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내일까지는 비가 그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기사, 리베로 클라티에가 말했다.
기사단은 현재 아딜로트의 방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딜로트는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고생 좀 하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연신 침실과 연결된 방문을 흘끔거렸다. 침실 안에서는 계속해서 미아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목은 크라우스 공작가의 상주 신관 덕에 치유했으나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만 것이다.
금방 나을 거라고 말하며 순식간에 잠든 그녀는 숨이 거칠어졌다가 안정되기를 반복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황제의 얼굴에 초조함이 떠오르는 것을 본 기사가 이어 보고했다.
“예. 무리하게 마차를 출발시킬 수도 있긴 합니다만, 만약 그러다 상태가 나빠지면 대처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가 탔던 말은?”
“뾰족한 것으로 찌른 흔적이 있었습니다만, 넘어지면서 생긴 다른 상처에 섞여서 증거로 쓰기엔 힘들 듯합니다.”
아딜로트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원인은 역시 크라우스 공작가의 비료 기술인가.’
미아가 천연덕스럽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땐 아딜로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라우스 공작가는 황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비료 기술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렇게 단번에, 그것도 곁눈질만으로.
게다가 미아는 ‘이제 그걸 공개해도 되겠다’고 말했다.
‘릴리벳 크라우스는 정말로 당황한 눈치였어. 분명 크라우스 공작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갔을 거다.’
아딜로트가 중얼거렸다.
“오늘 안에 죽이려 들겠군.”
“…….”
무심한 말에 기사들은 조용히 기운을 가다듬었다. 아주 오랜만의 제대로 된 ‘싸움’이었다.
그때, 기사 중 한 명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거 꼭 그때 같지 않습니까? 리겐하이드 산악전이요.”
그를 시작으로 기사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그땐 바이지겔 부단장님이 계셨잖나.”
“안 계시면 안 계시는 대로 하면 되지.”
“그때보단 낫다. 새벽이슬은 안 맞아도 되니까.”
그게 절대 긴장을 풀어서가 아님을 아는 아딜로트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지키는 싸움이라는 것만 좀 다르군요.”
“아니지. 그때도 지켜야 할 건 있었지.”
짧고 굵은 대화의 끝에서 모두의 시선이 아딜로트에게 향했다.
라지푸트 때부터 생사를 넘겨 가며 동고동락해 온 기사들의 담담한 눈빛에 아딜로트는 옅게 실소했다.
“퍽이나.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걸 살려 준 게 누군데.”
“폐하는 좀 반칙입니다.”
“맞습니다. 황족이랑 일반인을 비교하는 건 조금 너무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지켜야 할 건 진짜 일반인이니까요. 폐하 때랑 달리 정말로 힘내야겠습니다.”
“잘도 그땐 대충 했다고 고백하는군.”
아딜로트가 픽 웃으며 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는?”
“모두 응접실에 가둬 놨습니다.”
“나는 미아 옆을 떠날 수 없으니 리베로 경, 자네가 맡아서 진행하도록.”
그때, 리베로 경 옆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폐하. 혹시 단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
옆에서 다른 기사들이 재빨리 옆구리를 찌르고 발을 밟고 등을 강타했으나 질문은 이미 나온 뒤였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잠깐 유해졌던 아딜로트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페르디안은 따로 하달한 명령이 있어. 이번 호위에서는 제한다.”
“…….”
질문을 꺼냈던 기사도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아딜로트가 미아를 좇아 숲으로 향한 뒤, 페르디안이 보였던 모습이 그제야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하인이 다른 말 하나를 붙잡아 오자마자 거기에 올라타서 말했다.
‘나는 폐하의 애완동물을 찾으러 다녀오겠다.’
‘예? 하지만 단장님. 폐하께서는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리베로 경. 자네에게 조사를 일임하지.’
‘단장님!’
페르디안은 그대로 말을 타고 빗속을 달려나갔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늘 아딜로트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던 페르디안 키토가 명령 불복종이라니.
즉결처형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다.
기사들이 침묵했다. 그들은 뼛속까지 아딜로트의 기사였기 때문에, 페르디안이 문책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의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방 안에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던 그때였다.
똑. 똑똑똑. 똑.
암구호로 이루어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곧 문밖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 한 명이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폐하.”
“무슨 일인가?”
자리에 없는 페르디안 대신 가장 기수가 높은 리베로가 반응했다.
“방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거절해라.”
“그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미아 님을 해친 범인이라고 자백하고 있거든요.”
“뭐?”
“그리고…….”
기사는 옆을 흘끗 본 뒤 말했다.
“릴리벳 크라우스 님도 함께 계십니다. 범인임을 자백하도록 ‘설득’했다고 합니다.”
* * *
찾아온 사람은 이번 나들이 함께 초대받은 귀족 영애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은 클로이 뒤모어.
밀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그녀는 아딜로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그랬어요……. 제가 미아 님을 해치려 한 버, 범인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연신 불안하게 뒤쪽을 흘끔거렸다. 릴리벳이 있는 쪽이었다.
클로이 뒤모어와 함께 방에 들어온 릴리벳은 내내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아딜로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떻게? 그때 분명 미아와 떨어져 있었을 텐데.”
“하, 하인을 시켜서 미아 님이 탄 말을 찌르게 했어요.”
“왜.”
“폐, 폐하를 연모하고 있었기에 미아 양을 질투해서…….”
그 말에 아딜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이 앞으로 다가갔다.
피에 미쳤다는 황제가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자 클로이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 얼굴로 잘도 나를 연모한다고 지껄이는군.”
아딜로트가 비소했다.
그때, 릴리벳이 나섰다.
“폐하. 너무 그녀를 위협하진 말아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새빨간 눈이 릴리벳을 향했지만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뒤모어 양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큰 실수였지만, 미아 양도 무사하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대에게 발언을 허락했지?”
“실례했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그만.”
아딜로트가 다시 한번 냉소했다.
“그래. 크라우스 공작가의 가신이,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황제의 애완동물을 건드렸다. 이게 어떤 사태로 이어질지 잘도 몰랐겠군.”
“…….”
“게다가 일을 저질러 놓고 릴리벳 크라우스에게 들킨 데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설득에 감화되어 자백할 용기를 얻었다…….”
릴리벳이 차분하게 아딜로트를 응시하다 빙긋 웃었다.
“문제라도 있나요?”
아딜로트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갑자기 무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얹고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폐하!”
“여기서는 안 됩니다!”
그 모습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기사 여럿이 재빨리 들러붙었다.
아딜로트는 그 상태로 한참을 먹잇감을 노리는 범처럼 릴리벳을 응시하다가 이내 짜증스럽게 기사들을 털어 냈다.
“그래서 결국 크라우스 공작가는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뜻이군?”
“크라우스 공작가가 왜 미아 님을 해치려 들겠어요? 그런 일이 있다간 누가 봐도 공작가가 용의 선상에 오를 텐데 말이에요. 저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네가 멍청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어서 그 주장은 못 믿겠군.”
“…….”
릴리벳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딜로트는 그런 그녀를 올연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클로이 뒤모어를 향해 말했다.
“거짓 자백을 강요당했을 테니 가둬 놔.”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범인이 맞……!”
“계속 그렇게 주장해 주면 좋겠어. 그래야 레벤토르로 데려가서 마법으로 기억을 헤집을 수 있으니까.”
클로이 뒤모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법사가 워낙 귀하기 때문에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마법을 이용해 자백을 받아내면 그 사람은 반드시 미친다고들 알려져 있었다.
곧 클로이 뒤모어의 양팔이 기사들에게 붙잡혔다.
“리, 릴리벳 님……! 릴리벳 님!”
끌려가는 클로이는 연신 릴리벳을 돌아보았지만, 릴리벳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오만하고 당당하게, 그러나 약간 수심에 잠긴 낯을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클로이가 사라지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뒤모어 양이 그런 잔인한 일을 저질렀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변명은 잘 들었으니 나가.”
“그녀를 사형시키실 건가요?”
아딜로트가 냉소 지었다.
“누구 좋으라고?”
“미아 양을 위해서죠. 그런 일을 당했으니 범인을 처벌하는 게 그녀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미아가 너처럼 잔인…….”
한 줄 아느냐고 말하려던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미아라면 훌쩍이면서 목을 치라고 할 것 같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녀가 진범일 때의 이야기지.”
“계속해서 있지도 않은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말씀하시는군요.”
릴리벳이 약간의 안타까움 사이에 슬쩍 한심하다는 눈빛을 섞으며 말했다.
“그냥 저랑 혼인하시면 미아 양이 다치는 일도 없었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