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79화 (179/193)

179화

미아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리고 드미트리는 눈앞에 흐르는 신성력을 바로 눈치챘다.

“설마……?”

“와. 역시 진짜 신성력이 있는 사람은 다르구나! 네. 전 대신관의 인장이 찍힌 공증이에요!”

“……!”

충격을 받은 드미트리의 온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그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며 미아가 어째서 지금 이것을 꺼냈는지를 생각했다.

미아가 그간 해 온 일들을 떠올리니 답은 금방 나왔다.

“미아 님은…… 애초부터 이걸 기다린 거군요? 지금처럼 황실과 반목하는 교권은…… 황제에게 방해만 되기 때문에?”

미아는 대답이 없었지만, 드미트리는 그게 긍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

허망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신전은 이제 끝난 거군요…….”

애초에 그렇게 비범한 자가 황족이 아닐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였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의 손에 신전을 무너뜨릴 칼이 쥐어진 것이다.

“…….”

한참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드미트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잘됐다고요?”

미아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예. 부끄러운 말이지만…… 신전이 타락한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니까요.”

“흐음. 그래요?”

“예……. 저는 대신관 후보로서 많은 비리와 부정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대신관이 되어 그걸 바꾸고자 했습니다…….”

드미트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군요. 애초에 바로 나섰어야 했던 거군요. 어쩌면 저는 그냥 비겁하게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흐으으음?”

“그러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음! 듣자 듣자 하니 정말 등신 같은 소리만 하네요!”

“……네?”

예상치 못한 신랄한 말에 드미트리가 멈칫했다.

미아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드미트리 말은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잖아요?”

“아…….”

드미트리가 우물쭈물하다 대답했다.

“하지만 속죄하려면…….”

“멍멍이 소리!”

미아가 버럭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미트리는 그녀가 삿대질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어찌나 손이 매서운지 앞머리가 붕붕 날리는 게 느껴졌으니까.

“속죄는 살아서 하는 거예요! 어디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고 살 궁리도 안 하고 죽을 준비부터 해!?”

“그렇지만 제게는 힘이…….”

“어허! 눈앞에 기회가 있으면 잡을 생각이나 해야지!”

“……!”

드미트리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담긴 의미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기회가…… 있습니까?”

그가 간절하게 물었다.

그러나 미아는 여전히 답답한 듯했다.

“없는 것 같아도 만들어야지! 내 치맛자락 붙잡고 매달려서라도 살아야지!”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당신 혼자 죽는 거 아니잖아! 신도 아니면서 남의 목숨으로 속죄하겠다는 거야, 지금!?”

드미트리가 숨을 들이켰다.

맞다. 신전에는 무수히 많은 신관과 수도사들이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무 죄 없는 어린양들도 있다.

‘드미트리 님. 저희는 드미트리 님이 신전을 더 좋게 이끌어 주시리라 믿어요.’

드미트리에게도 자신을 대신관으로 만들기 위해 믿고 따라와 준 동료 신관들이 있었다.

“…….”

드미트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뭐라고 그들의 목숨을 결정하려고 했지?’

그는 부끄러움에 한참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주먹을 쥐고 입을 열었다.

“……구해 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황제에게 복종하라면 하겠습니다……. 그들을 죽게 둘 수는 없습니다.”

“…….”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미트리는 그 순간 미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고 느꼈다.

늘 달콤하고 온화하던 그녀 주변의 공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진 것이다. 신성력을 가진 자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하는 거 봐서요!”

미아는 언제 화냈냐는 듯이 청량하게 웃고는 드미트리 옆에 앉았다.

잠시 바람이 드미트리와 미아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선 정원에서는 찌르레기가 우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이러고 있으니 어쩐지 세상에 단둘뿐인 것 같구나.’

드미트리의 심장이 까닭 모르게 빨리 뛰기 시작한 순간, 미아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폐하는 신전을 처리할 구실을 얻었어요.”

“예? 아. 예……. 맞습니다.”

“사실 우리 폐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장 전부 모가지를 쳐도 아깝지 않지만, 죄 없는 사람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아요.”

드미트리가 멈칫했다.

“그건…… 폐하의 뜻입니까?”

“제 뜻이지만 아마 폐하의 뜻도 같을 거예요.”

“아…….”

드미트리는 이유 모를 실망감을 느끼며 침음성을 흘렸다. 미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드미트리는 ‘신전 내부의 적’이 되어서 폐하를 지지해 줘요. 그 대신, 이쪽은 드미트리가 말하는 ‘비리 신관’만 싹 골라서 쳐 줄게요.”

“…….”

“어차피 차기 대신관은 당신이잖아요? 하지만 신전 내 고위 세력이 드미트리의 ‘혁명’을 좋게 볼 리 없죠. 그걸 우리가 치워 주는 거예요!”

“하지만…….”

“말해 두지만 거절하는 순간 신관은 가리지 않고 몰살당할 거예요. 우리 폐하는 대드는 사람은 안 살려 두는 거 알죠?”

“…….”

“다음 국무 회의에서 드미트리가 뭘 해야 할지는 알 거라 믿고요.”

드미트리가 침묵하는 사이 미아가 드미트리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의 귓가에 어린아이처럼 맑고 천진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드미트리는 나한테 협박당하고 있는 거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경쾌한 음성과 달리 신랄하고 냉혹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너무나 명백하게 그에게 면죄부까지 주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허망한 낯으로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당신은…… 악마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여신께서 제게 보낸 사자인가요?”

그의 말에 상대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장난기 서린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그 가설이 필요하지 않아서요.”

* * *

연기된 국무 회의.

다른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자진해야 하는 처지인 황제 아딜로트.

……그리고 그의 애완동물.

“……뭐라고요?”

국무 회의에서의 소식을 들은 렌나 그리말디는 귀를 의심했다.

소식을 알려 준 건 오리존 아카데미 선배이자 황립 의료원의 동료인 엠브라 테타였다.

“말한 대로야. 황제 폐하께서 슈뢰더 황가의 적통이 아니라고 신관이 주장했어.”

“―그럴 리가 없어요!”

렌나가 버럭 외쳤다가 자신의 입을 막았다. 엠브라는 렌나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눈치챈 듯했다.

“나도 알아! 부모님이 말씀해 주셨으니까. 의원들이 황제의 합방일까지 적어 놓는 마당에, 설마 그걸 모를까?”

그녀가 스스럼없이 한 말에 렌나는 뛸 듯이 놀랐다.

“부모님이요? 하지만 엠브라 선배는 분명 시골 농부의 딸이었다고…….”

“그건 거짓말! 우리 부모님도 황립 의료원의 의원이셨어.”

엠브라가 담담히 덧붙였다.

“그리고 황태후 폐하에게 살해당했지. 나는 그 복수를 하려고 황궁에 들어온 거야.”

“……!”

충격적인 진실에 렌나가 눈을 홉떴다.

‘마치 나와 같은…….’

다만 자신은 황태후를 막기 위해 황궁에 들어온 것이고, 엠브라는 황태후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궁에 들어왔다는 점만 달랐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을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저번의 루비트 용액 사건은…….”

“맞아. 내가 황태후를 독살하려고 했어. 아주 서서히!”

앙! 하고 장난스럽게 손톱을 보인 엠브라는 혼자 웃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들켰지.”

“…….”

“그땐 정말로 죽을 줄 알았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엠브라의 말끝이 흐려졌다. 죽음을 이야기하는데도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더 온화해졌다.

“미아 아가씨가 살려 주셨어.”

그 이후의 일은 렌나 역시 같이 보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미아는 루비트 용액의 해독제인 안티루이 용액까지 직접 마셔 가며, 정말 몸을 던져 엠브라를 구해 냈다.

황립 의료원의 모두가 놀라고, 경탄했던 기억이 났다.

엠브라 역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진짜 웃기는 귀족 아니니? 누가 자기 몸까지 던져 가며 그렇게 남을 살리려 들어? 의원도 아니면서!”

시원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원도 아니면서.”

“…….”

그런 엠브라를 렌나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엠브라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일지 렌나는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원이 사람을 해칠 때, 그 모순은 명백히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렌나야……. 의원은 사람을 살려야 의원이야……. 그걸 모른 척 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온단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고통처럼 말이다.

엠브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후배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는 누굴 해치려고 한 적 없어. 특별히 내가 착해져서가 아니라, 그냥 아가씨를 보니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더라고.”

“……알아요. 믿어요.”

렌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당차게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앞에 나서서 피하라고 눈짓했던 미아가 떠올랐다.

“미아 아가씨는…… 죽나요?”

렌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엠브라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하, 하지만 영리한 분이니 분명 대책을…….”

“이번엔 아니야. 아닌 것 같았어.”

“…….”

본 적 없는 엠브라의 어두운 얼굴에 렌나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미아 아가씨가…… 죽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