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러다 이야기가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 미아는 준비해 놓았던 계획을 시작했다.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렌의 가족이라 언제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자리가 생겨서 엄청 기뻐요!”
미아가 해맑게 웃자 듀레인 일가는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불러 주십시오. 전처럼 이상한 말은 하지 않을 테니…….”
그래, 이상한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구나?
“저희도 영광이에요. 세레니티뿐만 아니라 제 두 딸도 자매처럼 여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세레니티는 네 딸 아니니?
듀레인 남작 부처의 말에 속으로 일일이 토를 달면서도 미아는 활짝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받아 줄 거죠?”
“선물이요?”
그 순간 듀레인 들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아이고, 속물 냄새.’
미아가 속으로 혀를 차며 손뼉을 두 번 쳤다.
곧 제인을 비롯한 궁인들이 줄지어 뭔가를 날라왔다. 남색 벨벳으로 감싼 상자들이었다.
그들을 뒤에 병풍처럼 세워 두고 미아는 까르륵 웃었다.
“별건 아니지만, 교통비나 하시라고 준비했어요!”
미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궁인들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
“어머!”
번쩍.
상자가 열리자마자 한낮의 자연광을 받은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미리 아딜로트를 통해 준비한 값비싼 보물들이었다. 진짜 국보 말이다.
그걸 바라보는 듀레인 일가의 눈은 화등잔만 해졌고, 입은 저도 모르게 떡 벌어졌다.
“어, 어떻게 이런 걸…….”
“한번 착용해 보세요! 제가 황궁의 보물창고에서 고민해서 골랐어요!”
“화, 황궁의 보물창고요……?”
“나 차 볼래!”
셜리 듀레인이 가장 먼저 득달같이 나섰다.
뒤를 이어 다른 듀레인들도 체면 차릴 생각조차 못 하고 패물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건, 보석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은 건 세레니티뿐이었다.
“이 에메랄드 크기 좀 봐. 이런 걸 밖에서 사려면 못해도 6천 금은 할 텐데!”
“엄마, 주변의 다이아몬드도 다 진짜인가 봐!”
“이게 대체 얼마짜리야…….”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눈이 돌아갈 만한 귀한 것들이긴 했다.
‘물론 공짜로 주는 건 아니란다!’
미아가 까르르 웃었다.
“마음에 드세요?”
“들다마다요! 어쩜, 이런 선물을 다 해 주시고…….”
“아딜도 허락했고, 저한테도 그런 건 많은데요, 뭐!”
그 말에 듀레인 일가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이런 게 더 있다고요?”
“네! 아딜이 많이 주고, 또 제가 벌어온 것도 있어서…….”
“와…….”
그때였다.
가장 알이 큰 에메랄드 목걸이를 착용하고서 우악스럽게 반지를 세 개나 끼고 있던 셜리 듀레인이 중얼거렸다.
“근데 디자인이 좀 오래됐다.”
“……!”
보석이 등장한 이후로 더 안절부절못하던 세레니티의 안색은 이제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언니! 그런 말은 실례예요!”
하지만 세레니티의 지적에 셜리 듀레인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니, 그치만…… 옛날 거라 그런가? 이거 나랑 안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그냥 그렇다고. 돈 버는 재능이랑 예술 감각은 좀 다른가 싶어서.”
“…….”
“…….”
테이블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보석함을 들고 있던 궁인들은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근데…… 그렇긴 하지?”
그리고 나머지 듀레인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셜리랑 루비는 안 어울리지. 나도 이 디자인은 사실 좀 노숙한 것 같아.”
“베티, 셜리. 미아 님께 실례잖니. 크기가 좀 작아도 감사히 받아야지.”
“부인 말이 맞단다, 얘들아. 이 아빠도 커프스보단 반지를 더 좋아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니.”
“아…….”
이어진 남작 부인과 남작의 대답에 세레니티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와 달리 미아는 태연했다. 너무 예상했던 그대로의 천박함이라 화가 나지도 않았다.
대신 미아는 울상을 지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 어떡하죠? 바꿔 오라고 할게요! 그게 더 좋으시겠죠?”
“미아.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야! 렌의 가족들인걸! 내가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래!”
“미아……!”
“제인 씨! 혹시 다른 보석들로 준비해 줄 수 있을까요?”
옆에서 싸늘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인은 미아의 말에 싱긋 미소 지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미아 님.”
그때, 셜리 듀레인이 다시 중얼거렸다.
“어차피 바꿔 줄 거면 그냥 우리가 고르면 안 되나? 더 비싼 것도 많을 텐데.”
“…….”
“…….”
다시 주변이 고요해졌고, 제인과 궁인들의 싸늘한 시선이 셜리 듀레인에게 꽂혔다.
“언니!”
세레니티 역시 아까보다 더 창백한 안색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 장녀인 베티 듀레인이 외려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아우, 세레니티! 귀청 떨어지게 왜 그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셜리가 뭐 못 할 말 한 건 아니잖니? 미아 님이 이렇게나 우릴 생각해 주시는데 말이야!”
“베티 말이 맞단다, 세레니티. 언니를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다니, 예의 없는 행동은 그만두렴.”
“헤헤. 맞아, 세레니티. 나 귀 아팠어.”
미아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말리는 새끼가 하나도 없지?
이런 가족에게 아직도 정이 남아 있다니, 세레니티는 보살이 분명하다.
“하하……. 다들 너무 과열된 것 같네. 그렇죠, 미아 님? 그렇지만 저희는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시진 마십시오…….”
에밀 듀레인만은 조금 눈치를 보는 듯했으나, 그 역시도 슬쩍 상자의 뚜껑을 닫은 것을 보면 상황에 묻혀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은 듯했다.
‘그냥 다 돼지밥으로 주고 싶다.’
미아는 속내를 숨기고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어쩌죠? 황궁의 보물창고는 폐하가 있어야만 출입하실 수 있어서……. 정무를 보고 계실 시간이라 방해할 수가 없네요! 대신 제가 가진 것들이라도 더 드릴게요!”
미아의 말에 듀레인 일가는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염병할 일이었다.
“그런데 혹시 미아 님은 세레니티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좋으신 건가요?”
그러다 은근슬쩍 잉그리드 듀레인 남작 부인이 물었다.
“네? 렌은 그냥 모두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지 않나요?”
“호호. 그런가요? 관대하시네요. 순진하시고.”
“제가 좀 순진하고 귀엽고 똑똑하고 매력적이긴 하죠.”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요.”
“다 아니까 굳이 말로 안 하셔도 돼요!”
미아가 생긋 웃고는 덧붙였다.
“저는 그냥 렌이 그 자체로 좋아요! 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 말에 내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던 세레니티는 감동한 듯했다.
하지만 에밀 듀레인 남작과 잉그리드 듀레인 남작 부인은 실망한 얼굴이었다.
세레니티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그쪽을 집중 공략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아!”
그때, 아까부터 분위기를 작살내고 싶은 사람처럼 굴던 셜리 듀레인이 손뼉을 짝 쳤다.
“나 저거 알아. 저거 뭐냐면…….”
그리고 옆의 베티 듀레인에게 뭔가를 속닥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곧 자기들끼리 키득거렸고, 그 모습에 세레니티는 다시 초조해했다.
“언니. 파티 호스트를 놔두고 그렇게 행동하면…….”
“얘는! 미아 님이 어디 너처럼 사소한 것에 트집 잡는 분이시니?”
베티 듀레인은 손을 내저은 뒤 미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별건 아니었어요! 베티가 요즘 책을 자주 읽어서요. 책에 나온 내용인가 봐요.”
“책에 나온 내용이요?”
미아가 물었다. 이건 좀 흥미로웠다. 쟤가 책을 읽는다니?
그리고 셜리 듀레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아 님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원래 사랑을 못 받고 자라면 애정 결핍이 있을 수 있대요. 안타깝게도요. 그래서 비슷한 처지인 세레니티를 아껴 주시면서 대리만족을 느끼시는 거라고 하네요. 우리 셜리가 참 똑똑해요. 그렇죠?”
* * *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세레니티는 마차 안에서 펑펑 울어 버렸다.
‘미아 님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원래 사랑을 못 받고 자라면 애정 결핍이 있을 수 있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뭔가가 뚝 끊어진 듯했다.
머릿속에서는 멍하니 베티를 바라보던 미아의 모습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상처받았을 거야…….’
계모인 잉그리드 듀레인과 언니인 베티, 셜리 듀레인.
그들이 배금주의자에 그리 훌륭한 성품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아에게까지 그렇게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미아는 아무리 봐도 양껏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런 미아가 그렇게 취급받다니.
“미안해요, 미아. 미안해요…….”
“시끄러워, 세레니티! 우리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사실이잖아! 너 때문에 다과회도 바로 끝나 버리고, 이게 뭐람?”
“맞아. 책에서 읽었단 말야.”
세레니티가 흐느끼는 동안 같은 마차를 탄 베티와 셜리는 계속해서 그녀를 구박했다.
듀레인 가문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녀의 도움도 없이 혼자 몸을 씻으며, 세레니티는 더는 이 일을 좌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과해야 해.’
마침 방으로 돌아오니 두 언니가 세레니티의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 세레니…….”
방 주인의 등장에 고개를 돌리던 베티와 셜리는 갓 씻고 나온 세레니티의 모습에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그런 제 행동에 놀라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얘, 세레니티! 너 그래도 우리 욕하지는 않았나 보더라? 미아 님이 이렇게 무도회 초대장도 주신 걸 보면 말야!”
“언니. 무도회에서 꼭 미아에게 사과해 주세요.”
단호한 금빛 눈을 바라보며 베티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더니 눈을 게슴츠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