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세레니티의 얼굴이 굳었다. 동시에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미아의 꼭지도 돌았다.
‘원작이랑 다를까 봐 기다려 준 내가 바보였지!’
“이 개……!”
미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헤드 드레스를 바닥에 내던진 순간이었다.
“잠깐 실례하죠. 만나고 싶은 숙녀분이 있어서.”
남몰래 미아를 주시하고 있던 바이지겔 백작이 그보다 더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고 우아하게 세레니티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세레니티 듀레인 양?”
“……!”
세레니티도, 그녀의 두 의붓언니도 놀라 굳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바이지겔 백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슬쩍 미아에게 눈짓했다.
‘여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런 의도가 느껴져 미아는 겨우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담았다. 거기까지 확인한 바이지겔 백작이 세레니티를 바라보았다.
“미아 님이 듀레인 양을 보고 싶어 하더군요.”
“미아가요? 미아는…….”
세레니티가 말끝을 흐렸다. 괜찮은지 묻고 싶은 듯했으나, 옆자리의 의붓언니들 때문에 말을 삼가는 모양이었다.
‘베티 듀레인과 셜리 듀레인.’
바이지겔 백작은 남몰래 두 사람을 관찰했다.
자신이 테이블에 앉은 뒤로, 두 사람의 눈은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빛나고 있었다.
속이 뻔한 종자들이었다.
반면 세레니티 듀레인은 자신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저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걱정만이 보였다.
‘합격이군.’
바이지겔 백작이 빙긋 웃었다.
“옆의 숙녀분들은 듀레인가의 자매인가 보군요.”
“네! 저희가 세레니티의 언니예요! 저는 베티 듀레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셜리 듀레인이에요.”
“흐음.”
바이지겔 백작이 흥미롭다는 듯이 호응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세레니티 듀레인 양은 미아 님께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대들도 듀레인 양에게 신경을 써 주면 좋겠군요.”
“물론 그러고 있죠! 저희 가정사가 좀 복잡하지만 저희는 친자매처럼 친한걸요!”
베티 듀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밑으로 세레니티의 발을 밟았다. 호응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세레니티는 입술을 깨물 뿐, 베티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 태도에 셜리 듀레인이 세레니티의 반대쪽 옆구리를 꼬집으려 한 순간.
“흠. 친자매는 원래 발도 밟고, 옆구리도 꼬집고. 그런가 보죠? 나는 자매가 없어서 모르겠군요.”
바이지겔 백작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어…….”
베티 듀레인과 셜리 듀레인은 당황해 재빨리 발과 손을 뗐다.
“무,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기사를 좀 우습게 아는 것 같군요. 언제 한번 기사단의 대련을 구경하러 오겠어요? 기사들이 얼마나 기척에 민감한지 알 수 있을 텐데.”
“……!”
베티와 셜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중 베티는 주변의 이목을 신경 쓰며 애써 웃었다.
“이, 이건 그냥 장난이었어요, 백작 각하! 말씀하신 것처럼 친자매 같은 사이라……!”
“세레니티 듀레인 양은 미아 님께서 아끼시는 숙녀입니다. 그녀의 몸이 상하면 미아 님이 매우 슬퍼하시겠죠. 그대들 둘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상관없지만, 세레니티 양에게는 주의해 주면 좋겠어요.”
명백하게 급을 나누는 말에 베티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사이 주변에서는 소란을 눈치채고 그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래요?”
“베티 듀레인 양이 세레니티 양을 남몰래 꼬집었다는 것 같은데요.”
“아……. 또요?”
주변의 작은 속닥임에 베티와 셜리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바이지겔 백작은 웃음기 없는 눈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세레니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세레니티 양?”
“네. 백작 각하.”
바이지겔 백작이 베티를 볼 때와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제안 하나를 하죠. 궁으로 들어오지 않겠어요?”
그 와중에도 걱정스럽게 의붓언니의 안색을 살피고 있던 세레니티가 퍼뜩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은…….”
“말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대가 궁으로 들어와서 미아 님을 보좌해 줬으면 좋겠어요.”
바이지겔 백작이 차분하게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미아 님이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될지 그대도 알지 않나요? 당연히 그분의 사람이 필요하게 될 거고, 나는 그대가 적임이라고 보는데요.”
“제가요?”
“그래요. 그대가 미아 님의 말벗이 된 뒤로 나는 계속 그대를 주시했거든. 알지 않나요? 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세레니티를 황태후 크리소르의 첩자가 아닌지 의심했다는 말을 매우 세련되게 돌려 말한 바이지겔 백작은 이내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대는 미아 님께, 그리고 폐하께 해가 될 일은 전혀 하지 않더군요.”
“제가 그럴 이유가 없는걸요.”
자신을 의심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세레니티는 온화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바이지겔 백작은 점점 더 그녀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 궁으로 들어와요. 레벤토르에는 그대처럼 신의 있는 자들이 필요하니까.”
세레니티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대답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백작 각하. 저는―”
고민 끝에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 찰나였다.
“세레니티. 수락해야지! 왜 그러고 있어? 백작 각하 기다리시겠다!”
“맞아, 세레니티! 고민할 것도 없잖아?”
궁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계속 눈을 희번덕대고 있던 베티와 셜리가 끼어들었다.
“네가 궁으로 들어가다니, 그것도 미래의 황후 폐하이신 미아 님을 보좌하는 자리라니! 얼마나 영광된 자리야?”
“그치! 어디 우리 같은 한미한 가문 출신이 그런 자리에 올라갈 기회가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눈은 마치 금화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
말이 이어질수록 세레니티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기어이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제안엔 감사드리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세레니티!”
“그런가.”
놀라는 두 의붓언니와 달리 바이지겔 백작은 태연했다.
“아쉽게 되었군요. 미아 님이 슬퍼하시겠어.”
“저어, 그래서 말인데…….”
망설이던 세레니티가 물었다. 눈에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미아는 괜찮은 거죠?”
바이지겔 백작이 피식 웃었다.
“잘 지내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물론, 그대를 매우 걱정하고 계시지만.”
“아…….”
그 말에 세레니티가 행복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저도 미아가 늘 걱정돼요. 잘 지내고 있다니 안심이에요.”
안도가 뚝뚝 묻어 나오는 그 말에 내내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미아의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자기 걱정이나 할 것이지.’
미아는 바닥에 떨어졌던 헤드 드레스를 주워 쓰며 웃고 있는 세레니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세레니티 옆에 앉아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베티 듀레인과 셜리 듀레인에 주목했다.
‘하아. 그런데 대체 이건 어떻게 한다?’
아무래도 세레니티는 자기 가족들이 자신을 이용해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 게 싫은 듯했다.
미아도 원래 그런 타입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레니티의 가족이라면 좀 봐줄 의향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이니까.
하지만 세레니티 본인이 그걸 싫어하는 듯하니 미아가 괜찮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죽이거나 조져 버리는데 렌의 가족이라 그럴 수도 없고……. 아니지, 잠깐만?’
고민하던 미아의 눈이 번득였다.
정을 떼지 못하는 게 문제라면, 정이 떨어지게 만들어 주면 되잖아?
* * *
미아는 결국 그날 세레니티와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 자신이 설득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날 황궁으로 돌아가서 듀레인 일가에게 즉각 초대장을 날렸다.
주최자는 미아였지만, 신분이 신분이었기 때문에 초대장은 황제의 이름으로 나갔다.
‘자꾸 명의 도용 하는 거 같아서 찝찝하네. 얼른 신분 상승하든가 해야지 원.’
듀레인 일가는 즉각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오전.
미아는 세레니티를 포함한 듀레인 일가와 함께 능소화 화원에 둘러앉게 되었다.
초대객은 총 다섯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가장 먼저 에밀 듀레인 남작. 세레니티를 닮은 금발에 금안을 가진 미중년이다.
그는 전에 한번 미아와 설전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인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미아가 먼저 초대하자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입가가 씰룩이고 있었다.
“언젠가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다니요. 특히 저희집 딸들이 미아 님을 정말 뵙고 싶어 했답니다?”
그다음은 밤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잉그리드 듀레인 남작 부인. 뺨의 점 때문인지 꽤 요염한 인상이었다.
“맞아요! 그런데 세레니티는 저희를 미아 님께 절대 소개해 주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분을 독점하려고 할 수가 있지?”
“맞아! 너무한 거 아니야? 미아 님, 저희랑도 같이 놀아요!”
그리고 홀쭉한 베티 듀레인과 통통한 셜리 듀레인. 그 둘은 미아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호들갑을 다 떠는 중이었다.
“…….”
마지막이 세레니티였다.
그녀는 미아를 보자마자 다정한 미소를 보였지만, 옆에서 듀레인 일가가 입을 열수록 표정이 굳었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 빨간 것도 예뻐. 귀여워.’
미아는 싱글싱글 웃었다. 세레니티가 너무 예뻐서 다른 사소한 것쯤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