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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67화 (167/193)

167화

“네?”

루넬이 흠칫했다.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기분이 나쁘다뇨!”

세레니티가 활짝 웃었다.

“그건 루넬 씨 기준으로 극상의 칭찬이잖아요. 감사해요!”

“…….”

루넬은 다시 멍하니 세레니티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적에게도 저렇게 순수하게 기쁨을 표하는가.’

게다가 세레니티는 크리소르를 모시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했다.

기쁘다는 듯이 뺨을 붉게 물들인 그녀를 보며, 별수 없이 루넬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한번, 후계자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세레니티가 멈칫했다. 루넬의 인사에 담긴 진심을 눈치챈 그녀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예.”

루넬은 그대로 세레니티와 헤어져 황태후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세레니티가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자신 없던 전과 달리 당당한 등이었다.

지금의 세레니티에게서는 예전의 크리소르처럼 겹쳐 보였다.

당당하고, 매력적이고, 지금처럼 미치지 않았던 그 시절의 크리소르 말이다.

“…….”

루넬의 눈이 가라앉았다.

크리소르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잘못된 방향으로 울분을 토하고 있다는 것은 루넬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마저 등을 돌리면 그녀에겐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성심성의껏 크리소르를 돌봐왔다.

그리고 그녀가 하루빨리 클라우디오의 죽음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게 내가 바라던 걸까?’

크리소르는 점점 더 미쳐 가고 있고, 동시에 죽어 가고 있었다.

“…….”

루넬은 거기까지 생각한 뒤 흠칫하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루넬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고요하던 마음에는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 * *

“꼴이 우습게 되었군.”

황태후 크리소르는 찻잔을 든 채 비웃음을 흘렸다.

“…….”

그런 그녀의 태도에도 맞은편에 앉은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크라우스 공작가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허세라는 걸 아는 크리소르는 재차 냉소했다.

“가신이 반이나 줄었다지요? 심지어 황제가 크라우스 공작가의 기술을 공표해서 계속 세가 줄고 있다고 하던데.”

“…….”

“그 모든 게 전부 황제의 애완동물이 내놓은 계책이라던데……. 새파랗게 어린 꼬마에게 당한 기분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내내 차분하던 크라우스 공작의 눈에 예기가 감돌았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아 셀레스티얼을 쳐야겠습니다.”

“당연하지. 물론, 황제가 먼저요.”

크리소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답했다.

“늘 시도는 하고 있지만, 지독히도 보호받고 있는 모양이오. ‘율리시즈’에게 의뢰했는데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정원 쪽을 흘낏거렸다. 덩치가 큰 정원사 한 명이 멍하니 분홍색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시즈의 암살자인가.’

크리소르의 태도로 정원사의 정체를 미루어 짐작한 크라우스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의 소문을 부풀려야겠습니다. 이번 일에 크라우스 공작가도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지요.”

크리소르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생각했소. 드디어 그 악마를 제대로 물 먹일 때가 온 게야.”

“…….”

“알지요, 크라우스 공작? 내 한을. 황제를 죽이고 싶습니다. 내 아들을 죽이고도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그 악마를요!”

녹색 눈이 번들거렸다.

크라우스 공작은 그런 크리소르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 크리소르의 아들인 클라우디오 황태자의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아딜로트와 몸싸움을 하긴 한 모양이나, 당시 상태가 위중했던 건 도리어 아딜로트 쪽이었다.

‘의원도…… 그렇게 말했지.’

크라우스 공작은 당시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립 의료원의 의원 한 명이 클라우디오 황태자의 부검을 맡았다.

그는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지원하는 인재였다. 적어도 그를 속일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겁이 많은 자이긴 했지만.

‘화, 황태자 전하의 사인은 뇌출혈입니다…….’

‘그럴 리 없다! 아딜로트 저 악마 같은 종자가 내 아들을 죽인 게야!’

‘하, 하지만 부검 결과가…….’

‘지금 날 능멸하려는 게야! 저 악마가! 내 아들을 죽였단 말이다!!’

당시 크리소르는 미쳐 날뛰다 못해 의원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의원은 그녀가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한발 앞서 도망쳤다.

‘그러곤 그대로 잡지 못했던가. 그 독약을 만든 것도 그인데 꽤 아쉬운 일이었지.’

어쨌든 과거는 과거.

상념을 마친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크리소르를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이제 그만 이 지루한 싸움의 끝을 보지요.”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들으며, 율리시즈는 눈앞의 분홍색 꽃을 바라보았다.

‘미아 님…….’

* * *

그날 밤, 미아는 아딜로트가 깊게 잠들자 눈을 번쩍 떴다.

‘아딜은 이상하게 내 옆에서는 잘만 잔단 말야.’

미아는 잠든 아딜로트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준 뒤 조용히 황제궁을 나왔다.

궁인들도 대부분 잠든 시간.

미아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제인에게 들키면 크게 혼나겠지만 말이다.

요즘 제인은 어찌나 미아를 싸고돌던지, 그녀가 재채기만 해도 이불로 돌돌 말아 앉히고는 죽을 먹이고는 했다.

달걀말이가 된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으나 오늘은 아딜로트 몰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흐흐흠~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아가 향한 곳은 황궁 구석에 있는 세크레 호수였다.

달빛이 드리워진 호수는 맑고 투명했다. 마법으로 물을 정수하고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야유회 때 상자가…… 분명 이쯤이던가.’

적당한 위치에 다다르자 미아는 벨벳 신을 벗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자,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네글리제를 흩뜨렸다.

‘보고 있으려나?’

다소의 시간이 흐른 뒤, 미아는 천천히 호숫물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닥이 훅 꺼졌고, 미아는 미끄러지듯 호숫물에 빠져 버렸다.

“웁…….”

미아는 물에 빠진 채 숨을 꾹 참았다. 여기서 혼자 빠져나와 버리면 모든 게 허사였다.

‘숨이……!’

그리고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을 지경에 다다르자, 미아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물이 코와 목으로 덤벼들었다.

얼굴이 불타오르는 듯한 감각 속에서, 그 순간 뭔가가 미아의 겨드랑이 밑으로 쑥 파고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온몸이 쑥 하고 위로 끌려 올라갔다.

“―뭐하시는 거예요!”

“콜록, 콜록! 켁! 크흐, 으…….”

율리시즈였다.

호숫가로 끌려 올라간 미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물을 내뱉었다.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웠지만, 흐린 시야 너머로 율리시즈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예요! 화, 황제가 미아 님께 뭐라고 하기라도 했나요? 아니면……!”

미아는 답지 않게 격하게 반응하는 율리시즈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콜록! 뭘 한 건 너잖아…….”

“네?”

미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구하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율리시즈를 바라보았다.

여린 소년 같은 얼굴 위로 연한 갈색의 눈이 희미하게 겁에 질려 있었다.

“……제가 지켜보고 있단 걸 알고 계셨어요?”

“후우……. 짐작만 했어.”

사실 미아는 율리시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딜로트가 붙여놓은 비밀정보부원이 자신을 구해 줬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시즈는 미아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침통한 얼굴을 했다.

“그냥 불렀어도 나왔을 거예요…….”

“불렀는데 안 나오던데?”

“……그건 사정이 있어서.”

“사실 안 불렀어. 너 거짓말 잘한다?”

“……자기도 했으면서…….”

율리시즈가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얼굴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겉옷을 벗어 미아에게 둘러주었다.

“감기…… 걸리겠어요. 다 나은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알아?”

“그냥…… 오다가다 봤어요.”

“나 걱정돼서 들렀구나?”

“…….”

율리시즈가 대답하지 않자 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냥 병문안 한번 왔다 갔다고 말하면 될걸.’

괜히 서운했다. 율리시즈는 미아에게 있어 세레니티 다음으로 처음 사귄 친구였다.

그것도 원작에 없는 사람. 그래서인지 초장부터 굉장히 친밀감을 느꼈던 것 같다.

“다 젖었는데 겉옷은 둘러줘서 뭐하나!”

속상해진 미아가 괜히 투덜거렸다.

그러나 율리시즈가 허공에 술식을 그리자, 겉옷은 이내 뽀송뽀송해졌다. 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기해! 근데 그냥 몸을 말리면 되지 않아?”

“제 능력으론 그렇게까진 못해요……. 은신이나, 암습 특화라서…….”

“아하.”

진로 설정을 왜 그렇게 했는지 알 것 같은 대목이었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미아가 여전히 율리시즈의 팔목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근데 왜 나 피해?”

“…….”

율리시즈가 움찔했다.

“구해 줄 정도면 내가 싫어진 건 아닌 거 같은데.”

“하아…….”

“나 싫다는 사람 붙잡으려는 거 아냐.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그래. 너무 갑작스럽잖아. 아니면…….”

미아의 표정이 길 잃은 아이처럼 불안해졌다.

“황태후 편으로 넘어간 거야?”

“그건 절대 아니에요.”

진심이 느껴지는 단호한 음성에 미아는 머쓱하게 머리를 만졌다.

“그, 그럼 됐구…….”

“…….”

율리시즈는 그런 미아를 온갖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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