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그 말에 돌아서려던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그는 기가 막히다 못해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항상 근엄한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미덕인 기사들마저 질린 얼굴로 릴리벳을 바라보았다.
릴리벳은 그런 그들의 반응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했다.
“폐하와 미아 양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오늘 일로 확실해지지 않았나요?”
“그대 제정신인가?”
“물론이죠. 폐하께서 저와 혼인하셔서 황실과 크라우스 공작가의 합일을 이뤄내시는 게 대국적으로 오르퀘니나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 정도로 제정신입니다.”
“…….”
“폐하! 안 됩니다!”
아딜로트가 이번엔 장검으로 손을 옮겼다. 그 행동에 더 많은 기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들 역시도 별로 아딜로트를 말리고 싶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릴리벳은 그런 와중에도 우아하고 당당하게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내일 아침 다시 레벤토르로 출발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래는 만찬을 준비하려 하였으나, 아마 크라우스 공작가의 대접을 받지 않으시겠지요. 부디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미아 양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 * *
황제의 방을 빠져나온 릴리벳은 코너를 돌자마자 숨을 몰아쉬었다. 뒤늦게 오한이 찾아들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미쳤어……! 저런 사람이 어떻게 황제가 된 거야!?’
자신을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
그리고 당장이라도 자신을 발밑의 벌레처럼 찍 눌러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던 위압감.
어떻게 그 와중에도 할 말을 다 하고 나왔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 긴 드레스가 아니었다면 다리가 볼품없이 달달 떨리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을 것이다.
‘……괜찮아. 난 틀린 말을 하지도 않았는걸.’
릴리벳은 입술을 꾹 깨물고서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사장인 에른스트를 찾았다.
“에른스트. 여기 있나?”
“릴리벳 아가씨.”
집사장의 방에 있던 에른스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릴리벳을 자리로 안내한 뒤, 능숙하게 방문을 잠갔다. 무슨 얘기를 할지 이미 눈치챈 듯했다.
“도와줘. 미아를 죽여야 해.”
“가문의 암살자라면 이미 대기 중입니다.”
눈꺼풀이 늘어져 눈이 보이지도 않는 노집사가 담담히 말했다. 릴리벳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막아낼 거야. 황제가 지금까지 괜히 살아남은 게 아니니까. 그는 강해. 수면향 같은 건 없나?”
“황제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사들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릴리벳은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다른 이들은 어차피 공작가에서 주는 건 아무것도 먹지 않을 거야. 하지만…….’
릴리벳의 눈이 가늘어졌다.
“독이 좋겠어. 미아 양은 환자니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아냐? 음식에 섞어서 내 가지.”
“기사가 기미를 보지 않겠습니까?”
“해독제를 스푼에 발라 놔. 첫술만 속여 넘기면 돼.”
“독도, 해독제도 티가 나지 말아야겠군요.”
“그래. 쓸 만한 게 있나?”
“드러나지 않으며 가장 확실한 것…….”
에른스트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하나짜리 초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따라오시지요.”
릴리벳이 잠자코 그를 따랐다.
에른스트는 사용인의 길을 통해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비밀 통로의 입구를 연 뒤, 계속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여긴……?”
“외교적 해결 방안을 모아 놓은 방입니다. 본디 가주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으나, 가주님께서 특별히 릴리벳 님의 출입을 허하셨습니다.”
그 말에 릴리벳은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
‘역시 나는 특별해.’
곧 웅장하고 묵직한 원목 선반이 늘어선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에른스트는 그곳에서 푸른 방석 위에 올라가 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새끼손톱보다 작고 투명한 구슬 같은 것이 서너 개 들어 있었다.
“이건 뭐지?”
흔들리는 촛불 때문에 얼굴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노집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극독입니다. 무색, 무미, 무취. 가히 예술에 다다른 독이지요.”
에른스트는 옆의 선반에서 다른 유리병 역시 꺼냈다.
“해독제는 이것입니다.”
전의 병과 달리 해독제는 한 알밖에 없었다.
“……이거면 확실한가?”
“예. 빠르면 일다경, 늦어도 두 시간 안에 죽는 독입니다. 게다가 아마 무슨 독인지 분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독이 있다고?”
에른스트가 굵은 주름이 진 얼굴을 찡그리듯 웃었다.
“오래전에 크리소르 님께서 황립 의료원의 의원을 시켜 제조한 독입니다. 의원은 죽었지요. 혹시라도 제조법이나 해독법이 알려지지 않게끔 말입니다.”
“…….”
“불의의 사고로 제조법도 해독법도 모두 실전되었지만……, 달리 말하자면 해독조차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
릴리벳의 팔에 약한 소름이 돋았다.
‘명예로운 크라우스 공작가의 일원으로…….’
‘긍지 높은 크라우스가 되기 위해…….’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왔던 릴리벳이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크라우스의 어둠은 깊었다. 공작가의 이면은 다른 가문들과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피로 얼룩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들 위에 선다는 건 그런 거야.’
릴리벳이 병을 꽉 쥐었다.
녹색 불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본 집사 에른스트가 소리 없이 웃었다.
“하녀를 시켜 주방의 잔나에게 건네주라 하십시오. 주방의 일은 그 아이가 맡고 있으니, 알아서 처리해 줄 것입니다.”
곧 지하실에서 올라온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구에서 갈라졌다. 하녀를 부르러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릴리벳의 등 뒤에서 에른스트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아가씨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 * *
‘이런 곳까지 쭐레쭐레 황제를 따라오다니. 황후는 릴리벳 양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걸 슬쩍 주방의 하인에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되는 줄글.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미아가 반짝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 켈록…….”
미아가 중얼거리다 기침했을 때였다.
“몸은?”
침대 옆 윙체어에 앉아 있던 아딜로트가 뒤늦게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딜? 계속 여기 있었어?”
“응. 몸은?”
아딜로트가 손으로 미아의 이마를 쓸었다. 시원한 감촉에 미아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었다.
‘――야. 오늘은 어때?’
‘안 아파! 괜찮아!’
원래는 늘 그렇게 대답했지만, 이제는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말해 줬으니까.
“완전 힘들어…….”
미아가 힘없이 웃었다.
아딜로트는 희미하게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젖은 가제로 그녀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내일 레벤토르로 출발한 건데, 갈 수 있겠어?”
“안 돼도 가야 하지 않을까? 나 좀 죽을 뻔한 것 같은데.”
미아가 실실 웃었다. 감기 때문에 머리가 멍하긴 했어도 상황 파악이 안 되진 않았다.
“어떻게 됐어? 릴리벳은…….”
아딜로트는 한숨을 쉬고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릴리벳 크라우스가 클로이 뒤모어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한 모양이야.”
“아……. 그 사람 곧 죽겠네?”
“안 그러게끔 지켜봐야지.”
“전력 분산이구나, 음음…….”
미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크라우스 공작은?”
“아직은 움직임이 없어.”
“비료 기술 때문인 거지?”
“그렇겠지.”
“난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
아딜로트가 약간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론 나한테 미리 말하는 게 좋겠어.”
“그럴 걸 그랬다…….”
미아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보다 그러면…… 내일이네.”
“…….”
아딜로트는 놀랐다. 미아가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니야?”
“맞아. 아마도.”
미아는 눈 감은 채 원작을 떠올렸다.
‘저쪽은 아딜이 알아서 할 테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미아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실마리를 더듬었다.
원작에서 세레니티는 크라우스령 나들이에 함께한 릴리벳의 추종자들에게 미움을 산다. 릴리벳이 황후가 되는 걸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릴리벳의 추종자들은 주방의 사용인을 매수해 세레니티가 먹을 음식에 설사약을 섞는다. 하지만 그 음식은 결국 본인들이 먹게 된다.
‘지금까지 원작이 완벽하게 일치했던 적은 없어. 하지만 늘 형식은 비슷했지. 대상이 나일 뿐…….’
테레지아 카르디날레의 수작으로 폭발했던 세크레 호수의 보트.
힐데가르트가 뿌렸던 레기아 용액.
‘이번에도 비슷하게 진행된다면…….’
아니. 비슷하진 않을 것이다. 릴리벳의 추종자들이 앙증맞게 설사약이나 섞는 이들이라면, 릴리벳은 더 지독한 사람이니까.
게다가 그녀는 이미 한번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렇게 계속된 미아의 생각은 하나로 이어졌다.
‘이게 뭔가요?’
‘극독이네.’
아닐 거라고 낙관하기엔 이놈의 소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미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뭐. 오히려 땡큐지.’
판이 클수록 판돈은 올라가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 방법이라면 크라우스 공작까지 엮을 수 있었다.
“……아딜. 내 짐 좀 살펴 줄래?”
점점 거칠어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아딜로트는 이유도 묻지 않고 잠자코 기사를 시켜 미아의 짐을 들고 오게 했다.
“콜록. 보석함 제일 안쪽에…… 유리병이 세 개가 있어.”
미아의 말대로 유리병 세 개를 발견한 아딜로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맞을걸?”
미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유리병 세 개에는 각각 하나 남은 독약, 지로티 공작이 준 미완성 해독제, 그리고 렌나의 정보로 완성한 해독제가 들어 있었다.
‘아가씨, 이걸 해독법은 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네? 렌나요? 허……?’
미아가 크라우스 공작령으로 떠나기 전 급하게 찾아온 엠브라는 그렇게 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아딜로트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자 목을 울리며 한숨 쉬었다.
“이걸로 뭘 할 생각인데?”
미아가 배시시 웃었다.
“일단은 쫌 재수 없는 애한테 먹여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