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내가 이런 바보들을 데리고…… 참 질리게도 이어 왔군.”
“바, 바보라니!”
“…….”
크라우스 공작은 길게 한숨 쉰 뒤,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천천히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
스팟!
바닥에 앉아 무심히 상황을 관망하던 율리시즈의 몸이 갑작스럽게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페르디안이 검을 휘두를 새도 없었다.
쾅!
율리시즈는 순식간에 크라우스 공작의 몸 위에 올라타 그의 머리를 찍어눌렀다.
“안 되죠……. 이런 건.”
“컥……!”
크라우스 공작의 머리를 의석 테이블에 처박은 율리시즈가 그의 입에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내가 이걸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그렇게 쉽게 죽을 생각을 해요……?”
율리시즈는 그렇게 말하고서 크라우스 공작의 입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고 투명한 무언가.
‘―독약!’
율리시즈는 제 소매 한쪽을 뜯어 크라우스 공작의 입에 물리고는 저를 묶고 있던 구속구로 크라우스 공작을 묶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독약을 페르디안에게 던졌다.
“자결용 독약이에요……. 조사해 보세요.”
“…….”
페르디안은 말없이 그것을 품에 넣고는 율리시즈를 응시했다.
“크라우스 공작의 몸에서 내려와라.”
“…….”
율리시즈는 페르디안을 한번 일별하고는, 상석에서 무심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아딜로트를 흘끗했다.
그러고는 순순히 크라우스 공작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당신까진…… 할 만한데, 황제는 좀 어렵겠어요…….”
기사들은 더 튼튼한 구속구를 가져와 율리시즈를 옭아맸다. 율리시즈는 지루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남은 건 탁자에 머리가 처박혀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크라우스 공작.
그리고 모든 걸 다 잃은 허망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은 크리소르 황태후뿐이었다.
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수십 년간 오르퀘니나의 귀족 사회를 지탱하던 대 가문인 크라우스 공작가가, 국가 내란죄라니.
심지어 그들을 그렇게나 괴롭혔던 야만족 라지푸트와 내통했다니.
관료들이 내놓은 증거의 진위를 조사해야 하겠지만, 재상 요아힘의 검수를 이미 거쳤을 것이다. 진짜일 게 뻔하거니와, 가짜이더라도 알아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크라우스 공작이 자결하려 들었다는 점에서 이미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더 들어 볼 필요도 없겠군.”
아딜로트가 상황을 종결짓듯 말했다.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
크라우스 공작은 제 발로 걷는 것조차 거부당한 채 기사들의 손에 양팔이 붙잡혔다. 그대로 끌려나가려던 그가 잠시 저항의 몸짓을 했다.
기사들이 발을 멈추자, 크라우스 공작은 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승리다. 미아 셀레스티얼.”
* * *
탕, 하고 홀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크라우스 공작이 퇴장한 것이다.
남겨진 귀족들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머리 위를 스치고 있을 황제의 시선이 무겁고 두려웠다.
‘괜히 크라우스 공작을 지지해서……!’
‘황제 편을 들어서 다행이다!’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반 이상의 귀족들은 몸을 떨었다.
국가 내란죄.
의심만 사도 즉결처형이 가능한 죄목이었다.
멧돼지 같기로 유명한 카르디날레 공작마저도 이마의 땀을 훔치는 척 하며 눈이 마주치지 않게 하고 있었다.
“하……. 아하하…….”
그때, 허망함 섞인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실소는 이윽고 광소가 되었다.
웃음소리의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끌려나가는 크라우스 공작을 바라보던 크리소르였다.
“아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크리소르 황태후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웃었다.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장은 반쯤 미친 듯한 그녀의 모습에 더더욱 싸늘해졌다.
아딜로트와 미아, 주변의 귀족들은 모두 그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시녀인 루넬 피아뿐이었으며, 세레니티 역시도 이런 상황이 버거운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소리 높여 웃던 크리소르는, 이내 뚝 웃음을 그쳤다.
고개 내린 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아딜로트…….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
아딜로트가 무겁고 서늘한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받아쳤다. 크리소르의 얼굴이 웃듯 일그러졌다.
“네가 기어코 나를 죽이는구나! 내 아들을 죽였던 것처럼!”
“네가 내 어머니를 죽였던 것처럼 말이지.”
“내가! 크라우스 공작가 출신의 황후인 내가 외국인 황비 좀 죽였기로서니 뭐가 문제란 말이냐! 황궁이란 그런 곳이야!”
아딜로트가 실소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설령 정말로 내가 클라우디오를 죽였다고 한들, 네 말대로라면 황궁이란 그런 곳 아닌가?”
그 말에 크리소르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역시 네놈이 내 아들을 죽였구나!”
“사람 말을…….”
“모두 들었소!”
크리소르가 아딜로트의 말을 자르고 의석을 바라보며 외쳤다.
“저 사특한 놈이! 내 아들을 죽였다고 고해하지 않았어!”
광기 어린 눈빛과 동작에 귀족들이 흠칫했다.
“돌로 저 아딜로트 놈의 머리를 쳐서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의 기강이 살고, 우리 클라우디오도 한을 풀지 않겠습니까!”
“…….”
“내 아들……. 살아만 있었다면 천하에 다시 없을 성군이 되었을 클라우디오가!”
눈을 희번덕대며 중얼거리다 외치다 기성을 터뜨리다 허정허정 홀을 배회하는 크리소르의 모습은 가히 미친 사람이었다.
‘크라우스 공작가는 몰락할 테고, 그럼 크리소르는 더는 비빌 언덕이 없지.’
미아가 그런 크리소르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러면 더는 죽은 클라우디오의 한을 풀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아마 그게 크리소르의 정신을 크게 압박한 모양이었다.
미아는 보란 듯이 느리게 앞으로 나서서 크리소르의 주의를 끌었다. 여기서 아딜로트가 나서는 건 보기에 좋지 않았다.
“황태후 폐하.”
미아를 발견한 크리소르의 눈이 다시 회까닥 뒤집혔다.
“오호라, 네년이……!”
“당신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
미아가 고개를 돌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곧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젊은 여자였고, 한 명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의원을 상징하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황태후 폐하.”
그중 노인이 크리소르를 발견하고 슬픈 얼굴을 했다. 크리소르는 난데없는 제삼자의 등장에 오만불손하게 눈을 찡그렸다.
“누구지?”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바루스 그리말디라 합니다. 오래전…… 황립 의료원에서 황태후 폐하를 위해 일했습니다.”
“……!”
크리소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약한 놀람이 일었다. 그리말디는 독약 제조에 비상한 재주를 가졌고, 그래서 그의 성은 꽤 유명한 편이었다.
바루스 그리말디는 걱정 가득한 얼굴의 렌나 그리말디의 부축을 사양하고 크리소르 앞으로 나아갔다.
“폐하는…… 변하지 않으셨군요.”
“이 미친 노인네가 감히 제국의 황태후에게 망언을 지껄이는군. 아딜로트 놈이 네게 나를 우습게 여기라 시키더냐?”
크리소르가 미친 사람처럼 굴던 것을 멈추고 소름 끼칠 정도의 싸늘한 낯으로 말했다.
하지만 바루스는 겁먹기는커녕 아련하고 슬프게 말했다.
“폐하. 기억하시는지요……?”
“내가 너 따위를…….”
“클라우디오 황태자 전하의 사인을 밝힌 의원이 바로 저였지 않습니까.”
“……!”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리소르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래. 그랬지! 그럼 네 입으로 고하거라! 그땐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망령된 소리를 지껄였지만, 여기서 제대로 밝히면 너를 용서해 주마!”
“황태후 폐하.”
“아딜로트가 클라우디오를 죽인 게 확실하다고! 우리는 살인자를 황제라 모시고 있다고 모두에게……!”
“클라우디오 황태자 전하는 실족하며 뇌출혈로 사망하신 것이 맞습니다.”
돌연 크리소르의 얼굴이 무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고개가 기름칠하지 않은 인형처럼 삐걱대며 바루스에게 향했다.
“그때 무기를 들고 계신 건 클라우디오 폐하뿐이셨습니다. 몸싸움의 흔적이 있기는 하였으나 상태는 아딜로트 황자 전하께서 더 위중하셨지 않습니까…….”
“…….”
“게다가,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그 일이 있기 전날, 클라우디오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크리소르 황태후의 눈이 커졌고, 미아 역시도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이건…… 원작에 없던 내용인데.’
바루스는 조용히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자신은 황립 의료원에서 독약을 제조 중이었고, 늦은 밤에 클라우디오가 찾아왔다고.
‘독으로 쓸 만한 걸 좀 줘 봐!’
‘어떤 독 말씀이십니까?’
‘내일 사냥을 나갈 거거든. 큰 짐승을 하나 잡을 거야.’
‘크기에 따라 치사량이 달라지니, 어떤 동물인지 말씀해 주시면…….’
‘음……. 사람 크기?’
‘…….’
‘단숨에 죽는 건 재미없으니까……. 오래오래 고통스러운 걸로. 아, 입조심은 하고?’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황태후의 얼굴은 주검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바루스는 지친 듯이 말했다.
“애초에 사냥 제안을 클라우디오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폐하를 죽이려 한 건, 클라우디오 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