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그 모습에 크리소르는 더 새되게 웃었다.
“문란하기 짝이 없구나! 그러니 반역자의 딸인 셀레스티얼과도 놀아났겠지. 끼리끼리 천박하기 짝이 없…….”
패앵―!
크리소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공음이 울렸다. 그리고 뭔가가 크리소르의 목 근처를 스쳐지나가 벽에 박혔다.
“……!”
“황태후 폐하!”
시녀 루넬이 기겁해 달려와 크리소르를 살폈다.
크리소르는 다친 곳이 없었다. 그녀는 제 목을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펜 하나가 뒤쪽 벽에 박혀 있었다.
“입을 조심해라.”
던진 사람은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묶어 늘어뜨린 그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펜을 던졌던 손을 다시 추슬렀다.
잠시 놀라 숨을 들이켰던 크리소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 지금 나를 위협한 건가? 게다가 하대를 해? 키토 후작 따위가!?”
“곧 황태후가 아니게 될 테니 미리 했을 뿐이다.”
“감히 근본도 없는 사냥개 주제에 크라우스 공작가 출신인 나에게―!”
“키토 후작.”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크리소르의 말을 잘랐다. 아딜로트였다.
“자제하지.”
그가 심드렁히 말했다. 분명 황제를 옹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도 아딜로트는 어딘지 언짢아 보였다.
“죄송합니다.”
페르디안은 눈을 내리깐 채 답했다. 그러나 그의 무거운 회잿빛 시선은 다시 크리소르에게 향했다.
크리소르는 위압감을 느끼고 잠시 움찔했으나 곧 살쾡이처럼 사납게 페르디안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는 건 결국 저번 주의 결정을 철회할 생각이 없으시단 거네요!”
그러던 와중, 가벼운 손뼉 소리와 함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크리소르가 고개를 돌리자, 산새처럼 포르르 단상 정중앙으로 나선 미아 셀레스티얼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는데! 아쉽다!”
“하!”
크리소르가 코웃음쳤다.
“우스운 말이군. 기회는 내가 준 게 아닌가? 저번 주만 해도 발치에 무릎 꿇고서 시간을 달라 빌던 것을 잊은 모양이지?”
미아는 심드렁하니 고개를 쌜긋했다.
“무릎 좀 꿇은 게 어때서요? 상대방 조질 수만 있으면 그만이지!”
“너는 자존심도 없단 말이냐?”
“자존심은 밥도 안 먹여 주고 목숨도 안 붙여 주는데요!”
“귀족이면서 평민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군. 근본도 없고 천박하기 짝이 없어.”
“그래 봐야 내가 당신보다 더 똑똑한데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러워요?”
“그 똑똑한 머리로 오늘 네 목이 성문에 걸릴 줄은 몰랐나 보지?”
“그 똑똑한 머리가 오늘은 당신 죽는 날이라고 알려 주더라고!”
“잘도 허세를―.”
크리소르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미아 셀레스티얼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요하네스 대신관 앞에 섰다.
“요하네스 대신관.”
“……!”
요하네스 대신관은 점점 커져 가는 불안감에 움찔했으나, 겉으로만큼은 인자하게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서 미아 셀레스티얼이 묘하게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신이 그러던가요? 우리 폐하가 슈뢰더의 적통이 아니라고?”
격의 없는 질문이었다.
‘어린 게 감히…….’
요하네스는 아주 잠시 발끈했다.
‘……그런데 뭘 알고 묻는 건 아니겠지?’
그다음엔 의구심을 가졌고.
‘설마 그렇겠어. 신전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는데 이깟 계집애가…….’
마지막으론 낙관했다.
그가 슬픈 듯이 말했다.
“미아 셀레스티얼 양……. 신의 힘은 절대적이네. 저번 회의 때 보지 않았나……. 인정하기 싫은 사실임은 알겠지만, 부정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네.”
“흐음. 그렇다 이거죠? 할아버지는 여신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물론이네.”
“목숨 걸 수 있어요?”
여전히 예의라곤 집어치운 말투에 대신관의 미소가 흐트러졌다.
‘건방진 년. 원래대로라면 내 옷자락에 입이라도 맞추게 해 달라고 빌었어야 할 신분이거늘……!’
그는 순식간에 엄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물론이네. 나는 언제나 여신 앞에서 떳떳하니까.”
그 순간, 미아의 분홍색 눈에서 수상할 정도로 찬란한 광채가 일더니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이건 뭔데요?”
그리고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어 보였다.
* * *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앞자리에서부터 천천히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
“저건……!”
마력으로 특수한 무늬를 새겨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양피지.
역시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붉은 잉크.
그 아래, 선황제 루드비히 슈뢰더의 서명.
그리고…….
은은한 금빛을 발하고 있는, 전 대신관의 인장.
“맞아요! 레아 황비 전하께서 변을 당한 날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공증이에요!”
미아의 경쾌한 말이 쐐기를 박았다.
놀라지 않은 건 미리 알고 있던 황제파 귀족 일부뿐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그 크라우스 공작마저 입을 벌렸다.
공증을 코앞에서 보게 된 요하네스 대신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눈을 부릅뜬 채,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굳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샅샅이 공증을 살폈다.
‘대신관의…… 인장.’
금빛 기류가 흐르는 인장에는 명확히 신성력이 흐르고 있었다.
“…….”
진품이다.
요하네스 대신관의 사고가 마비되었다. 뻣뻣하게 굳은 그를 대신해 옆에 앉아 있던 크리소르가 물었다.
“그게 어떻게…….”
“사실 폐하께서 사변이 있던 날부터 간직하고 계셨거든요!”
“뭐……?”
크리소르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날 아딜로트 놈의 소지품을 검사했을 때 저런 건……!”
“아. 이걸 찾으셨다고요? 어째서요?”
크리소르가 흠칫했다.
“그야 공증이 없으면 의심받기 딱 좋으니……!”
“본인이 의심해 놓고 왜 제삼자인 것처럼 말씀하세요? 유체 이탈 화법?”
크리소르의 얼굴이 확 구겨졌으나 미아는 그걸 무시하고 의석으로 몸을 홱 돌렸다.
“폐하께서는 너무! 다정하시고, 너무! 자비로우셔서 이러한 물건이 없더라도 귀족들의 진심 어린 충성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성군이었는데!”
미아가 훌쩍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글쎄 이놈의 귀족들이 뒤통수를 쳤지 뭐예요…….”
그즈음 기사 한 명이 공증을 받아다 은쟁반에 올려놓았다.
재상 요아힘은 싱그러운 미소를 띤 채 은쟁반 옆에 서류 한 장을 더 올렸다.
“육안으로만 봐도 진품임은 확실하니 필요 없겠지만, 감정서도 곁들이겠습니다.”
기사는 차분히 의석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귀족들은 누구나 그 서류가 진짜임을 볼 수 있었다.
루드비히 황제의 서명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대신관의 인장은 더했다. 위품이 아니라는 건 뻔했다.
귀족들은 당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곧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나, 난 이미 황태후 편을 들었는데?’
‘안 돼! 저게 진짜면 나는……!’
죽는다. 무조건.
당황한 이들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이, 이거 너무 수상하지 않소!”
“마, 맞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보여서 의심의 불씨를 꺼뜨렸어야지! 이렇게 타이밍 좋게 그런 걸 내놓겠다고!”
“게다가 전 대신관은 이미 죽은 사람 아니오! 이쪽은 현 대신관이 검증했다고!”
미아는 ‘이런 병신들…….’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역정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맞네.”
크리소르 역시 나섰다.
“바로 저번 주에 요하네스 대신관이 이미 명제 증명을 끝마치지 않았나! 그렇지 않소, 요하네스 대신관!”
“……!”
공증이 나온 순간부터 눈앞이 깜깜해졌던 요하네스 대신관이 크게 움찔했다.
‘이,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그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온몸이 땀에 절어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정말로 전 대신관이 인장이 나올 줄은 몰랐다. 공증은 소실되었다고 들었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이대로 가다간 끝이다!’
뭐라도 해야 했다. 다행히 지금 이 자리의 신관은 그 하나뿐이었다.
‘지금 상황만 모면하면 돼!’
요하네스 대신관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호통쳤다.
“……전 대신관의 추한 일면이지요!”
“……뭐?”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귀족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대신관이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는 크리소르 황태후가 대견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신전의 추한 일면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 감명받은 듯했다.
그 눈빛마저 두려워 요하네스 대신관은 무릎이 꺾일 뻔했으나, 간신히 바로 섰다.
싸늘한 비수처럼 꽂히는 황제의 시선에 다리가 후들후들했으나, 그건 그의 연기를 더 실감 나게 만들어 주었다.
“전 대신관인 테미르……. 사, 사실 그는 재물과 사리사욕을 위해 황제와 레아 황비에게 금품을 받고 그러한 인장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충격적인 고백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죽기 전에 제게만 몰래 그러한 일이 있었다 귀띔한 것입니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눈까지 질끈 감았다. 이는 분명 신전의 추문이 될 것이고 약점이 될 것이지만, 알게 뭔가?
그는 이 회의가 끝나면 즉각 신전으로 돌아가서 드미트리에게 대신관 직을 넘기고 은퇴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살아서 나가기만 하면……!’
하지만 충격으로 굳은 귀족들과 달리 황제와 재상, 그리고 미아 셀레스티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아는 약간 지루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타깝네요. 마지막 기회였을 텐데.”
“……?”
그녀의 고개가 휙, 먼 곳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들을 건 다 들었죠? 드미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