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뭔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이어 자작이 눈을 비비고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장대비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영주 중 한 명이 비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마이어 자작께선 전쟁이라 긴장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그 말에 마이어 자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큼! 그게 아니라 그냥 주변 지형을 살폈을 뿐입니다.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아무래도 한자리 크게 얻을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뭐, 그러려면 일단 공을 세워야겠지만요.”
“하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번 거병이 성공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주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는 병사들을 관리하러 이만.”
“저 역시도 전열을 가다듬으러…….”
그리고 각자 자신의 군영으로 슬금슬금 사라졌다. 제 군영으로 돌아가는 영주들의 머릿속에선 같은 생각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차피 황제는 독 안에 든 쥐야.’
라지푸트 인에게는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황제라지만, 기사 몇을 데리고 뭘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크라우스 공작이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한자리 주겠지.’
‘제일 먼저 달려드는 건 다른 이들에게 줘 버리고, 두 번째로 달려드는 거야. 황제가 기력이 빠진 순간 친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마이어 자작 역시도 잘 보이지도 않는 시야 너머의 무언가에 대해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나절, 릴리벳은 귀걸이를 끼우며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다고?”
아침 식사를 하고도 남아 티 타임을 가져야 할 시간이었다. 릴리벳이 지금 크라우스 공작가에 연금된 가신들을 달래러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한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건가?’
심각한 얼굴의 릴리벳이 하녀에게 물었다.
“아직 안 죽었다니?”
“네.”
“안쪽의 사정을 염탐하는 건?”
“어제 암살자와 그림자가 대거 죽었기에…….”
릴리벳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림자를 키우려면 꽤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냥 낙마로 죽어서 끝내지 이게 무슨 민폐야.’
릴리벳이 미아를 떠올리며 한숨 지었다.
“알겠으니 가 보렴. 상황이 바뀌면 알려 주고.”
저쪽의 사정이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일단 귀족들을 돌봐야 할 때였다.
“모두 간밤엔 평안했나요?”
릴리벳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도도하게 만찬실에 들어섰다.
티 타임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오늘따라 옆자리에 앉은 덴버 자작 영애가 유난히 치근대긴 했지만 말이다.
‘미아가 비료 기술에 대해 떠들 때 제일 관심을 보였으면서, 천박하게도.’
릴리벳은 그녀에게 냉랭한 태도로 일관하며 다른 귀족들을 챙겼다.
저택에 연금되다시피 해서 불안해하는 낌새는 있었지만 그도 얼마 뒤엔 끝날 터였다. 크라우스 공작이 이들을 살려 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티 타임이 한창 진행될 무렵이었다.
“아가씨! 폐하께서 떠나셨다고 하십니다!”
멀리서 하녀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하시기로 했습니다.”
“뭐? 잠깐만. 기사단이라니?”
하녀가 주변 귀족들을 슬쩍 살핀 뒤 말했다.
“주변 영주들이 황제에게 반역을 선언했습니다. 간밤에 군사를 모은 모양입니다.”
“……!”
릴리벳이 굳었다.
‘황제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럼 내 위치가 애매해져!’
그녀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작 각하는? 공작 각하께서도 거기에 동의하셔서 기사단을 출정시키신 거니?”
“거기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기사단을 출정시키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분명 밤새 낌새가 있었을 텐데…….”
“공작 각하의 명이셨습니다. 아가씨가 신경 쓰실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릴리벳에게 벌벌 떠는 것 같던 하녀는 크라우스 공작의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냉랭한 낯을 했다.
그 태도 변화에 릴리벳은 더 어안이벙벙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공작 각하께서 괜히 기사단을 준비했을 리 없어. 이건 분명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시작된 반란이야.’
그렇다는 건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황제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주변을 경계하느라 전력이 많이 약해져 있을 테니까…….’
릴리벳은 이내 이 상황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실권을 잃으면, 자신이 미아를 해치려 한 게 들통나도 상관없을 것이다.
반란이 성공하면? 미아 역시도 죽을 테니 자신이 기밀을 유출한 게 큰일로 불거지지 않을 터였다.
릴리벳이 재빨리 귀족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어떡하죠? 저는 급한 용무가 있어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즐기다 가시길.”
릴리벳은 대답도 듣지 않고 통보한 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공작 각하께 가자.”
다행히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아직 떠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릴리벳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바로 떠났을 줄 알았는데, 마치 자신을 기다린 것만 같은…….
‘괜한 생각 하지 말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털어 내곤 크라우스 공작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격다짐으로 떠나신 걸 발견했다. 신하 된 이로서 인사를 올리러 가려는 참이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아는 상황인데도 참으로 태연한 남자였다. 릴리벳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 순간, 크라우스 공작의 길게 찢어진 눈이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번득였다.
“그러도록 해라.”
* * *
몇 시간 뒤.
황제가 탄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트막한 언덕의 가장 윗부분이었다. 군대를 발견한 황제의 마차는 천천히 멈춰 섰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 역시도 냉랭한 얼굴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페나트 백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가죽 한 장 베지 못할 것 같은 장식용 검을 치켜들고서 마법석에 대고 말했다.
“폭군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정의의 칼을 받아라!”
라쉬트 평야에 페나트 백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차에서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비 때문에 못 들은 건가?’
페나트 백작이 다시 외치려던 찰나.
달칵.
마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마차에서 걸어 나왔다.
그에 맞춰 주변의 기사들이 절도 있게 그에게 경례했다. 마치 주변의 위협 따위는 경계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지대가 약간 높았기 때문에 그 모습은 주변의 모든 이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딜로트는 기사 중 한 명이 우산을 씌워 주려는 것을 손으로 제지하고 평야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섰다.
영주들,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에겐 그럴 만한 위엄이 있었다.
내리는 비도 황제의 위엄을 꺾진 못했으며, 도리어 그를 오히려 폭풍우를 몰고 온 사자처럼 보이게 했다.
“…….”
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젖은 은발이 반짝였다. 그는 그대로 무정한 낯으로 서서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옆에서 기사 한 명이 건넨 마법석에 대고 말했다.
“나를 불렀다고.”
고막을 녹이는 듯한 매끄러운 목소리였으나 붉은 눈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영주들은 동시에 크게 움찔했으나, 페나트 백작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렇다!”
아딜로트가 재밌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감히 황제를 불러낸 용건은?”
“우, 우리는 더는 네 폭정을 용납할 수 없다!”
“흠.”
아딜로트가 흥미롭다는 듯이 목을 울렸다. 그에 용기를 얻었는지 페나트 백작이 더 크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 오르퀘니나의 귀족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결의로 함께 뭉친 날이니!”
그는 그렇게 외치며 장식용 보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에 주변의 영주들도 부랴부랴 칼을 들었다.
“우리는 반드시 나라를 망치는 폭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자유와 선과 정의를 수호하리라!”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호응하듯 환호했다. 일단 기세를 타자 눈치를 보던 주변의 병사들도 덩달아 기세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만한 수라면……!’
‘전신도 군대가 있어야 전신이지!’
영주들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연신 칼을 하늘에 찔러 댔다.
그러나 그 순간, 아딜로트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이 상황이 몹시 재밌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찌 생각하나?”
“……?”
영주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거지?
그들 중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사람은 마이어 자작이었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