈을 깜빡이며 미아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