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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69화 (169/193)

169화

바루스 그리말디.

황립 의료원의 전 의원.

황태후의 명령으로 극독을 제조한 사람이자, 클라우디오 황태자를 부검한 의원.

‘그리고 렌나 그리말디의 아버지.’

율리시즈를 통해 그 정보를 얻은 미아는 바로 다음 날 엠브라를 찾아갔다.

사실을 털어놓자 엠브라는 머리털 끝까지 바짝 곤두설 정도로 놀랐다.

“렌나가 그리말디라고요!?”

너무 격한 반응에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명해요?”

“유명하다마다요!”

엠브라는 약간 질린 얼굴로 속사포처럼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가 정말 욕을 많이 했거든요! 황태후의 앞잡이라고. 온갖 인체 실험에, 극독에……. 의학의 발전을 위한다는 미명으로 별짓을 다 했다던데요!”

“어…….”

생각보다 심각한데? 미아가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엠브라 역시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렌나의 원래 성이 그리말디였다니……. 그러면 그 약의 해독법을 알았던 것도 이해가 가네요. 왜 그렇게 똑똑했는지도…….”

“네. 그리고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죽었을 때 그를 부검한 게 렌나의 아버지라고 하더라고요.”

“……!”

잠시 크게 놀란 엠브라는 이내 착잡한 눈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를 찾으시려고요? 황제 폐하의 누명을 벗겨 주기 위해서?”

“네.”

순순히 대답하는 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엠브라가 툭 던지듯 물었다.

“아가씨는…… 폐하를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네?”

“그렇잖아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인데. 지금이야 폐하가 아가씨에게 잘해 주시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잖아요.”

엠브라의 말에 미아는 동그란 눈을 삼박였다.

잠시 머릿속에서 과거의 삶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걸 잘 풀어서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미아는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얼굴?”

“허어…….”

엠브라는 뭔가 더 있다는 것은 눈치챈 모양이지만 더는 묻지 않고서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 미용수라도 선물해야겠네요……. 미모가 퇴색해서 아가씨 같은 행운의 여신을 놓치면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아딜 미모는 퇴색 안 해요. 영구불멸이야.”

“네에, 네에. 팔불출 같은 말 잘 들었습니다!”

미아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륵 웃었다. 그 모습에 장난스럽게 답한 엠브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렌나를 만나 보실 거죠?”

“응. 부탁해요.”

얼마 안 있어 엠브라가 렌나를 유리 정원으로 데리고 나왔다. 렌나는 또 야근했는지 눈 밑이 시커먼 상태였다.

“……부르셨어요?”

미아를 발견한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왜 불렀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렌나.”

“네. 미아 아가씨…….”

미아가 렌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그저 테레지아 카르디날레가 날뛸 때 그녀를 도와주었을 뿐이다.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한 인연이 여기까지 오다니.

미아가 빙긋 웃었다.

“거두절미하고 물을게요. 렌나의 원래 성은 그리말디고, 렌나의 아버지가 바루스 그리말디죠?”

“……!”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렌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까 봐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마음의 준비를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사람처럼 두 손을 벌벌 떨었다.

“……네. 맞아요. 제 이름은 렌나 피오렛이 아니라 렌나 그리말디예요…….”

“그 독약의 해독법은 아버지에게 배운 건가요?”

미아의 질문에 정곡을 찔렸는지 렌나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네……. 하, 하지만 믿어 주세요! 아버지는 궁을 나선 이후론 다시는 그런 일에 손대지 않으셨어요!”

허겁지겁 말하던 렌나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서렸다.

“제게 해독법을 알려 주신 것도, 제가 황립 의료원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그걸’ 발견하면…… 자기 죄가 더 큰 죄를 낳지 않게끔 해 달라시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바루스 그리말디가 황립 의료원에서 했던 일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미아는 솔직히 말해서 바루스 그리말디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그의 죄가 덜어지는 게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죄책감은 이용하기 좋지.’

미아가 부드럽게 렌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크고 둥근 눈에 안타까움을 한껏 담고서 물었다.

“렌나. 혹시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줄 순 없어요?”

“……안 돼요!”

그 말에 렌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버지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으셨어요……! 물론, 그걸로 죄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 그래도……!”

“죄를 추궁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더 열심히 살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렌나. 나는 렌나의 아버지가 클라우디오 황태자를 부검했다는 걸 알아요.”

“……!”

렌나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지금 황제 폐하는 클라우디오 황태자를 죽여서 황위에 올랐다는 누명을 쓰고 있죠.”

“…….”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렌나의 아버지는 알고 있잖아요?”

“그, 그렇지만……!”

“폐하도 완벽한 분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분은 노력하고 계세요. 더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요.”

“……!”

“폐하를 도와주면 안 될까요?”

미아의 말이 끝나자 렌나의 얼굴이 시시각각 바뀌어 갔다.

“……죄송해요!”

그리고 그녀는 이내 절규 같은 한마디를 남긴 채 도망쳐 버렸다.

“렌나!”

엠브라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미아가 그녀를 말렸다.

“괜찮아요! 내버려 둬도 돼요!”

“네? 하지만…….”

“당장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어요! 일단 미끼는 던져 놨으니까 물길 기다려야죠.”

“미끼라뇨?”

미아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때, 렌나는 무시할 수 있는데도 굳이 해독제의 제조법을 알려 줬어.’

누군가가 죽는 걸 외면하진 못하는 성정이란 뜻이다.

‘그런 과거에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더하겠지. 아버지가 평생을 죄책감에 고통받았댔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지금 황태후의 주치의다. 아마 황태후 곁에서 그녀를 막으며 자신의 아버지가 한 일을 대신 속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미아는 렌나에게 악인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거부감 정도는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미아가 할 일은 간단했다.

‘외면했다간 두고두고 평생 후회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주면 그만이지.’

미아가 쌕 웃었다.

“나중에 알아서 찾아오게 될 거예요.”

* * *

혼자 남은 렌나는 급하게 휴가를 쓰고 수도 근교의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차를 두 번을 더 갈아타고 아주 깊은 숲으로 향했다.

그 숲에 있는 작고 낡은 오두막. 그곳이 렌나의 집이었다.

“아버지…….”

“렌나……?”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던 중년은 걸어 들어오는 렌나를 보고는 허리를 들었다.

그는 나이를 알 수 없고, 헝클어진 백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남자였다.

움츠러든 어깨와 앙상한 뼈마디.

렌나가 울컥했다.

그런 렌나를 보고 그녀의 아버지, 바루스 그리말디는 도끼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렌나, 무슨 일이니? 설마 황태후 폐하가 네 정체를 눈치라도…….”

렌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요…….”

“…….”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바루스 그리말디는 그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들어오거라. 오랜만이잖니.”

렌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가구는 낡았으며 단출했다. 늘 주기적으로 이사하며 남들의 시선을 피해 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황태후도, 크라우스 공작도 그들을 찾지 않았지만, 렌나와 바루스는 숨어 지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바루스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는 황태후의 명령으로 독을 제조하고, 그걸 사람에게 실험하고, 의학을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해선 안 될 짓도 했다.

그는 뒤늦게 그걸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조용한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렌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아버지.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죽었을 때 말이에요…….”

렌나의 말에 바루스가 흠칫했다. 그는 손을 떨다가 찻잔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괜찮으세요?”

“……그건 왜 물어보느냐?”

“아…….”

되묻는 그의 말에 렌나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때…… 아딜로트 황제 폐하께서 더 위중한 상황이었다고 하셨죠?”

“……그랬지.”

바루스는 입술을 깨물고서 과거를 떠올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지 않는다! 상황을 모르니 의원이 따라나서도록!’

긴박한 상황이었다. 황태후는 체면도 잊은 채 미친 사람처럼 기사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어서 내 아들을 데려와! 비가 이렇게 오는데! 그 어린것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그녀의 가장 신임받는 의원인 바루스 그리말디는 기사단을 따라 황태자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숲에서 죽은 클라우디오 황태자와 죽어 가는 아딜로트 황자를 발견했다.

‘의원! 진료를!’

몸싸움이 있었는지 둘 다 몸에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오 황태자는 상대적으로 깨끗한 반면, 아딜로트 황자는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온몸이 많이 다친 상태였다.

정작 죽어 있는 건 클라우디오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은 바로 궁으로 옮겨졌다.

황태후는 아들의 시신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클라우디오! 내 아가! 아가!’

금수가 울부짖는 듯한 절규 끝에 황태후의 노한 시선이 향한 곳은 아딜로트였다.

‘저것이 내 아들을 죽였어! 저 악마 같은 게!’

때마침 등장한 키토 후작이 아딜로트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황태후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황태후는 아딜로트를 죽여서 아들의 원수를 갚지 못함에 통곡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바루스 그리말디는 해선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외람되오나 황태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는 빗물에 발이 미끄러져 뇌출혈로 사망하신 듯합니다. 아딜로트 황자 전하와는 거리가 있었고, 또 무기도…….’

그 순간, 크리소르의 귀기 어린 시선이 바루스에게 와닿았다.

‘네가 지금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구나.’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바루스 그리말디는 재빨리 태세를 바꿨다.

‘아,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선황제 루드비히가 죽고 어린 황태자만이 남은 상황.

황태후의 수렴청정으로 그녀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그러니 바루스는 거기서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래야 했지만…….

‘이게…… 뭡니까?’

‘클라우디오 황태자 전하께서 살해당하신 상황을 조서로 작성 중이다.’

‘예? 황태자 전하께서는 뇌출혈로…….’

‘입 닥쳐.’

‘……!’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 그냥 하란 대로 해.’

‘…….’

의원으로서의 양심이 그때 꿈틀거렸다. 그리고 바루스는 그대로 도망쳤다.

바루스가 도망치자 황태후는 기사와 암살자를 풀어 그를 쫓기 시작했다.

황태후의 분노가 자신을 향하자, 그제야 그동안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한 행동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바루스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도망자로 살아왔다.

“너만은 그런 길을 걷지 않길 바란다, 렌나야……. 의원은 사람을 살려야 의원이야……. 그걸 모른 척 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온단다…….”

“…….”

바루스 그리말디는 중얼거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렌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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