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전부 예상했던 대로였다.
크라우스 공작은 크리소르와 사이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녀를 잘라 내는 것도 서슴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아는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크라우스 공작은 크리소르에게는 시선 한 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크리소르 크라우스가 잘못된 주장을 하였으나 이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으며, 신전의 혓바닥에 넘어가 벌어진 일일 뿐입니다…….”
마치 답안지를 읊듯 술술 말하는 크라우스 공작의 모습에 아딜로트가 짧게 실소했다.
“그래서?”
“하여 이 많은 충신이 폐하를 능멸하고자 함은 아니었음을 알아주시는 것이 성군이 덕목이 아닌가 합니다만…….”
그가 마지막에 녹색 눈동자를 모로 굴려 귀족들에게 눈짓했다. 귀족들은 그 의미를 깨닫고는 벌떼처럼 호응했다.
“마, 맞습니다! 저희는 그냥 그 간악한 신관의 꾐에 넘어갔을 뿐입니다!”
“애초에 저희가 진짜로 폐하를 능멸하려 했겠습니까! 하하하!”
“무, 물론 죄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니……, 요, 요하네스 대신관을 데려와 사특한 말을 지껄이게 한 이가 책임져야 합니다!”
“저 율리시즈라는 자의 말을 들어 보면, 라지푸트와 내통한 듯하니 이는 큰 중죄입니다!”
“……이……!”
크리소르는 고운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긴 채 의석을 노려보았으나, 귀족들은 기세등등했다.
‘황태후만 없어지면…….’
‘너 혼자 죽으면 돼!’
황태후만 던져 주고 빠져나갈 생각 만만인 게 뻔히 보였다.
‘그렇게 놔둘까 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미아가 한 걸음 나섰다.
“맞아요! 라지푸트랑 내통한 매국노를 어떻게 오르퀘니나에 두겠어요!”
그녀가 호응하고 나서자 크라우스 공작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설마.”
그러다 일순 그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알아챘대도 늦었어.’
미아는 슬픔과 분노가 섞인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더 저는 크라우스 공작 각하께 실망했어요!”
“……!”
미아는 자신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가만히 서서 만끽했다.
누군가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아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제가 아니라 다른 분들이 설명해 주실 거예요. 들어와 주세요!”
곧 안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외제니의 홀에 새로 들어온 것은 두 명의 관료였다.
“안녕하세요. 상무부 관료인 크리스티아네 포크트입니다.”
“재무부 관료인 아르민 슈라이버입니다.”
서류를 팔에 끼고 들어온 두 사람은 이런 자리가 처음인지 약간 긴장한 얼굴이었다.
귀족들은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고작 중급 관료가 이 자리에서 뭘 하겠다고?
그러나 크라우스 공작의 얼굴은 이미 뻣뻣하게 굳은 뒤였다.
“아시다시피 크라우스 공작 각하께서는 상무부를 담당하고 계십니다.”
크리스티아네가 먼저 말문을 뗐다.
“그리고 저는 호흐실트 후작이 라지푸트와 거래한 장부에서 상무부 윗선이 개입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뭐, 뭐라고!”
리누스 호흐실트 후작. 라지푸트와 내통해 전로를 팔아먹으려다 들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당한 매국노.
리누스 호흐실트의 행적은 황태후파의 귀족들 눈에도 명백히 매국 행위였다.
‘그런데 그 호흐실트 후작의 뒤를 크라우스 공작이 봐줬다고?’
귀족들의 눈, 보다 더 깊이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미아의 눈에는 보였다.
‘아직 시간인데 벌써 놀라면 어떡해?’
사실, 이 정보는 이미 오래전에 조사된 정보다. 에트루리나 지역으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아딜로트, 요아힘과 함께 얘기를 나눈 적도 있고 말이다.
‘라지푸트로 향하는 수출량이 수상할 정도로 급등했군요. 전부 무관세 품목입니다.’
‘왜 못 잡아냈지? 세빌 상회라면 요주의 감사 중이었을 텐데.’
‘미아 님의 말씀이 맞다면 상무부를 담당하는 크라우스 공작이 뒤를 봐줬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때, 셋은 이 정보를 좀 더 아껴 두기로 결정했다.
‘아직은 크라우스 공작을 몰아붙이기엔 부족합니다. 그라스 후작까지 내치게 된 마당에 크라우스 공작까지 손대려 하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것입니다.’
‘그럼 좀 더 기다려 보죠!’
그리고 미아는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에게 심층 조사를 부탁했다.
‘크라우스 공작이 이걸 혼자서 했을 리 없어요. 좀 더 조사해 줄 수 있어요?’
‘물론이에요, 미아 님. 얼마든지 도울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라를 좀먹는 이런 이들은 뿌리 뽑아야 합니다.’
다행히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은 죽이 제법 잘 맞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크라우스 공작의 뒷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다 아주 괜찮은 정보원이 들어온 순간, 조사는 결실을 얻기 시작했다.
‘내가 공작가에 있을 때, 문장 없는 마차를 종종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수도에서 같은 마차부를 본 적이 있어요. 조사해 보니 탈리야 롯트의 집이더군요.’
‘탈리야 롯트라면…… 상무부 부장 말하는 거야?’
‘맞아요. 하지만 그녀는 귀족이 아니라 관료에 불과하죠. 그래서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나온 거지?’
‘탈리야 롯트가 뇌물을 받는 때는 상무부가 감사원의 감사를 받을 때와 맞물려 있더군요.’
‘흐음.’
‘당신이라면 이 정도 정보만 가지고도 활용할 수 있겠죠.’
‘흐으음! 그래서, 정보 알려 줬으니까 살려 달라고?’
‘아뇨. 날 개먹이로 던져 주려고 한 크라우스 공작을 대신 끌어내려 줘요.’
“……해서, 릴리벳 크라우스 님의 협조 덕에 조사는 순조로웠습니다.”
크라우스 공작의 얼굴이 처음으로 와락 구겨졌다. 평소의 고상함 따윈 온데간데없는 용렬한 인상이었다.
‘기르던 개에게 물린 꼴이지.’
미아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씩 웃었다.
‘아마 릴리벳을 경계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 자기보다 아랫급이고, 언제든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원래 아랫사람일수록 저 혼자 침몰하는 일이 없게끔 단단히 대비해 놓는 법이다.
그리고 그건 크라우스 공작과 손잡고 있던 상무부 부장, 탈리야 롯트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는 기사와 함께 탈리야 롯트에게 찾아갔고,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아르민이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모두 앞에 펼쳐 보였다.
“세빌 상회와 라지푸트의 거래에 손대지 말라는 크라우스 공작 각하의 친필 서간입니다.”
“……!”
“저, 저게 진짜야?”
“보기엔 진짜 같은데…….”
소란 속에서 크라우스 공작은 더는 가늘게 뜬 눈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눈꺼풀이 없는 뱀처럼, 그러나 뱀이 아니기에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로 홉뜬 눈으로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은 그런 크라우스 공작의 시선에 흠칫했으나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마, 말고도 정황 증거가 여럿 있습니다. 크라우스 공작가는…… 라지푸트와 내통해 오르퀘니나를 팔아먹으려 했습니다!”
“재무부에서도 확인했습니다.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거액의 후원금이 각기 다른 가문으로 흘러 들어간 것을 말입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
크라우스 공작을 지지하던 귀족들마저 크라우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의심과 충격이 섞인 눈초리였다.
크리소르는 낭패감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정치계를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뒷배인 크라우스 공작가 덕이었다.
그 공작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하는 크리소르의 얼굴을 감상하며, 미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크리스티아네와 아르민을 가렸다.
“아시겠지만 국가 내란죄는 즉결처형이에요.”
“…….”
크라우스 공작의 찌를 듯한 시선이 이번엔 미아에게 향했다.
“왜 그러셨어요. 가진 것도 많은 분이.”
미아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말뿐이었다.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아…… 셀레스티얼.”
“네.”
깜빡일 생각조차 없는 녹색 눈이 미아를 바라보았다.
일순 그는 탄식했다.
“가장 먼저 너를 죽였어야 했던 것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르디안이 미아 앞을 가로막았다.
“눈.”
“…….”
“치워.”
“……건방진 사냥개 같으니.”
모욕에도 까닥 않고 검 손잡이를 쥐는 페르디안의 모습에 크라우스 공작이 소리 높여 웃었다.
“하……. 하하! 하!”
눈을 부릅뜬 채 웃음기 없이 웃는 그의 모습은 퍽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웃은 뒤 중얼거렸다.
“내 실책이군……. 고작해야 황제나 재상만 경계하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미아가 페르디안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에그! 앞으론 주의하세요!”
“앞? 앞이랄 게 있나?”
“사실 없긴 해요!”
“크, 크라우스 공작. 이게 사실입니까? 라지푸트와 내통했다고요!?”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두 사람의 대화에 옆에 있던 카르디날레 공작이 끼어들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
미아와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적어도 산 사람 같았던 크라우스 공작의 낯에서 갑자기 생기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