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설마…….”
때마침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덕분에 보다 깨끗해진 시야로, 마이어 자작은 장대비 너머의 이름 모를 군대가 천천히 깃발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깐만, 지금 저거…….”
군대의 선두에 올라가고 있는 깃발은 붉은색이었다.
붉은 사자 깃발.
황가 슈뢰더의 상징.
“허억……!”
마이어 자작은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에 주변의 영주들도 하나둘씩 뒤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화, 황실의 군대잖아! 우리 편이 아니었어?”
“제, 젠장! 왜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거야!”
“그렇지만 이런 곳에 황실의 군대가 있으리라고는……!”
대경실색하며 눈을 부릅뜬 그들은 곧 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붉은 사자 깃발을 올린 군대의 선두로 천천히 누군가 말을 타고 나온 것이다.
키가 크고 등이 꼿꼿한 기사였다. 그는 천천히 투구를 벗었고, 그러자 긴 흑발이 나부꼈다.
“……!”
“키토 후작!”
“크라우스 저택에 있는 것 아니었어……!?”
영주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페르디안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오르퀘니나의 유일한 달.”
그의 제창에 맞춰 라쉬트 평야를 점령한 병사들이 동시에 창칼을 추어올렸다.
챙. 챙. 챙!
땅을 짓누르듯 무겁게 깔린 먹구름 아래에서, 잘 훈련된 병사들이 숨소리 하나 없이 칼을 치켜들었다.
우왕좌왕하고 질서라곤 모르던 자신들의 병사와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 영주들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마지막으로 페르디안이 외쳤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폐하를 위하여!”
둥! 둥! 둥!
“하!!”
페르디안의 외침을 기점으로 먼 곳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병사들이 기합을 내질렀다. 천지가 떠나갈 듯한 그 소리에 영주들은 완벽하게 얼굴이 흙빛으로 질렸다.
“도, 도망갈 곳을 찾아!”
“어, 없습니다! 저쪽이 이쪽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습니다!”
“왜 그따위로 진형을 짜게 둔 거야! 정찰이라든가, 아무튼 그런 걸 했어야 할 것 아냐!”
“그렇지만 두 번째로 돌격해야 한다고 하셔서……!”
마이어 자작 역시 혼비백산했다.
‘어젯밤의 그 아지랑이 같은 게 황제의 군대였다니!’
그가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베, 벤야민은! 벤야민 어디 있느냐!”
“안 그래도 찾아보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낭패감 짙은 외침이 들려왔다. 그 아우성을 들으며 아딜로트는 마법석에 대고 차분하게 말했다.
“날씨가 참 숨기에 좋았지. 덕분에 내 병사들과 연락책은 고생 좀 했지만.”
그 말에 페르디안은 검의 폼멜로 자신의 심장 부근을 두 번 건드렸다. 주군에의 충성을 의미하는 동작이었다.
여전히 상황을 믿지 못하고 페나트 백작이 외쳤다.
“하, 하지만 비가 내린 건 고작 하룻밤인데……! 예상했다고 한들 어떻게 그 거리를 하루 만에!”
“그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해야 하는 게 전쟁이야.”
아딜로트는 싸늘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걸 못하면 죽는 게 전쟁이지. 고맙군, 죽일 핑계를 만들어 줘서.”
* * *
‘영화 같아! 진짜 멋있어!’
미아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소설로만 보던 장면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원작에서 세레니티와 함께 크라우스령에 초대받은 아딜로트는 크라우스 공작의 거병에 포위된다.
하지만 그건 사실 요아힘의 계책이었고, 미리 준비해 둔 군사를 통해 도리어 아딜로트는 크라우스 공작가의 힘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미 게임 끝이네.’
미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영주들을 훔쳐보며 생각했다. 아마 죽기살기로 달려들면 아딜로트의 군대도 피해를 입겠지만, 영주들은 포기할 것이다.
수도, 경험치도, 진형도 상대가 안 됐거니와,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기세를 잃었다.
‘생각할수록 요아힘이 대단하단 말야.’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를 떠올린 미아가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그걸 미리 알고 대처했냐는 세레니티의 물음에 요아힘의 답이 정말 가관이었다.
‘날씨를 예측했느냐고요?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책사는 바람을 읽고 계절을 느끼며 별들의 운행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날씨를 파악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죠. ……그리고 저는 라지푸트 출신이니까요.’
라지푸트나 소륵의 고위 귀족은 하늘을 읽을 줄 안다고들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요아힘만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륵의 뇌제라면 모를까.
소설 속에서 세레니티 역시도 그런 요아힘에게 감탄한다.
‘정말 대단해요, 요아힘. 크라우스 공작 각하가 폐하를 공격하려 들리란 것은 어떻게 예상했나요? 그는 신중한 성격이라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만에 하나 비가 안 내려서 군사적 움직임이 들통났을 수도 있고…….’
세레니티의 물음에 요아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크라우스 공작 각하는 반드시 거병했을 것입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고, 폐하를 죽일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덧붙였다.
‘그리고, 비가 안 왔어도 상관없었습니다.’
* * *
라쉬트 평야 근처까지 도달한 크라우스 공작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황실의 군대가 라쉬트 평야에서 우리 군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
먼저 동태를 살피고 있던 그림자에게 보고를 받은 크라우스 공작은 잠시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봐라. 황실의 군대라고?”
―예. 미리 대비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날씨 때문에 그들의 이동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
크라우스 공작의 얼굴이 굳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릴리벳도 불안하게 눈을 움직였다. 그녀에게는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봉에는 페르디안 키토가 섰습니다.
“그자는 황제와 함께 있을 텐데?”
―감시가 심해지기 전에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황제의 기사들이 실내에서도 투구를 쓰고 두문불출하여 그와 함께 있는 것으로…….
그 순간, 저택 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공작 각하! 급보입니다!”
저택에 두고 온 부관이었다.
크라우스 공작은 마차를 멈춰 세웠고, 그에 따라 같이 이동하던 기사들도 멈춰 섰다.
“전군, 정지!”
빗줄기 사이로 황제의 마차가 보이는 위치였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부관은 희게 질린 얼굴로 쏜살같이 말했다.
“공작 각하! 공작령 동부 해안으로 산트나르의 국공 해적들이 침략하고 있다고 합니다!”
“…….”
“또한 공작령과 인접해 있는 황제파 귀족들의 영지에서도 군사적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
“그, 그리고 비료 기술의 유출 때문에 저택에 연금해 놓았던 가신들이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도망쳤습니다…….”
연타로 이어지는 소식에 크라우스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옆에서 릴리벳이 급하게 물었다.
“전부 빠져나갔단 말이야?”
“예. 그리고, 아가씨껜 이런 것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덴버 자작 영애가 남긴 편지입니다…….”
릴리벳은 급하게 편지를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그사이 크라우스 공작의 얇은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의 입술 새로 짓씹듯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재상…….”
이런 심계를 꾸밀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다.
일찍이 재상 요아힘 키르히는 산트나르에서 꽤 오래 외교 분쟁을 해결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산트나르의 해적들과 유착 관계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내가 군사를 모으지 않았다면 그들을 제압한다는 핑계를 대려고 했군.’
그리고 만약 자신이 군사를 일으키면, 해적들은 동부 해안으로 전력을 분산시킬 수단이 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내가 거병을 결심한 것은 비 때문인데. 날씨를 예측했을 리가…….’
거기까지 생각한 크라우스 공작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그가 무슨 재주로 기상 변화를 예측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그 때문에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는 점이다.
군사 반란은 국정 회의 때 황제의 일에 어깃장을 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리고 아딜로트는 반역자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하다.
그때, 먼 곳에서 확성용 마법석으로 소리를 키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
크라우스 공작이 멈칫했다. 그는 평소의 거만함이 전혀 사라진 무시무시한 낯을 하고서 마차에서 내렸다.
“그대들 모두가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이라니.”
잦아드는 비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황제의 눈빛이 그 이상으로 형형하기 때문인지.
크라우스 공작은 황제가 오만하고 섬뜩한 붉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럼 나는 감히 황가에 반하는 이 세력의 우두머리를 크라우스 공작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
“어떻게 생각하지? 크라우스 공작.”
크라우스 공작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건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