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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84화 (184/193)

184화

요하네스 대신관이 경악으로 굳었다. 그사이, 말석에 있던 로브 쓴 이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 중 가장 큰 이가 로브를 벗자, 레몬빛 금발을 가진 준수한 용모가 드러났다.

“요하네스 대신관님.”

“드, 드미트리! 네가 왜 여기에…….”

“미아 님이 당신의 죄악을 미리 간파하고 의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드미트리는 그렇게 말하고서 미아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약하게 미소 띤 얼굴이었다.

‘꼭 보이는 것 같다니까.’

미아는 방긋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드미트리는 곧바로 무정한 낯을 하고서 속삭이듯 말했다.

“요하네스 대신관님. 당신을…… 믿었습니다. 우리 모두가요.”

그 말에 드미트리 주변에 있던 이들도 로브를 벗었다. 모두 신관들이었고, 화나고 분노한 얼굴이었다.

드미트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 중앙으로 걸어 내려오며 말했다.

“대신관님께서 황태후 폐하에게 금품을 받으며 기부금 역시 빼돌리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그것까지!?”

“여신께서 눈감아 주고 계셨기에 저 역시도 외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늘 점잖게 미소만 짓고 있던 드미트리의 얼굴에 실망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가 번져 나갔다.

“남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다니요. 거기다 그걸 여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다니요! 그것도 신성력을 잃은 당신이 말입니다!”

“……!”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대신관이 신성력을 잃었다고?”

“자, 잠깐만. 그럼 명제 증명은 어떻게 되는 거야?”

크리소르 황태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과 동시에, 요하네스 대신관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탁. 데구르르…….

신관 한 명이 그것을 주워들어 드미트리에게 건네주었다.

“드미트리 님.”

대신관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드미트리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입술을 꾹 깨문 뒤, 경건하리만치 엄숙한 동작으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드높은 곳의 여신께 드미트리 로렐의 이름이 묻습니다.”

“……!”

“대신관 요하네스 자우어가 신성력을 잃은 것이 맞다면…… 제게 증표를 보여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미트리의 온몸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오, 오오!”

“뭐야, 대신관이 할 땐 저런 게 없었잖아!”

미아는 한발 물러나며 금빛이 어룽거리는 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크리소르는 거대한 절망에 삼켜진 듯했고, 크라우스 공작은 놀람과 동시에 뭔가를 놓아 버린 듯했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온몸의 수분이 날아간 사람처럼 보였고, 카르디날레 공작은…….

‘어디 갔어, 이 아저씨.’

돌아보니 홀을 빠져나가려다 입구에서 기사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웃기는 양반이야.’

미아가 다시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아딜로트가 있는 상석을 향해 있었다.

“또한, 황제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가 슈뢰더 황가의 적통이 맞다면, 그에게도 증표를 내려 주십시오.”

이번에는 황금빛 광채가 아딜로트의 몸에 서렸다.

아딜로트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검 손잡이를 쥐었다가,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놓았다.

눈앞의 상서로운 징조에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이건…….”

“허어…….”

그사이 순식간에 주검처럼 창백해진 드미트리를 신관들이 부축했다.

“드미트리 님. 역시 무리를…….”

“……괜찮아, 세비앙.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드미트리는 심호흡한 뒤 요하네스 대신관에게 말했다.

“요하네스 자우어. 신전의 규율에 따라 당신은 더는 대신관이 아닙니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축적한 재산은 모두 몰수될 것입니다.”

“안, 돼…….”

요하네스 대신관이 몇 마디를 더듬거렸으나 반항할 기력조차 없는 듯했다.

‘끝이지, 뭐. 살아서 나간다 해도 태후파 귀족 중 누군가가 가만두지 않을 테고.’

만족스러웠다. 드미트리는 정확히 미아가 바란 대로 움직여 주었다.

요하네스 대신관의 정체를 폭로한 것에서부터, 아딜로트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까지.

신성력이 몸에 많이 부담을 줬는지 비틀거리긴 했지만, 드미트리는 꿋꿋하게 서서 아딜로트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 지금 막 대신관이 된 드미트리 로렐이라 합니다. 대신관의 신병을 신전에 넘겨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흐음.”

아딜로트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황제를 능멸한 죄는 큰데. 그걸 신전이 받아 가겠다…….”

“저희의 과오니 저희가 책임지고 싶을 뿐입니다.”

드미트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딜로트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미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네?”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을까요? 드미트리 좋은 사람이에요!”

“그 말을 들으니 더 들어주기 싫어지는데.”

왜…….

미아가 입을 삐죽 내밀자 아딜로트는 약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내저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기사들이 홀의 문을 열었다. 곧 흰 갑옷을 입은 신전 기사단이 들이닥쳐 요하네스 대신관의 팔다리를 구속했다.

“안돼, 제발……! 나, 나는 그냥……!”

그가 뭐라고 지껄였으나 누구도 그걸 귀담아듣지 않았다. 미아는 태연히 요하네스 대신관이 끌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로써 황실이 신전에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

너무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아딜로트니까 괜찮을 것이다.

“오르퀘니나의 적법한 통치자인 아딜로트 황제 폐하께 여신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고맙군.”

드미트리의 축언에 아딜로트가 짧게 답했고, 드미트리는 곧 미아를 돌아보았다.

“신전이 더 이상의 과오를 범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해 주신, 미아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여신께서 함께하시길…….”

“고맙긴요! 해야 할 일인데요, 뭐!”

미아가 활짝 웃었고, 드미트리 역시도 지친 미소를 짓고서 신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났다.

정돈된 난장판에 가까웠던 시간이 지나가고, 외부인은 모두 물러났다.

외제니의 홀은 조용해졌고, 기사들은 살기등등해졌으며, 그중 으뜸으로 섬뜩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은 아딜로트였다.

“그럼.”

“……!”

움찔.

아딜로트의 말 한마디에 귀족들이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공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여신도 내가 슈뢰더의 적통이 맞다 하는데.”

아딜로트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

크리소르는 미치고 싶은 심정으로 이를 뿌득 악물었다.

‘아딜로트 놈이 슈뢰더의 적통이 아니라 그토록 단언하더니!’

요하네스 대신관의 말에 이런 일까지 벌였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니.

설마 제 목숨까지 걸고 그따위 거짓말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그는 대신전 지하에 있다고 하는 ‘철의 처녀’로 향하고 있으리라.

‘실책이다.’

라인하르트 백작과 그녀를 지지했던 귀족들 역시도 겁에 질린 얼굴로 크리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원을 바라는 시선이었다.

“…….”

크리소르는 초조하게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아딜로트는 건방질 정도로 여유로운 낯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분하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힘과, 덩달아 목숨을 걸게 된 귀족들의 지지를 합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오르퀘니나를 위해’ 한 일이었다는 대의명분도 있었다.

‘물론 손해는 막심하겠지만…….’

크리소르가 말라 가는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은 굴욕으로 일그러진 채였다.

“……폐하.”

“사죄의 말이라면 달갑게 받지.”

“…….”

크리소르가 다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복수를 해야 했고,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큭……. 감히 대신관의 농락으로……, 폐하를…….”

“…….”

“……능멸하려 한 점을……, 사죄…… 드리오며…….”

“하.”

아딜로트가 실소를 흘렸다.

그는 굴욕감과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크리소르를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이제 더 재밌는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군.”

홀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사람 한 명이 기사들의 손에 끌려 들어왔다.

“……!”

그자의 얼굴을 본 순간, 크리소르는 숨을 삼켰다.

미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미아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를 보자마자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었다.

‘―시즈!’

안대와 재갈, 구속구를 차고 있는 율리시즈였다.

* * *

율리시즈를 발견한 미아는 당황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지만, 혹시 내가 끼어들었다가 시즈 계획이 망가질 수도 있어.’

눈치를 보니 율리시즈가 이번 회의에 증인으로 참석할 것을 아딜로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해 주지 않은 건 역시 내가 말릴까 봐겠지.’

미아는 불안을 삼키고 눈을 부릅떴다.

‘율리시즈를 살릴 기회는 아직 있어. 지금은 상황을 살피는 게 먼저야.’

크리소르의 얼굴은 율리시즈의 등장 이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했다.

그사이 기사들이 움직여 율리시즈의 입에서 동그란 재갈을 빼내고, 안대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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