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불안을 느낀 요하네스 대신관은 지팡이 쥔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런 대신관의 모습을 발견한 크리소르가 약하게 미간을 좁혔다.
“대신관, 많이 피곤하신가? 손에 힘이 없는 모양인데, 지팡이는 다른 신관을 불러 들고 있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그게 사교계식 지적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듣고는 지팡이를 꽉 쥐며 미소 지었다.
“신의 힘을 빌리는 일은 몸에 큰 부담이 가지요. 그 탓인 듯합니다.”
“아아. 나도 알고 있네. 고생한 만큼의 보답은 확실하게 할 터이니 기다려 주시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요하네스 대신관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괜찮을 것이다.’
잠시간 그를 불안하게 했던 드미트리의 존재는 이내 크리소르가 말한 ‘보답’에 싹 날아가 버렸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그간의 기부금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돈을 낼 모양이지.’
크라우스 공작이 오르퀘니나의 상무부를 담당하고 있기에, 공작가의 재력은 상회를 가진 다른 가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덕에 신전이 황실과 척지고도 그들의 기부금만으로 꽤 오랜 세월을 무리 없이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드미트리는 매번 조용한 곳에 기도하러 가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렇겠지.’
자신은 그냥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큰돈을 받으면 그걸 들고 대신관에서 은퇴하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가서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그때 가면 책임자는 드미트리 아니겠는가?
‘요즘 자꾸 신전의 이상한 놈들과 어울리는 것 같긴 했지만, 착한 아이니까…….’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다시 그린 듯 자비롭고 인자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곧 국무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 가까워졌다. 황제파 귀족들은 그때쯤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지로티 공작의 의석은 비어 있었다.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야 여전히 무심한 낯이었고, 바이지겔 백작도 옆에 창을 꽂아 넣은 채 은근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묘하게 당당해 보이는데요?’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에이, 설마…….’
이윽고 홀의 문이 닫히고, 애쉬베이지의 머리에 준수한 용모를 가진 슐츠 공작이 들어와 종을 울렸다.
“국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원 여러분은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평소와 달리 힘이 실려 있었다. 안색도 밝은 편이었다.
위화감을 느낀 것은 요하네스 본인만이 아닌지, 옆에 앉아 있던 크리소르의 기세가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 드십니다.”
안쪽 문이 열리고, 아딜로트가 들어섰다.
풀어져 있던 외제니의 홀의 분위기가 단숨에 팽팽하게 조여진 것도 그때였다.
심드렁한 낯에 팔짱을 낀 채 코트를 걸친 젊은 황제는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을 향해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잡아.”
“앗.”
그가 손을 내민 상대는 미아 셀레스티얼이었다.
별로 높지도 않은 단상이건만, 아딜로트는 마치 툭 치면 와장창 부서질 설탕 인형 대하듯 미아 셀레스티얼을 바라보았다.
“히히.”
미아 셀레스티얼이 아딜로트를 향해 샐쭉 웃었고, 귀족들은 순간이지만 그럴 만한 미모이기는 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레이스가 조랑조랑 달린 연한 하늘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어쩐지 시선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미아는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녀 몫으로 마련된 벨벳 쿠션 의자에 사뿐 앉았다.
그리고 또랑또랑한 눈으로 의석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보이지 않는 밝은 얼굴이었다.
위화감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닫혀 있던 외제니의 홀의 문이 다시 열렸다.
“늦어 죄송합니다. 영지에서 급하게 달려온 터라…….”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홀을 가로지른 것은 금발의 여인이었다.
“세레니티!”
미아의 나직한 외침에 금발의 여인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황제를 향해 예를 차렸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이시여. 세레니티 지로티 인사 올립니다.”
세레니티는 전처럼 물결치는 금발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찬란한 머리카락은 귓가에서 짧게 끊겨 찰랑거렸다.
드레스를 입지 않고 잘 재단된 바지 예복을 차려입은 그녀는 전보다 당당하고 쾌활해 보였다.
“세레니티! 대체 그게 무슨 꼴……!”
말석에 앉아 있던 듀레인 남작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하다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는 소란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루치아노 지로티 공작 각하께서는 어제부로 지로티 공작 위에서 물러나 지로티 원로공이 되셨어요.”
혜성처럼 등장한, 그러나 혜성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운 세레니티 지로티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앞으로 지로티 공작가의 가주는 저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귀족들은 당황과 의아함을 느꼈다.
“……잘생겼다…….”
그 와중에 미아 셀레스티얼만이 묘하게 뺨을 붉히고서 눈을 반짝였다.
황제는 그 모습을 일별하더니, 뚱한 얼굴로 세레니티에게 말했다.
“지로티 공. 첫 국무 회의에 늦어 놓고 당당한 것도 재주라면 재주군.”
그의 허리에 ‘샹귀스―에키온’이 있었기에 보통의 귀족들은 이쯤 알아서 자라처럼 고개를 움츠리곤 하였으나, 새로운 지로티 공작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친애하는 벗에게 위기가 닥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빨리 공작 위를 계승하진 않았을 터인데, 참으로 폐하의 은덕입니다.”
아딜로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붙었다.
파직.
사람들이 황제와 지로티 공작가는 친한 것 아니었나, 하고 중얼거리는 사이 아딜로트가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됐으니 앉아.”
“네. 송구합니다.”
세레니티는 깔끔하게 사죄한 뒤 지로티 공작의 의석에 앉았다. 황제가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의석 사이의 소란은 정리되었다.
“다시 제안하지.”
아딜로트가 말했다.
“공들이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번 일은 크리소르 황태후의 심계일 뿐이야.”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서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괴었다.
“마지막 기회야. 나를 지지해.”
그의 말을 끝으로 외제니의 홀은 정적에 휩싸였다.
“…….”
“…….”
손드는 자나 발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이랴, 몇몇 고위 귀족들은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폐하. 아니, 곧 폐하라고 부를 필요도 없겠지만……. 이제 와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폐하가 슈뢰더의 적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카르디날레 공작이었다.
“한낱 외국인의 손에 오르퀘니나가 이런 식으로 좌지우지 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군요!”
카르디날레 공작은 있는 힘껏 비웃음을 지으며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반응이…….
“궁내관. 잘 적어.”
“사실 카르디날레 공작은 이미 적혀 있습니다…….”
……이상했다.
의아해하는 카르디날레 공작 옆에서 크라우스 공작 역시 황제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폐하. 인생에 회의감이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입 다물어.”
가장 골머리 썩히고 있어야 할 재상과의 대화도 가볍기 짝이 없었다. 아딜로트는 쭉 뻗은 눈썹을 조금 찡그린 채 크라우스 공작을 돌아보았다.
“크라우스 공작.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
지목당한 크라우스 공작은 그 순간 빠르게 상황을 계산했다.
‘허세? 아니면, 정말 뭔가 찾아낸 것인가?’
하지만 만에 하나 황제가 공증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바로 전 주, 요하네스 대신관은 명제 증명을 통해 아딜로트가 슈뢰더의 적통이 아님을 밝혀냈다.
이 사실이 뒤집힐 방법은 없었다.
‘……아니, 있기야 하지.’
만약 대신관이 신성력을 잃었다면, 그래서 그의 명제 증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거라면…….
하지만 크라우스 공작은 이내 그 가설을 털어 냈다.
설마.
그 정도로 멍청하려고.
크라우스 공작가는 그동안 신전에 많은 지원을 해 왔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게 아니고서야 그런 중요한 사실을 속일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목숨도 걸려 있지 않나.
“……크라우스 공작가는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계산 끝에 크라우스 공작이 말했다.
“저는 오르퀘니나를 이만…… 적법한 통치자의 손에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확답 고맙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 노트에 뭔가를 슥슥 적기 시작했다.
‘저건 대체 뭐지?’
크라우스 공작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 사이, 이번에는 아딜로트가 크리소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황태후에게 묻지.”
황제와 황태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귀족들은 등줄기를 타오르는 찌릿한 소름을 느꼈다.
그만큼 그 둘의 시선에는 살기만이 가득했다.
“지금이라도 의제를 철회하고 감히 황제를 능멸한 것을 사죄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더러운 야만인의 핏줄답게 짖는 것은 아주 잘하는구나.”
과연 크리소르답게 그녀는 몹시도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안타깝다는 듯이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네 어미는 죽을 때도 참으로 조용했지. 알고 보니 네 어미도 너희 젠타리아가 아니라 다른 배를 빌어 태어난 게 아니냐? 아하하하하!”
“…….”
크리소르가 소리 높여 웃었고, 반대로 아딜로트의 얼굴은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