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하지만 그는 이내 얇은 입술 사이로 긴 숨을 내뱉었다. 그의 녹색 눈이 빠르게 다시 예리함을 되찾았다.
‘이번 거병은 실패다.’
냉정하게 판단한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마차 안을 흘낏 돌아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일부러 크라우스의 이름은 내걸지 않았으니.’
크라우스 공작은 옆을 흘긋 바라보았다. 릴리벳은 편지를 읽느라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신들을 쳐내는 건 뼈아픈 손실이 되겠지만 크라우스 공작가가 무너지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저 저들이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야. 황제는 반역자들을 살려 두지 않으며, 황제 역시 내 힘을 줄이는 것에 만족하고 끝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말이다.
아딜로트도 자신도, 서로를 한 번에 삼키기 어려운 적이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어쨌든.
크라우스 공작가를 한 번에 삼킬 생각을 하는 정신 나간 작자가 아닌 이상, 이 사태는 이대로 끝날 터였다.
그리고 크라우스 공작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때.
릴리벳 크라우스는 마차 안에서 편지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안녕! 나 미아야! 그리고 너 지금 독 마셨어!」
* * *
“나한테 편지라고?”
부관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들며 릴리벳이 물었다. 부관은 겸연쩍은 얼굴로 답했다.
“가신들이 사라져서 찾다가 덴버 자작 영애가 아가씨께 남겼다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릴리벳이 한숨을 쉬었다. 일처리 하나 똑바로 못 해서야.
“알았으니 가 봐요.”
“예.”
부관이 물러간 뒤 릴리벳은 괜히 목덜미를 문지르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디 얼마나 그럴듯하게 도망친 걸 변명했을지 보자는 심산으로 편지를 펼쳤다.
「안녕! 나 미아야!」
첫 문장에서부터 릴리벳은 한심함을 느꼈다.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서두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건 덴버 자작 영애가 남겼댔는데?’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은 순간 릴리벳의 의아함은 놀람이 되었다.
「너 지금 독 마셨어!」
이게 무슨 말이지?
「아마 네가 쓰려던 그 독이랑 같은 종류일 거야. 숨쉬기 좀 어렵지 않아? 오한이나 발진은?」
누가 망치로 머리를 내려친 것 같은 충격 속에서 릴리벳은 황급히 자신의 소매를 들추었다.
“……!”
편지에 쓰인 대로 팔목 여기저기서 피부가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릴리벳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때부터 그녀는 숨 쉴 틈도 없이 편지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너는 귀족이니까 이 시간이면 티 타임을 가지고 있었겠지. 덕분에 먹이기 쉬웠어!
물론 도와준 건 다른 사람이지만. 너희 공작가가 독점하던 기술이 진짜 귀한 거긴 한가 봐? 지분을 나눠 주겠다니까 득달같이 돕겠다고 하던데.
참, 그리고 진짜 복장 터지겠지만 나는 말짱해!」
실실 웃는 미아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릴리벳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안부는 여기까지 묻고.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네게 주어진 시간은 5분이야. 지금쯤 여기까지 오는데 이미 25분 정도는 썼을 테니까.
5분 안에 잘 생각해 봐. 내가 원하는 게 뭘지.
그리고 크라우스 공작이 이 사태를 아무 손해 없이 넘기기 위해 누구를 버리는 패로 쓸지도 잘 생각해 보고.」
‘뭐?’
호흡이 점점 가빠 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릴리벳은 저도 모르게 마차 밖의 크라우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우두머리라니요. 폐하…….”
그는 오연히 서서 황제와 대담 중이었다.
“무도한 세력이 감히 폐하께 칼을 들이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이제 비는 거의 그쳐 있었고, 크라우스 공작은 태연하게도 황제를 보며 스스로를 변호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녹색 눈이 짜증과 분노로 점철된 것을 같은 크라우스인 릴리벳은 알아볼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순간 이 일에 관련된 자들에게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한데 역시 폐하십니다. 이 불충한 신하가 나설 자리조차 없었군요.”
“그래서 그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물론입니다.”
크라우스 공작은 자기가 휘하의 가신들을 종용해 일을 벌였을 텐데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팔았다.
언제나 그런 냉정함이 멋있고 귀족답다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팔릴 거라는 걸 몰랐을 때엔 말이다.
‘이미 반란은 실패했어.’
누군가는 이 일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귀족들은 어차피 죽을 거, 크라우스 공작가까지 끌고 들어가려고 애쓸 테고…….’
황제도 같은 부분을 물고 늘어질 테니 크라우스 공작가에서는 뭔가 하나를 내어줘야 했다.
‘예컨대…….’
릴리벳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계 출신이지만 황후 후보로 올리려고 했던 릴리벳 크라우스를.’
모든 게 들어맞았다.
미아 때문에 황후가 되지 못할 것 같자, 앙심을 품고 크라우스 공작가의 뜻인 척 거병했다고 날조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때, 크라우스 공작이 말했다.
“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심지어 내부에 폐하께 불충한 마음을 지닌 적이 있으리라고는 말입니다.”
“……!”
더는 시간이 없었다.
릴리벳은 빠르고 조용하게 반대쪽 마차 문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기사의 다리를 두드렸다.
“내려.”
“예?”
“내리라고!”
릴리벳이 급하게 말에 올라탔다.
“이랴!”
“……!”
“아, 아가씨!?”
갑자기 무리에서 말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그녀를 공작가의 기사들이 붙잡을 새도 없었다.
크라우스 공작은 바람처럼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릴리벳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뒤늦게 얼굴을 굳혔다.
“활을 쏴라.”
“예?”
“활을 쏘라고 했다!”
“하지만 아가씨를…….”
“죽여!”
궁수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릴리벳은 빠르게 말을 달려 황제 앞에 다다랐다. 허겁지겁 말에서 내리는 그녀를 황제의 기사들이 막아섰다.
“윽…….”
릴리벳은 이제 정말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아딜로트가 아닌 그의 뒤에 있는 마차를 노려보며, 보란 듯이 아딜로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이 모든 것은 크라우스 공작가의 책임입니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이름으로 사죄드립니다.”
멀리서 크라우스 공작이 침음을 흘렸으나, 릴리벳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부의 적. 참으로 그 말이 맞지요.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들이 이러한 일을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저 역시 크라우스 공작가의 일원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니,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끝에 가서 릴리벳의 말은 흐려졌다. 이마를 땅바닥에 댄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정말로 더는 버티기 힘들었던 것이다.
“허억……. 허억.”
그런 그녀를 황제는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아니. 무심한 게 아니야.’
저건…… 그냥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눈이다.
아딜로트는 섬뜩한 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대신할 게 없으니 투구라도 벗어 보지.”
기사 한 명이 투구를 벗어 아딜로트에게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배를 써야겠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아딜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살짝 베어 투구에 자신의 피 몇 방울을 흘려 넣었다.
그사이, 옆에 있던 기사가 아무도 모르게 다른 무언가를 투구 안에 흘려 넣었다.
‘해독제……!’
릴리벳이 헐떡이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해독제가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아딜로트의 묘한 눈빛이 그걸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런 릴리벳에게 아딜로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투구를 내밀었다.
“릴리벳 크라우스는 크라우스 공작가를 대표해 경배의 잔을 받들라.”
황제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폐하!”
그때, 아래쪽에서 크라우스 공작이 드물게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릴리벳 크라우스에게는 크라우스 공작가를 대신할 자격이 없습니다!”
“크라우스 공작가를 대표해 릴리벳 크라우스를 황후 후보로 삼으라 종용한 것은 그대 아닌가.”
“……!”
크라우스 공작이 약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사이 릴리벳은 비틀거리며 투구를 받았다.
“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할 말을 잊었다.
대크라우스 공작가의 공녀가, 성배도 아닌 기사의 투구에 받은 빗물을 받아 마시는 굴욕적인 상황이라니.
영주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공작가마저…….”
“이젠 정말…….”
더는 저 황제를 끌어내릴 존재가 없다.
언덕 반대쪽의 상황을 짐작한 크라우스 공작 역시도 눈을 감으며 한탄했다.
황제가 어떻게 릴리벳 크라우스를 회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걸 해냈고, 릴리벳은 자신이 그녀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기 전에 그물망을 빠져나가 버렸다.
‘차라리 정말로 전쟁을…….’
하지만 수가 적다. 가신들 역시도 아까의 대화를 들은 이상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산트나르 역시 이쪽의 동향을 살피고 있을 터였다.
‘준비한 대로 릴리벳에게 뒤집어씌우면……, 아니.’
크라우스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의미가 없군.’
나중에 가서 릴리벳이 독단적으로 영주를 부추겨 거병한 것이라 몰아간대도, 크라우스 공작가가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경배를 맹세한 이 장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질 것이다.
“……내가 황제를 얕보았군.”
크라우스 공작은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고 아딜로트를 노려보았다.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수려한 외모의 황제는 올연히 서서 그 모든 시선을 받아내었다. 가히 지배자의 풍모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신들의 지지도, 독점 기술도, 귀족 중 으뜸이라는 명예도, 기껏 키운 인력도.
이번 사태 하나로 모조리 잃었다.
아딜로트가 이 정도로 지독하게 몰아붙일 줄 아는 남자였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크라우스 공작이 문득 동작을 멈췄다.
‘아니. 황제는 넓고 높게 보는 사람이지 좁고 깊게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만든 건…….’
그때였다.
황제의 마차에서 분홍색 머리통 하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