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미아!”
그리고 정말로 얼마 안 있어 아딜로트가 말에 탄 채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너…….”
미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늘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사는 아딜로트가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급하다 못해 절박하고, 절박하다 못해 절망적이던 낯이 그녀를 본 순간 안도로 가득 찼다.
신에게 감사하는 얼굴.
미아의 시선이 스르르 아딜로트의 어깨로 향했다. 이 빗속을 얼마나 헤맨 건지, 자신보다 더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힌 미아는 아딜로트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아딜로트는 내팽개치듯 말에서 내려와 미아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미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
나무 아래에서 말라 가던 몸에 물기가 옮아왔다. 그녀를 끌어안은 아딜로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아는 아딜로트의 품에 안긴 채, 그가 몇 번이고 말과 숨을 삼키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는 것을 들었다.
“다행이다…….”
“…….”
그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겨우 진정이 되고 나서야 몸을 조금 떼어 냈다. 걱정 가득한 붉은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다친 곳은?”
얼마나 이름을 부르고 다닌 건지 잔뜩 쉰 목소리였다. 미아는 되레 자신이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색을 흐렸다.
“발목을 살짝 삐어서…….”
“어디 봐.”
미아가 살짝 발목을 내밀었고, 아딜로트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발목을 살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다행히 상태가 심하진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치료받으면 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제 옷을 북북 찢어 미아의 발목을 감쌌다. 국보를 다루래도 저렇게 소중하게 다루진 못할 것이다.
시중들 듯이 자신을 돌보는 아딜로트의 모습에 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묻고 말았다.
“왜……. 왜 그렇게 잘해 줘?”
난 네게 지금 이 순간에도 확답을 줄 수가 없는데.
“…….”
그녀의 느닷없는 물음에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말하면 또 내 옆에서 떠나고 싶어 할 거잖아.”
미아가 약하게 숨을 들이켰다.
“더는 전처럼 내 방에 찾아오지도 않을 거고.”
아딜로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계속 나를 피해 다닐 거고.”
점점 격앙되는 듯한 감정을 빗소리에 숨기고서 그는 차분히 말했다.
“그럼 나는 또 네가 다른 사람이랑 이런 곳에 오는 걸 봐야 하잖아.”
솨아아.
빗소리가 정적을 감싸안았다.
미아는 울상을 지은 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아딜로트는 약한 기대마저 버렸다. 그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강요는 아니…….”
“난 모르겠어!”
그 순간, 미아가 버럭 외쳤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빗속에서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아딜을 좋아하는지!”
“…….”
미아가 내뱉은 말이 아딜로트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짐작했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태연한 척 목을 한번 울리고는 입을 열었다.
“알고 있―”
“그리고 미아 슈뢰더는 이상하잖아!”
“…….”
뭐.
애절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깨져 나갔다. 약간 멍해진 아딜로트를 두고 미아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훌쩍였다.
“그, 그리고 황제랑 결혼하면 꼭 자식 낳아야 하잖아. 나, 난 아직 그런 거 무서운데!”
“……꼭 낳을 필요는…….”
“안 낳으면 난 미래에 태자도 못 낳은 선황후가 되어서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당하고 말 거야!”
“…….”
아니,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소박하게 아들딸 이름이나 지어 놓았던 아딜로트는 잠시 공황 상태가 되었다.
우리 지금 좀 진지한 분위기 아니었던가?
하지만 미아는 오히려 정말 진지하다는 듯이, 아주 큰 비밀인데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이 외쳤다.
“그리고 엄마가 결혼은 서른 넘어서 하랬단 말야! 난 아직 열아홉인데!”
“……그럼 서른만 넘기면 되는 거야?”
아딜로트가 슬쩍 물었다. 미아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냉큼 코 꿰였다가 더 좋은 신랑감 나타나면 어떡해!”
“…….”
“게다가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단 말야……! 화, 황후 되면 맨날 일해야 할 텐데…….”
아딜로트는 한참을 멍하니 그녀의 말을 곱씹다가 물었다.
“그게 문제였던 거야? 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보다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지도 몰라서?”
“그래! 황제랑은 연애하다 헤어지는 거 못 하잖아! 취소도 못 하는 선택이잖아!”
그렇긴 하지……. 묘하게 설득되는 주장이었다. 아딜로트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나, 난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연애도 해 보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고, 그리고 정말 이게 선택이 최선인지도 확신을 못 하겠어…….”
미아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후드득 떨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내가 아딜한테 결혼하지 말라고 해…….”
아딜로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열심히 자신의 이기심을 피력하며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그러니까 말하자면…….
“신경 쓰여?”
아딜로트가 불쑥 몸을 내밀었다. 그에 움찔한 미아가 처진 눈을 깜빡였다. 그는 뭔가에 갈급한 듯이 미아를 응시했다.
“넌 그때 ‘모르겠다’고 했지만…….”
“…….”
“사실은 내가 신경 쓰이는 거지?”
울상을 지은 채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리는 미아를 보며 아딜로트는 불안해졌다.
또 그놈의 이기적이니 뭐니 하는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정작 저는 지금 그 한마디에 안달이 났는데.
아딜로트가 초조함을 숨기고 달래듯 속삭였다.
“그냥 말해. 다른 건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좋은 기회든 뭐든 상관없어. 내가 알아서 해. 지금 당장 너한테 뭔가 결정하라는 것도 아니야.”
“…….”
“나중에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아딜로트는 잠시 그 불편한 상상을 하기 위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생각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살아 있으면 갈아타도 돼.”
“……!?”
입을 마름모 모양으로 벌리고 경악하는 미아를 보며 아딜로트가 고개를 좀 더 가까이했다.
“그냥…… 지금 한마디만 해.”
비에 젖어 상기된 뺨과 맑고 투명한 분홍색 눈이 코앞이었다. 아딜로트가 유혹하듯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다른 여자랑 있는 게 신경 쓰이고.”
미아는 서서히 숨을 멈췄다. 그에 따라 그녀의 분홍색 눈이 커졌다.
“내가 점점 남자로 보인다고.”
아딜로트는 재촉하지 않았다.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저 미아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
시선에 사로잡힌 양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굳어 있던 미아는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뭔가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바들바들 떨며 속삭였다.
“……쪼끔…….”
수치심에 겨워 울먹이는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 본인도 모르게 옷자락을 잡아 오는 손가락.
아딜로트가 숨을 참았다.
그는 목을 몇 번 울리고,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것으로 간신히 뭔가를 참아 낸 뒤, 몸을 물렸다.
“하…….”
갑자기 모든 긴장이 풀린 기분이었다.
“……아딜?”
미아가 그런 그를 보고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아딜로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가자. 더 있다간 감기 걸리겠어.”
아딜로트가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미아를 안아 올렸다. 미아는 울상 짓던 얼굴 그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이기적이라고 안 해?”
“뭐가.”
“확답도 없이 황제 혼삿길을 막고 있는데…….”
“그 황제도 제법 이기적이라서 지금 그냥 좋아 죽을 것 같으니까 괜찮아. 나라는 알아서 하라고 그래.”
“…….”
황제가 한 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그 표현에 미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또 황제는 그러면 안 된다느니 설교하려나.
아딜로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미아는 머뭇거리다 그의 목을 답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이기적인 외모지상주의자야…….”
그제야 드는 진짜 안도감에 아딜로트가 헛웃음 쳤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폐하! 미아 님!”
미아를 코트로 꽁꽁 감싸고 다시 길로 나가자, 멀리서 기사들이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실로 돌아온 아딜로트는 그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미아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릴리벳 크라우스지?”
아딜로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꽈르릉!
저택을 부술 듯 울려 퍼지는 천둥 소리에 릴리벳은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몸을 씻고 쉬는 중이었으나, 그녀는 씻는 것도 마다한 채 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쾅!
“폐하 돌아오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