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77화 (177/193)

177화

한마디로 구사일생이었다.

“…….”

“…….”

“…….”

미아와 아딜로트, 그리고 그들의 편을 들었던 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황제의 집무실에 둘러앉았다.

그들은 모두 목에 칼이 들어왔다가 물러난 기분으로 멍하니 앉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아. 배고파!”

그 사이에서 미아만이 누가 치즈 케이크와 바닐라 무스를 흡입하며 우물거렸다.

‘다 생각대로 풀리긴 했는데 너무 긴장해서인지 피곤하네.’

너무 오래 익힌 빵처럼 늘어진 그녀는 흐물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고, 보다 못한 아딜로트가 미아를 끌어와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미아는 잠깐 움찔했으나 이내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안경을 벗고 내내 미간을 문지르던 요아힘은 그제야 겨우 한마디 했다.

“일단…… 미아 님은 틀림없이 미치광이의 별 아래서 태어나셨을 겁니다.”

“그런 별도 있어요?”

“없습니다.”

“아……. 미쳤냐고 돌려 말한 거구나!”

미아가 재밌다는 듯이 까르륵 웃었다.

그 모습에 요아힘은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발 다 예상하고 하신 행동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예상했어요!”

“그리고 설마 여기까지 와서 대책이 없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있죠, 당연히!”

“하아…….”

“후우우…….”

“나 원 참……!”

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 가판대에 목이 올라간 당사자인 아딜로트와 페르디안뿐이었다.

“죽으면 죽는 거지.”

“…….”

아딜로트가 무심하고 태연하게 말했고, 페르디안은 침묵으로 그에게 동조했다.

미아는 요아힘에게 ‘진짜 미친놈들은 얘네들 아니에요?’ 하는 시선을 보낸 뒤 몽블랑치오로 포크를 옮겼다.

“설마 크라우스 공작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습니까?”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온 듯한 요아힘이 물었다.

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볼에 케이크를 욱여넣었다.

“네. 저한테 비료 기술을 빼앗겼으니 배가 좀 아플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녀가 말하면서 포크를 슬슬 흔들었다.

“크라우스 공작가는 비료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었으니, 폭약을 만드는 기술을 알려 주면 그것도 가장 수월하게 활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시장을 먼저 선점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참 좋았겠지만…….”

요아힘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면 제가 그렇게 반응하진 않았을 테죠.”

“그랬겠죠?”

미아가 새실새실 웃었다.

미아는 크라우스 공작이 황제파 인물 중에서 가장 예의주시하는 것이 요아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라도 그럴 거야. 아딜로트 주변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냉정한 사람이 요아힘이니까.’

그런 요아힘이 당황한다는 것이야말로, 황제파가 궁지에 몰렸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터.

……라고, 크라우스 공작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야 황제 목을 건 데스매치를 사전 합의도 없이 진행하진 않을 테니까.’

보통은 그렇겠지. 보통은.

‘문제는 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거고.’

미아가 무화과 케이크가 올라간 접시를 당겨 오며 채 쌕 웃었다.

“대청소는 한 번에 하는 게 낫잖아요?”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미아가 생각했다.

‘물론 크라우스 공작만을 끌어내기 위한 건 아니었지만, 그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하지만 요아힘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너무 무모했습니다. 정말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건 재상 말이 맞네. 자네 대체 뭘 먹고 컸길래 그리 뻔뻔하고 대범한 겐가? 어딜 그렇게 덥석덥석 내기해?”

“저도…… 이런 일은 더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지로티 공작에 슐츠 공작까지 가세했다.

“그치만 그 정도는 해야 크라우스 공작이 나올 것 같아서……. 그리고 이 방법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방안은 있었어요!”

“다른 방안이요?”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예전에 세크레 호수에 빠졌던 거 기억하시죠? 최근에 한 번 더 빠질 일이 있었는데…….”

“네? 언제 말씀이신가요?”

제인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아딜로트는 역시나 비밀정보부원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는지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저 마뜩잖다는 듯이 고개를 반대로 돌릴 뿐.

“정보원을 만난 날 말이지.”

“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제가 그때 뭘 본 거 같아요! 요 정도 크기의 직육면체 상자인데…….”

이어진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아딜로트가 루드비히 선황제와 레아 황비의 소생이라는 것을 인정한 공증 서류는 금속으로 된 상자에 담겨 있었다.

겉에는 양각으로 백합이 새겨져 있었고, 보통의 상자와 달리 서류를 담기 위해 가로로 길쭉한 모양이었다.

상자와 서류 그 자체에도 온갖 마법이 걸려 있던 덕에 공증 서류는 마치 새것처럼 깨끗했다.

루드비히의 서명과 당대 대신관의 인장도 확실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미아는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나온 설명을 그대로 읊었다.

“……!”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제인이었다.

그녀는 미아가 상자에 관해 설명할 때부터 살짝 얼굴을 굳히더니,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아예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기까지 했다.

“……미아 님. 그게…… 지금 어디 있다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제인이 물었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에 피어나는 간절함을 보며 미아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레아 황비의 시녀로서 책임을 많이 느꼈겠지.’

미아는 그런 제인에게 다정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세크레 호수 밑바닥이요.”

그 책임, 이젠 안 져도 될 거예요.

* * *

한 시간 뒤, 세크레 호수.

보안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한 그곳에서, 제인을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아……. 아아……! 황비 전하……!”

그녀는 상자를 건져 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한이 맺힌 울음소리였다.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던 제인은, 슬픔과 기쁨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것을 아딜로트에게 바쳤다.

“폐하……. 황비 전하의 유품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어, 이 제인……. 여한이 없습니다.”

“…….”

아딜로트는 묘한 얼굴을 하고서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눈으로 조용히 상자를 열었다.

달칵.

상자 안에는 금줄로 묶은 서류 한 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초상화 하나가 있었다.

땋아서 뒤로 올린 은발. 다정한 눈매. 온화한 미소.

레아 황비의 초상화였다.

“…….”

그것을 본 순간 아딜로트의 눈이 흔들렸다.

아딜로트는 서류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서 레아 황비의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작은 중얼거림이 바로 곁에 있던 미아에게 들려왔다.

“…….”

미아는 옆에서 가만히 아딜로트를 지켜보았다.

늘 담담한 아딜로트지만, 지금은 어쩐지 감정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변이 있던 날, 공증 서류를 찾지 못한 분풀이로 크리소르는 레아 황비의 초상화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그러니 아딜로트는 레아 황비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몇 번이고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돌려 미아를 바라보았다.

아딜로트는 울지도, 눈을 적시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 미아는 느낄 수 있었다.

아딜로트의 마음속 어딘가에 꽉꽉 묶여 있던 매듭 하나가 풀렸다는 것을.

아딜로트가 느리게 말했다.

“고마워.”

“…….”

미아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미사여구를 곁들이지 않은 진솔하고 담백한 감사가 어쩐지 그녀의 가슴에 콱 박혔다.

왜인지 자신이 울고 싶어졌다.

미아의 떨리는 눈과 달아오르는 뺨, 울상이 되어 가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딜로트는 낮게 웃었다.

“나중에 제대로…….”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주변을 의식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상자를 슐츠 공작에게 넘겼다.

“확인해 봐.”

“예.”

기다렸다는 듯이 슐츠 공작과 요아힘이 서류에 달라붙었고, 아딜로트는 그들을 남겨두고 홀로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아……”

“놔두게. 속이 복잡할 테니.”

따라가야 하나 하고 있던 미아를 지로티 공작이 만류했다.

미아는 호숫가를 느리게 걷는 아딜로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서류로 주의를 돌렸다.

그들은 얼마 뒤 탄식을 흘렸다.

“육안으로 봤을 땐 진품이 확실합니다.”

“종이, 국새, 서명, 인장……. 어느 부분을 봐도 위조의 흔적이 없군요. 이게 위품이라면 만든이를 잡아다가 평생 일을 시켜야 할 정도입니다.”

말을 마친 요아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허망함과 얼떨떨함이 느껴지는 탄식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려 서류를 보았다가, 이번엔 허탈한 얼굴로 미아를 돌아보았다.

“미아 님……. 혹시 여신이 보낸 사자라도 되십니까?”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문득 손가락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제 손을 바라보았다.

레아 황비의 반지가 아직도 끼워져 있었다.

“…….”

미아가 고개를 들고 쌕 웃었다.

“그냥 착하게 살아서 보답받은 게 아닐까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으나 요아힘은 대답할 기력이 없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딜로트의 즉위 전과 즉위 후.

그들이 수년간 찾아 헤맸던 공증 서류가 이렇게 쉽게 발견된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 모가지는 안심이라는 거군!”

얼떨떨한 모두 대신 지로티 공작이 크게 외쳤다. 그는 신이 났는지 허리춤을 더듬다가 술병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상하구만! 이렇게 대신관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 있는데, 왜 요하네스 대신관의 명제 증명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지?”

그 말에 아직도 멍해 있던 요아힘이 뒤늦게 연둣빛 눈을 빛냈다.

“그거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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