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81화 (181/193)

181화

“내가 그러도록 둘 것 같아!?”

“안 두시겠죠. 하지만 그러지 마세요.”

“싫어! 난 절대 내 친구가 죽는 꼴은……!”

미아가 버럭 외치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주변이 빛 하나 없이 깜깜했던 탓에 그녀의 발이 꼬였다.

“아!”

그대로 넘어지려는 미아의 몸을 율리시즈가 붙잡았다.

“…….”

율리시즈는 중심을 잃은 미아를 붙잡고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

졸지에 안긴 꼴이 된 미아는 바짝 굳어 버렸다.

그러다 사냥꾼의 눈치를 보는 토끼처럼 슬슬 율리시즈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때문에 내내 보이지 않았던 율리시즈의 얼굴이 그제야 보였다.

“저도…… 싫어요.”

그는 무척 상심하고, 또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은 무언가에 매우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더 미아 님을 빨리 만났다면…….”

“…….”

여러 감정이 뒤엉킨 중얼거림에 미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율리시즈는 그런 미아를 강하게 한번 쥐었다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주세요……. 제가 더는 탐낼 수도 없게.”

* * *

황태후 궁.

크리소르 황태후의 측근 시녀인 루넬은 시녀 한 명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또?”

“네…….”

시녀가 움츠러든 채 답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루넬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내가 가 보지.”

그녀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바로 황태후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는 밝았다. 크리소르의 명령 때문이었다.

‘아하하! 일이 끝나면 너희 모두에게 상을 내리겠다! 궁을 밝히고 음악을 켜게 해라!’

국무 회의에서의 승리가 그녀에게 크나큰 기쁨을 준 모양이었다.

크리소르는 요 며칠 동안 궁을 환히 밝혔고, 심지어 때때로 작은 응접실의 마루에서 춤추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심장이 조마조마한 것은 루넬뿐이었다.

‘크리소르 님…….’

크리소르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절대 이렇게 활동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

그런데 최근 크리소르는 자신의 병이 다 나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크리소르를 달래서 침대에 눕히는 건 루넬의 역할이었다.

생각하는 사이 황태후의 방에 다다른 루넬이 문에 노크했다.

“황태후 폐하. 루넬입니다.”

“들어오게.”

루넬은 수락의 말을 듣고 방에 딸린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크리소르는 윙체어에 앉아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루넬을 발견하곤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오, 루넬. 나의 오랜 벗이여.”

“…….”

루넬이 멈칫했다.

‘루넬. 나의 오랜 벗이여.’

좀 더 어릴 적. 아직은 정신이 명료했던 크리소르에게서 종종 듣던 말이었다.

그때의 크리소르는 당찼고, 긍지 높았으며, 현명하고 지성이 넘쳤다.

하인들은 그녀를 따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루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격세지감이구나.’

루넬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크리소르에게 다가갔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이만 취침하시지요.”

“음? 아니야. 오늘은 상태가 아주 좋은걸.”

도수가 낮은 와인을 마시며 크리소르가 기분 좋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폐하. 의원도 무리하시지 말라 말했습니다. 지금은 상태가 좋아 보여도, 분명…….”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아무 문제 없어. 불치병이라 했나? 후후……. 아딜로트 그놈만 사라지면 기적처럼 나을지도 모르지.”

“…….”

루넬은 크리소르의 몸이 더는 나아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나아질 거라고 말한 건 요하네스 대신관뿐이었다.

루넬도 잠시 그의 말을 믿었으나, 대신관의 축복을 몇 번이나 받았는데도 크리소르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마 지금 상태가 나아진 것처럼 느끼시는 건…….’

그저 꺼지기 직전의 등불이 더 거세게 타오르는 현상에 불과하리라.

루넬의 마음이 슬픔에 젖어 들었다.

“폐하. 기분이 좋으신 것은 알지만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윽!”

쨍그랑!

루넬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크리소르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루넬의 이마에 내려친 것이다.

“……!”

“건방진 년.”

주변의 다른 시녀들이 다가오려다 움찔하고 애처로운 눈빛만 보내왔다.

유리에 이마가 찢겨 피범벅이 된 루넬은 손짓으로 다른 시녀들을 내보낸 뒤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무셔야 합니다.”

“이제 네가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크리소르가 새되게 웃으며 이죽거렸다.

루넬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꿋꿋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만 쉬셔야 합니다. 대업을 완수하시기 직전이니 더더욱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하.”

크리소르가 짜증스럽게 실소했다.

“흥이 식는구나.”

“폐하…….”

“알겠으니 닥치도록. 조금만 더 있다 가겠다.”

“……예.”

루넬은 피도 닦지 않은 채 크리소르 황태후 옆에 섰다. 루넬 본인도, 크리소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 크리소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업……. 그래, 대업이지. 그 대업이 드디어 끝나는구나.”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크리소르는 무심히 어둠이 깔린 창밖을 응시했다. 루넬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앙상한 뼈마디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녹색 불꽃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여자였다.

그때, 크리소르가 말했다.

“루넬. 너는 내 마음을 알지.”

“…….”

“클라우디오가 아딜로트 그 괘씸한 놈과 사냥을 나갔다가 죽어 돌아오지 않았느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잊을 수 없는 날이지……. 그럴 수는 없는 거였어…….”

크리소르의 녹색 눈에 한에 가까운 울분과 증오가 차올랐다.

“나는 복수해야 해……. 내 아들을 죽인 그 더러운 태생의 살인자에게…….”

“…….”

그 순간 크리소르가 한순간의 화풀이로 죽인 모든 하인들의 얼굴이 루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루넬은 눈을 감고 그것을 외면했다.

“……예. 저는 황태후 폐하만을 따릅니다.”

“후후……. 루넬답구나.”

루넬이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

“음?”

“그럼 만약…… 모든 일이 다 끝나면…… 어찌하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돌아오지 않거나, 폭력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크리소르는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안 그래도 내가 봐 둔 게 있네.”

그 말에 루넬이 반색했다.

“봐 둔 것 말씀이십니까? 혹 여행이나 휴양지라도…….”

루넬은 조금 기대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정말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크리소르는 총기를 잃은 녹색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그래! 듣기로는 소륵의 주술사들이 그렇게들 능통하다지?”

“…….”

루넬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주술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알아본 바가 있네. 뇌제의 눈이 매섭긴 하나 은밀하게 사자 소생의 주술을 시도한 무리가 있다더군! 그들에게 접촉해 볼 생각이야.”

“…….”

“클라우디오는 다시 살아날 거다. 그리고 오르퀘니나의 황제가 될 걸세……. 기뻐해 주게, 루넬!”

“…….”

“그때가 되면 나도 편안히 눈 감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크리소르는 열병에 들뜬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루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모든 게 끝나면 크리소르 님도 다시 행복해질 거야.’

그런 생각으로…….

그때가 되면 다시 예전의 현명하고 긍지 높았던 그녀로 되돌아와 줄 거라는 생각으로 버텨 낸 시간이었는데.

‘아니었다…….’

루넬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듣거라. 루넬. 이 온 나라가 전부 클라우디오의 것이 될 게야. 그 아이는 늘 똑똑했으니 분명 아딜로트보다 잘…….”

하지만 크리소르는 루넬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고 클라우디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모든 일이 끝나도 크리소르 님은 돌아오지 않아…….’

루넬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고, 이마는 지끈거렸지만, 그보다는 심장에 칼이 꽂힌 기분이었다.

집념 끝엔 또 다른 집념이 있고, 그게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다.

‘이제, 그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 주먹에 피가 나도록 움켜쥔 채, 루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걸 끝내 줘…….’

* * *

일주일은 바람보다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초유의 관심사인 국무 회의의 날이 되었다.

전과 달리 크리소르 황태후는 당당하게 국무 회의가 열리는 외제니 홀에 미리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승리자와 같은 여유를 뽐내며 홀에 들어오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 라인하르트 백작. 왔는가?”

“예. 황태후 폐하의 곁을 지켜야지요! 이번 일에 저 역시 사활을 걸었으니 말입니다.”

“잘도 그러시겠군. 백작이 그년의 말에 개처럼 침을 흘리던 것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데 말이오.”

“…….”

라인하르트 백작은 새빨간 얼굴로 물러났다.

곧 성마른 구둣발 소리와 함께 누군가 크리소르 앞에 다가왔다.

“기쁘시겠습니다……. 황태후 폐하.”

“내 오라비와 뜻이 맞은 것 역시 기쁘기 짝이 없소.”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짧게 냉소한 뒤로 자리로 돌아갔다.

크리소르 옆에는 요하네스 자우어 대신관도 함께였다. 그는 약간 불편한 기색이었다.

“대신관. 뭔가 문제라도 있소?”

“아, 아닙니다. 황태후 폐하…….”

“대신관께서는 오르퀘니나의 역적을 몰아낸 주역이시지. 일이 끝나면 내 크게 사례할 테니 기쁘게 받아 주시면 좋겠소.”

“하하…….”

크리소르의 말에도 요하네스 대신관의 안색은 밝아질 줄 몰랐다. 그는 불안하게 외제니의 홀 입구를 흘끗거렸다.

‘아침부터 드미트리가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 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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