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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85화 (185/193)

185화

“아…….”

안대가 풀린 율리시즈는 연한 갈색의 눈을 깜빡이며 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부시다는 듯이 눈웃음치며 고개를 내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딜로트가 아닌 미아였다.

“미아 님…….”

미아는 약간 당황했다. 아는 척 해도 되는 걸까?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아딜로트가 말했다.

“증언이나.”

“…….”

“하지?”

굳은 얼굴이었다.

딱 소리는 어느새 꺼내든 검집으로 바닥을 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

율리시즈는 말없이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미아를 볼 때와는 다른 차가운 눈빛이었다.

둘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으나, 율리시즈가 먼저 눈웃음쳤다.

“그래요, 일단은…… 제 일을 해야겠죠…….”

율리시즈는 구속구에 묶인 사지를 이리저리 비틀어 가며 아딜로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전혀 기죽지 않은 야생의 짐승 같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귀족 나리들……. 전 크리소르 황태후에게 고용되어 있던 암살자랍니다…….”

“기, 기사들은 뭘 하는 겐가!”

사람들이 채 놀라기도 전에 크리소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감히 외제니의 홀에서 사특한 말을 하고 있는 저자의 입을 막지 않고!”

“계속 발언하도록.”

황태후가 데려온 소수의 기사가 아딜로트의 눈빛을 받고 움찔했다. 그들은 황제의 기사들이 경고하듯 무기를 쥐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율리시즈는 자신에게 명령하는 아딜로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우선…… 그러네요. 제 정체부터 증명해야겠군요……. 제 품에, 크리소르 황태후와 작성한 계약서가 있어요…….”

아딜로트가 이번엔 페르디안에게 턱짓했다. 페르디안 정도는 되어야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율리시즈는 페르디안이 품을 뒤지는 동안에도 내내 키득거렸다.

페르디안은 잠자코 율리시즈의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아딜로트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딜로트가 그것을 읽어 내리는 동안 옆에서 요아힘이 같이 살폈다.

“완벽하군요. 서명도 황태후 폐하의 것이고……, 의외로 꽤 오래전부터 고용하고 있었군요?”

그 말에 황태후가 급하게 말했다.

“그냥 여러 뒤처리를 위해 고용했을 뿐이오! 정치를 하는 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수단을 써야 할 때도 있지 않나!”

그러나 그 순간 율리시즈는 봄날의 소년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라지푸트와의 내통이라면 의미가 좀…… 달라지지 않나요?”

“……!”

다음 순간, 황태후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율리시즈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시즈!”

미아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잡아.”

아딜로트의 명령으로 기사들이 황태후의 양팔을 붙잡았다.

“네놈이! 감히 내 명령을 무시하고 저 계집에게 붙은 게로구나!”

크리소르는 그 상태로도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돌린 채 소리 없이 웃던 율리시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우습네요……. 날 미아 님에게 붙인 건 당신이잖아요……? 그럼, 반대로 내가 회유당할 것도 예상했어야지…….”

“하! 그래서 지금 대놓고 저 계집과 놀아났다고 말하는―.”

스팍!

그 순간 뭔가가 크리소르의 머리 옆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 계속 함부로 지껄여 봐요…….”

율리시즈가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던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율리시즈의 얼굴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무표정이었다.

“행동을 조심해라.”

페르디안이 한 박자 늦게 그런 율리시즈를 제압해 바닥에 처박았다. 묘하게 일부러 율리시즈가 비수를 던지는 것까지는 알고도 봐 준 듯한 느낌이 났다.

“…….”

크리소르는 귓가를 스쳐 지나간 비수에 놀라 숨을 멈춘 채였다. 그녀의 올림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장식이 비수에 맞고 떨어져, 검은 머리카락이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크리소르 님…….”

몸을 비틀거리는 크리소르를 시녀인 루넬이 부축했다.

루넬은 율리시즈를 죽일 듯이 바라보았지만, 율리시즈는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냥 나 혼자 넘어갔을 뿐이에요. 멍청하게…….”

그때,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말했다.

“그대가 멍청한 줄은 잘 알겠고.”

“…….”

그는 율리시즈의 찌를 듯한 시선에도 태연하게 말했다.

“라지푸트에 대한 이야기나 해 보지.”

율리시즈가 혀를 차며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살기등등한 눈초리였다.

그러고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미아를 흘낏 바라보곤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저는 오랜 시간 동안 크리소르 크라우스 황태후를 위해 일해 왔고……, 그녀의 명령으로 라지푸트의 만리타 장군과 접촉하기도 했습니다…….”

“거짓말이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크리소르가 외쳤다.

“저깟 천민의 말을 들어 무엇하겠소! 만리타 장군은 그저 일방적으로 내게 존경을 표했을 뿐이야!”

“뭐어, 그거야 제가 황실로 미리 보내놓은 서신을 보면 밝혀지겠지요…….”

“……!”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의 크리소르를 보며 율리시즈가 수줍게 웃었다.

“설마 제가 당신 같은 여자랑 일하는데…… 증거 하나 안 마련해 놨겠어요……?”

“이…… 배은망덕한 놈!”

“네에. 그 배은망덕한 놈이 당신을 위해 꽤 많은 사람을 죽여드렸죠……. 호흐실트 후작을 포함해서요…….”

그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호흐실트 후작이 라지푸트와 내통한 배경에 황태후 폐하가……?”

“어쩐지 세빌 상회가 폐쇄적인 라지푸트와 연이 있었다는 게 이상하긴 했는데…….”

“거짓말이오! 다들 어찌 이런 천민의 말에 귀 기울인단 말이오!”

“맞습니다!”

그때, 라인하르트 백작이 우렁차게 외치며 나섰다.

“결국 배움도 모자라고 더러운 짓이나 일삼던 이 아니오! 그런 이가 이 신성한 외제니의 홀에서 진실만을 말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들!”

“하, 하지만 증거를 보내놓았다고…….”

“애초에 태어나기를 야비하게 태어난 자요! 날조했을 게 뻔하지!”

라인하르트 백작은 당당했으나 어딘지 초조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황제의 혈통이 부정하다고 주장한 이가 그였기에 어쨌건 그는 황태후와 한배를 탄 사람이었다.

그런 백작의 말에 율리시즈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날조라……. ‘율리시즈’가 그런 걸 일삼는 길드였다면, 당신들 귀족들이 그렇게 많이 이용하진 않았을 텐데요…….”

“율, 율리시즈!?”

그 순간 회의장 곳곳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율리시즈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네요……. 여기 제게 의뢰를 맡겼던 분들도, 여럿 계시죠……?”

오르퀘니나 최대의, 그리고 최고의 정보 길드 ‘율리시즈’. 그 수장.

알고 있는 정보는 얼마나 될 것이며, 쥐고 있는 약점은 얼마나 많겠는가. 홀에 모인 귀족 중 반 이상이 땀을 뻘뻘 흘려 대기 시작했다.

율리시즈는 키득거리며 라인하르트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카를 라인하르트 백작……. 당신은, 확실히 ‘율리시즈’를 이용한 적은 없네요…….”

“당연하지! 내가 그딴 수를……!”

“하지만 당신 아비는 ‘율리시즈’를 이용한 적이 있고요…….”

“……뭐?”

당황한 라인하르트 백작을 보며 율리시즈가 속삭였다.

“당신 아비……. 슐레만 라인하르트 백작……. 그는 젊은 시절, 친구인 라이오스 남작의 뒤통수를 치고 그가 받았어야 했을 유산을 갈취한 적이 있어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 아버지가 그럴 리가……!”

“그러네요. 증거는 길드 지부에 있으니까. 제가 돌아가서 가져오면 되겠네요……?”

율리시즈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러면 라인하르트 백작가의 부가 잘못된 방식으로 축적되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사회에 환원하시려나……?”

“……!”

라인하르트 백작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으나,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봐. 그럴 리 없지…….”

율리시즈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픽 웃었다.

“제가 의심스럽다면 여기서 그냥 내보내 주면 되겠네요……. 그럼 아는 정보를 모조리 수도에 풀 수 있을 테니까…….”

율리시즈의 발언에 귀족들의 눈이 번득였다.

이대로 율리시즈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를 여기서 내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는 건, 귀족들의 치부가 드러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고 주장했다간, 황태후와 크라우스 공작에게 미움을…….’

귀족들이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때였다.

“폐하.”

조용한 목소리가 홀을 울리더니, 크라우스 공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귀족들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섬뜩한 녹색 눈을 빛냈다.

“신의 생각에는 이것이…… 사특한 국모를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크라우스 공작!”

크리소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미아는 상황을 관망하며 놀란 척 입을 가렸다.

‘꼬리 자르기라 이거지.’

손바닥 사이로 미아의 입꼬리가 쌕 하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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