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럼, 여신께 기도를…….”
요하네스 대신관은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 지팡이를 들고 눈을 감았다.
“드높은 곳의 여신이시여……. 요하네스 자우어의 이름을 걸고, 방금 저 아이가 한 말에 거짓이 있다면 당신의 종에게 계시를 내려 주소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조용하게 흘러갔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아는 요하네스 대신관이 신성력을 잃었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지만, 귀족들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진짜다.’
‘진짜로 저런 기술을 알고 있는 거야.’
‘그런 게 있다면 마법사나 기사를 힘들게 길러내지 않아도 돼!’
‘영지전이 뭐야? 대국인 소륵까지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아는 조용해진 홀을 둘러보다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놀라운 가운데 그녀는 처연하게 눈물을 떨궜다.
“제발, 일주일만 다시 시간을 주세요…….”
귀족들의 눈이 미아를 훑었다.
20대의 어린 여자애.
이런 자리에 화려한 치장까지 하고 올 정도로 오만하고 생각이 없는 여자애.
머리가 비상하여 사람들이 깜짝 놀라 정도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지만, 치기 어리고 다루기 쉬운, 한낱 백작가 영애.
“그걸로 안 되면, 다른 것도 더 풀 테니까…….”
그런 그녀가 무릎까지 꿇고서 히끅대고 있었다.
황제는 그것이 못마땅한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였으나, 제 애완동물이 하는 짓을 막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고요한 눈으로 미아를 지켜보았을 뿐이다.
이윽고 귀족들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가며 웃기 시작했다.
“……뭐. 괜찮지 않겠습니까? 뭐든 한 번 더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맞습니다. 뭐,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는 듯한데……. 시간을 주죠?”
“그래요, 그래. 저렇게까지 원하는데.”
흐름이 달라진 대화를 들으며 크리소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뭣들 하는 게야! 내 아들의 복수가 코앞인데 그깟 기술에 눈이 멀어!? 이 머저리 같은 놈들……!”
“허허. 외제니의 홀이 생각보다 목소리가 잘 울리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방음을 좀 더 해야 하나…….”
아무리 외쳐도 귀족들은 딴청만 부렸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미아가 내놓을 기술로 뭘 어떻게 할지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태도에 크리소르는 귀신 들린 사람처럼 욕하기 시작했다.
“개잡놈들! 천하의 금수 같은 놈들! 어서 이 어처구니없는……!”
그리고 그 순간, 지금껏 들린 적 없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수 없는 일이군요. 유예를 주는 수밖에……. 그러한 기술이 있다면 오르퀘니나가 앞으로의 전쟁에 있어 독보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이었다.
“……그러니 국가를 위해, 일주일의 유예 정도는 괜찮겠지요.”
그의 점잖지만 은근한 탐욕이 서린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 때문이 아니라,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드디어 끌어냈다.’
애초부터 미아의 목적은 크라우스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한 사람이고, 라쉬트 평야의 일로 더더욱 몸을 사리려 할 터였다.
‘그러니 이 정도 미끼는 던져 줘야 했지.’
그게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이제 크라우스 공작은 상황이 뒤집히는 순간, ‘감히 황제를 능멸하려 했다’는 죄목에서 절대 발을 뺄 수 없다.
“크라우스 공작!”
크리소르 황태후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진정하십시오. 황태후 폐하……. 그런다고 대신관의 ‘명제 증명’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그걸 끝내 놓고 기회를 준다니! 그딴 멍청한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이야!”
분노를 내뿜는 크리소르를 보며 크라우스 공작은 오연히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어차피 모든 게 끝났습니다. 저들도 신변 정리를 할 시간은 있어야지요.”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거짓된 명분으로 황위에 올랐으니 두고 내려올 게 많을 게 아닙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슐츠 공. 진행하는 게 어떻겠소?”
“예? 아…….”
크라우스 공작의 물음에 궁내관이자 국무 회의를 주도하는 슐츠 공작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럼…… 국무 회의를 일주일 뒤로 연기하는 것에 찬성하는 분들은 거수해 주십시오.”
슐츠 공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들이 앞다투어 손을 올렸다.
“이 천박한 것들……! 개돼지 같은 놈들! 육시를 해서 진창에 처박을 놈들!”
크리소르가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질렀지만 소용없었다. 더러는 노골적으로 하품을 하기도 했다.
‘에이, 아줌마가 시끄럽게시리.’
‘뒤진 클라우디오의 복수 따위 알 게 뭐야? 산 사람이 더 잘 사는 게 중요한 거지.’
‘황태후 저건 아직도 저러고 있네. 적당히 좀 할 것이지.’
황태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귀족들은 클라우디오의 복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미아 셀레스티얼이 꺼내 놓을 그 엄청난 기술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 와중에 요하네스 대신관이 슬쩍 손을 들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손을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반대하는 이는 크리소르와 듀레인 남작, 그리고 일부 골수 황태후 파 귀족들뿐이었다.
그마저 아주 소수에 불과했으며, 크리소르는 애초에 국무 회의에서 의석이 없는 상태였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이었다.
“그럼 일주일 뒤, 같은 시간에, 외제니의 홀에서…… 다시 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차마 ‘황제 폐위 안건’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슐츠 공작이 흐린 눈으로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탁자 위의 종을 울렸다.
뎅―.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란으로 가득했던 국무 회의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 * *
귀족들이 삼삼오오 외제니의 홀을 나섰다.
물러나는 인파 속에서 크리소르는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폐하. 진정을…….”
옆에서 측근 시녀인 루넬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크리소르는 그녀를 뿌리쳤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크리소르는 실핏줄이 돋아난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어느새 상석에서 내려와 미아 셀레스티얼을 일으키고 있었다.
“생각이 있어 보여서 참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그치만…….”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미아에게 뭔가를 말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마저 크리소르에게는 가증스럽게 보였다.
‘내 아들을 죽여 놓고 뻔뻔하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 순간, 크리소르의 시야가 핑 돌았다.
“큭…….”
“크리소르 님!”
갑작스럽게 크리소르가 비틀거렸다. 루넬이 창백하게 질린 채 그녀를 부축했다.
“어서 황태후 궁으로 돌아가시죠. 몸이 이렇게나 안 좋으신데…….”
“집어치워……!”
노기 서린 목소리와 달리 그녀는 루넬을 뿌리치지 못했다.
“황태후 폐하…….”
그 모습에 옆에서 서성이던 라인하르트 백작이 슬금슬금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크리소르의 녹색 눈이 희번덕거리며 라인하르트 백작으로 향했다.
“하……! 다 된 일을 망쳐 놓고 내 앞에서 뻔뻔하게 입을 열어……!?”
그는 찔끔하고서 손을 내저었다.
“어, 어차피 명제 증명으로 황제가 슈뢰더 적통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지지 않았습니까! 한 주가 미뤄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큼!”
요하네스 대신관이 움찔하고서 헛기침했다.
크리소르는 요하네스 대신관까지 노려보았다. 그가 미아의 말을 검증해 주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제 잘못을 알았는지 요하네스는 시선을 피했다.
“…….”
한참을 그렇게 씨근거리던 크리소르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어차피 이미 다 밝혀진 마당이니…….”
“마, 맞습니다! 이제 황제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만 고민하시면 됩니다! 일주일로도 부족하지요. 암요!”
라인하르트 백작이 부랴부랴 찬동했다.
간사한 혀 놀림에 크리소르는 경멸을 느끼면서도 차분히 심호흡했다.
‘틀린 말은 없다. 눈앞에서 내 아들의 원수를 놓쳤을 뿐.’
그녀는 아딜로트를 노려보다, 그 옆의 미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성큼성큼 미아에게 다가섰다.
“……아!”
“네년.”
크리소르가 거칠게 미아의 손목을 잡아끌고서 속삭였다.
“네년을 몇 조각으로 찢어 줄지 기대되는구나.”
낮고 음산한 목소리에 미아는 파드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증스러운 년.’
크리소르는 그런 미아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휙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미아를 지나치려 했던 그 순간.
“자기 말만 하고 가기야?”
미아가 크리소르를 홱 붙들었다.
“……!”
흠칫한 크리소르가 돌아보았을 때, 미아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 반대야. 당신 방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의를 연기하자는 걸 막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걸?”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크리소르가 그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몸을 휙 돌려 황제에게로 걸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