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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59화 (159/193)

159화

“어쩌겠습니까? 신관이 환자를 치료한다는 명목인데. 얼굴을 봤는데 실제로 곧 죽을 사람 같더군요.”

“세비앙. 말조심.”

“죄송합니다. 아무튼 대신관님께서 황태후 폐하와 이야기를 마치셨으니, 드미트리 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내가?”

세비앙이 슬쩍 드미트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시잖습니까. 황제의 가장 큰 추문을.”

드미트리의 고운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소문 말이구나.”

“예. 젠타리아 출신인 자기 기사랑 붙어먹…….”

“세비앙.”

“죄송합니다. 부정한 관계를 통해 아들을 낳았고, 그가 현 황제이며 황가 슈뢰더의 혈통으로 속였다는 추문 말입니다.”

“당시 대신관이 현 황제가 슈뢰더의 적통인 것을 확인까지 했으면서 그가 추문으로 내몰릴 때 나 몰라라 했던 신전의 잘못 말이군.”

“드미트리 님…….”

세비앙이 쩔쩔매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신전도 땅 파먹고 운영하는 건 아닙니다. 정치란 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현 황제의 즉위 이후 신전은 세가 많이 줄었습니다. 크리소르 황태후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을 겁니다.”

“세비앙. 나라도 궁핍과 환란 속에 있을 때 자신을 내팽개친 이를 대접하고 싶진 않을 거야.”

“하아…….”

세비앙은 딱딱한 소리만 하는 이 차기 대신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한숨을 흘렸다.

“아무튼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한동안 요하네스 대신관님을 따라 황궁에 묵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대신관님은 건강이 안 좋으실 텐데. 괜찮으실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대체 저희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하루빨리 드미트리 님이 대신관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비앙.”

“예, 예. 입조심 말씀이시죠.”

드미트리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요하네스 대신관이지만 요즘 그의 행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다른 의심에 드미트리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어쨌든 요하네스 대신관은 신성력을 쓸 수 있다. 그가 여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의심은 독이야. 나는 믿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드미트리의 다짐에는 본인도 모르는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 * *

미아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황립 의료원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엠브라가 보였다.

“미아 님!”

짧은 녹색 단발을 꽉 묶은 그녀 옆에는 지로티 공작도 있었다. 미아가 반색하며 다가갔다.

“할아버지도 같이 계셨네요!”

“관절이 아파서 말일세.”

바지를 걷고 무릎에 약을 바르고 있던 지로티 공작이 앓는 소리를 냈다.

“술 때문은 아니고요?”

“술은 끊었네. 손녀딸 결혼식에 손잡고 들어가야 해서 말이네. 흠, 흠! 귀찮기 짝이 없어, 아주.”

“히히.”

미아가 실실 웃자 지로티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보다 이번 일 들었네. 아주 잘 해결했다지?”

“네! 제가 너무 유능해서 또 한 건 해 버렸죠!”

“그래야 내 손녀딸이지.”

“그런데 많이 아프신 거예요?”

“아프긴. 그냥 나이를 먹어서 몸이 고장 나는 게지.”

그렇게 말한 뒤 지로티 공작은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젠 나도 늙었구만. 슬슬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어.”

아무래도 황제의 주치의를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건 엠브라가 맡게 되는 거 아닌가?’

미아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지로티 공작의 무릎을 돌보고 있던 엠브라가 호탕하게 웃었다.

“저는 무리에요, 아가씨! 일단 신분이 너무 드러나 있는걸요. 겉으로는 크라우스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의원이 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그럼 딱히 인재가 없는데.

팔짱을 끼고 아는 의원들을 떠올리던 미아의 머릿속에 곧 렌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알려 준 해독제의 제조법도 같이.

“저, 내내 생각하던 건데요.”

미아가 운을 띄우자 엠브라와 지로티 공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소르가 저한테 준 그 독이요! 그게 크리소르가 의원들을 시켜 그 독을 만든 거라면요.”

미아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기……, 할아버지의 아들들도 어쩌면 그 독에…….”

지로티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아마 그도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괜한 말을 했나…….’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눈치를 보며 눈을 또르르 굴리는 미아와 엠브라의 모습에 지로티 공작은 이내 다시 호방하게 웃었다.

“괜찮네! 목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말일세.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되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무성한 턱수염을 쓸었다.

“그보다 렌나라는 의원이 정말 수상해지는군.”

미아는 지로티 공작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사실 독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사건은 해결되었고, 독은 앞으로 주의하면 되며, 해독법도 있으니까.

‘하지만 왠지 이걸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미아의 머릿속을 뭔가가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엠브라. 렌나랑 엠브라는 연배가 비슷하죠?”

“네! 렌나가 저보다 어리긴 하지만요.”

엠브라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흔쾌히 답했다.

“그럼 부모님 연배도 비슷하겠죠?”

“그렇겠죠?”

“그리고 엠브라도 부모님이 황립 의료원의 의원이었으니까, 의학에 대해 주워 들은 게 좀 있었을 테고요?”

“네에. 그랬죠?”

“오리존 아카데미에서 성적이 꽤 좋았겠어요?”

“그럼요!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수석이었…….”

엠브라의 말이 점점 작아지고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렌나도 공부를 제법 잘했죠……. 아가씨, 설마……?”

“가능성 있지 않나요?”

“설마요! 분명 신분을 확인했을 텐데…….”

“하지만 엠브라도 신분을 바꿔서 황궁에 들어왔잖아요?”

엠브라가 신음을 흘렸다.

“그래서 자네 말은.”

미아가 의문을 제기하는 내내 수염을 거칠게 쥐어뜯고 있던 지로티 공작이 입을 열었다.

“렌나라는 의원의 부모가…… 그 독을 만들었다는 건가?”

미아는 멈칫했다가 지로티 공작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적어도 렌나 씨 본인이 만든 건 아닐 테니까요. 릴리벳의 말을 들어 보니 해독법도 실전된 모양이던데, 그걸 렌나가 알고 있다는 건 역시 제작자와 연이 닿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지로티 공작은 침묵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식을 잃은 그의 심정이라면, 사실 그 독을 만든 사람까지도 죽이고 싶을 수도 있었다.

혹은 정말 이 가설이 맞다면 그들의 자식인 렌나까지도 죽이고 싶을지도.

그것을 알기에 미아는 애써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니까요! 일단 조사를 해 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요! 일단 가설 자체는 꽤 그럴듯하니까요.”

그런 미아의 노력에 눈치 빠르게 엠브라가 화답했다.

“제가 알기로 그때의 의원들은 다 크리소르의 손에 죽었거나, 살아 있더라도 숨어 지낼 테지만…….”

엠브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이라면 또 모르죠? 크라우스 공작가의 세가 약해지고 있으니, 이때다 싶어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할지도?”

미아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보가 필요하겠어.’

자연스레 미아는 율리시즈를 떠올렸다.

분홍색 머리에, 말을 조금 더듬고, 진로를 약간 잘못 선택한 친구를.

‘시즈…….’

그날 이후로 율리시즈는 본 적이 없었다.

‘꼭 정보 때문이 아니더라도 시즈는 다시 만나 봐야겠어.’

그렇게 헤어진 뒤로 내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율리시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미아는 그를 친구로 여겼다. 그런 애매한 이별로 친구를 잃고 싶진 않았다.

“정보는……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저도요! 폐하뿐만 아니라 저도 관련된 일이니까요!”

“그러게나. 나도 따로 수소문해 보겠네.”

엠브라에 이어 지로티 공작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엠브라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참! 아가씨한테 말씀드릴 거 있었는데!”

“저한테요?”

“네! 혹시 소문 들으셨어요? 듀레인 님에 대해서요!”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던 이름에 미아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해졌다.

“렌이요? 렌이 왜요?”

지로티 공작 역시 조금 놀란 듯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듀레인가의 그 아이 말인가?”

“네! 남작가로 돌아가셔도 계속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시길래, 밖에서 따로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 하나 없길래 좀 의아해서 수소문을 해 봤어요! 그랬더니…….”

엠브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글쎄 듀레인 님이 가택에 연금되다시피 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네?”

“원래는 황궁에서 나간 뒤 미아 님을 만나려고 계속 시도했는데, 듀레인 남작이 막았나 봐요! 크라우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아……!”

“그런데 크라우스 공작가가 저렇게 됐잖아요? 솔직히 이제 미아 님의 적수는 없는 것 같고?”

엠브라가 슬쩍 미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에밀 듀레인 남작이 다시 세레니티 님에게 미아 님에게 접근하길 종용했는데, 세레니티 님이 거부했대요.”

미아는 다급해졌다.

“그, 그럼 렌은 지금 듀레인 남작가에서 갇혀 지내는 거예요?”

“참……. 어이가 없구만.”

지로티 공작은 헛웃음 쳤다. 자식을 잃은 그로서는 에밀 듀레인 남작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엠브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집 밖으로 나오긴 해요. 살롱에는 참여하고 있거든요.”

“……?”

그럼 뭐가 문제야.

미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엠브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그 살롱에 듀레인 남작 부인이랑 세레니티 님의 의붓언니들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거죠.”

미아는 바로 모든 상황을 짐작했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세레니티는 기본적으로 신데렐라와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지금 계모와 의붓언니들이 세레니티에게 개지랄을 떨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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