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페르디안과 함께 말에 올라탄 뒤, 미아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딜로트와 릴리벳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곧 오솔길 양옆을 가린 숲에 의해 가려졌다.
‘……잘 어울리네.’
당당하고 똑 부러진 인상의 릴리벳과 서늘하고 무심하고 아딜로트. 일단 구도가 된다.
‘게다가 황족이랑 크라우스 공작가고…….’
그래서 릴리벳이 그렇게나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것이리라. 방계여도 크라우스 공작가였으니까.
“뒤를 보면 위험하다.”
그때, 머리 위에서 들려온 페르디안의 말에 미아가 아차 하고 몸을 돌렸다.
정면을 보자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언덕과 숲의 정경에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미아의 머릿속에서는 식사 시간에 릴리벳과 아딜로트가 밀착해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딜 자기 몸에 닿는 거 싫어하는데.’
물론 그때 아딜로트의 표정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릴리벳을 쳐 낸 것도 아니었다.
“……에휴우.”
어쩐지 조금 답답한 기분이었다. 금세 시무룩해진 미아는 머뭇거리다 페르디안에게 물었다.
“페르. 보통 릴리벳 같은 영애가 옆에 있으면…… 좋아하게 되겠죠?”
“…….”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한 것 같던 페르디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별로 내키는 주제는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그녀는 크라우스 공작가 출신이다. 개인의 호오를 떠나 누구라도 그녀와 연을 맺고 싶어 할 확률이 높다.”
“그렇겠죠…….”
미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당하게 아딜로트를 올려다보던 릴리벳과, 팔짱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딜로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닌 사람도 있다.”
그때, 페르디안이 말했다.
“네?”
“가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치만 역시 기왕 결혼하려면 상대방이 부잣집에 세도가인 게 좋지 않을까요?”
미아의 물음에 페르디안이 다시 한번 침묵했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귀족인 이상 정략혼은 당연한 거고, 가문에 도움이 되는 혼처를 찾아야 한다고.”
“예전이요?”
“지금은 달라.”
“달라요?”
“그런 건 정말 소중한 상대를 못 만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
잠시 페르디안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미아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건…… 페르가 그런 상대를 만났단 소리?”
“…….”
페르디안은 다시 또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빈자리는 숲을 흔드는 거센 바람 소리가 채웠다.
이윽고 페르디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것 같다.”
쿵. 쿵쿵.
맞닿은 몸을 통해 그의 심장 소리가 더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미아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그, 그렇구나…….”
그 모습에 페르디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니까.”
“…….”
페르디안은 굳은 미아를 내버려 둔 채, 비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 * *
일행들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시작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먹구름이 무섭게 몰려들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 도착해 있던 영애 중 한 명은 페르디안 앞에 타고 있는 미아를 보곤 의아하게 물었다.
“미아 양. 얼굴이 빨간데, 감기가 있으신가요?”
“네!? 아, 아뇨…….”
화들짝 놀란 미아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페르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괜히.’
그러고는 제 뺨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딜은 아직 안 온 건가?’
아직 숲에 있는지 아딜로트를 호위하는 붉은 사자 기사단이 보이지 않았다. 마주친 적이 없으니,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그때, 페르디안이 숙녀용 우산을 들고 다가왔다.
“내리는 것을 도와주마.”
“아.”
프릴이 잔뜩 달린 우산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스워 미아가 슬쩍 미소 지었다.
“좀 더 타고 있어도 돼요? 저 말 탄 거 처음이라 재밌어서!”
등자에 끼운 발을 괜히 흔들며 미아가 말했다. 다행히 페르디안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우산을 들어라. 고삐는 내가 쥐고 천천히 걷게 할 테니.”
“와! 고마워요!”
페르디안은 그대로 일행과 조금 떨어져서 말을 걷게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릴리벳은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댄 그냥 미아를 깔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나를 끌어들여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릴리벳이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절대 그런 게 아냐. 난 그냥 더 적합한 사람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미로미스 전로와 지로티 전로의 개발.
세빌 상회와 호흐실트 후작의 몰락.
흘낏 본 것만으로 크라우스 공작가의 비료 기술을 파헤친 것까지.
굳이 따지자면 미아가 지금까지 해낸 일은 한 사람이 하나를 하기에도 어려운 일이었으나 릴리벳은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때, 공작저 방향에서 누군가 당나귀를 타고 릴리벳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크라우스 공작 각하의 서신입니다.”
“……!”
릴리벳은 재빨리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일행들은 그녀와 거리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왜 마차보다 당나귀가 빨리 도착한 거지?’
릴리벳이 의아해하며 서신의 인장을 뜯었다.
그리고 드러난 편지의 내용에, 그녀는 멈칫하고 말았다.
⌜참새에게
솔개가.⌟
받는 이와 보낸 이만 있는 간결한 편지였지만, 릴리벳은 그것을 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녀는 황후가 되기 위해 많은 문학을 탐독해 왔다. 특히 그중에는 아주 유명하면서 약간은 잔인한 고전 동요가 하나 있었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
⌜참새가 말했네. 내가 죽였다네.⌟
⌜누가 관을 운구하겠나?⌟
⌜솔개가 말했네. 내가 운구하겠네.⌟
크라우스 공작이 보낸 메시지는 명확했다.
―미아 셀레스티얼을 죽여라.
릴리벳은 혼란으로 머리가 뒤엉킨 와중에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쪽지를 구긴 뒤, 하인에게 넘겨주었다.
“태워 버려.”
그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자리에 우뚝 섰다. 그녀는 반듯한 이마를 찡그렸다.
‘나더러 직접…… 죽이라고? 아무리 가문의 기밀을 알아 버렸다지만.’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어쨌든 이건 살인 교사였다. 정당하지 못했다.
‘안 돼. 이건 아니야.’
릴리벳이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게 생각한 릴리벳이 다시 하인에게 몸을 돌렸다.
“너. 지금 당장 다시 공작 각하께 가서―”
그때였다. 말을 다 잇지 못한 채로 그녀가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쪽지를 가져온 남루한 행색의 하인이 빗줄기 사이에서 지긋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릴리벳은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쳐 오는 걸 느꼈다.
‘감시자야.’
그녀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알았는지 하인이 미아가 있는 쪽을 향해 턱짓했다.
“……!”
릴리벳은 그제야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크라우스 가문의 기밀이 까발려진 것이다.
그것도 릴리벳 크라우스의 초대로!
‘안 돼!’
이 일이 퍼졌다간 자신의 명예는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이다.
미아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그 기술을 알고 있던 모양이지만, 결국 그걸 풀게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미아를 이번 나들이에 초대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얌전히 그걸 떠벌리지 않은 채 살아갔을 테니까.
그러니 그런 미아를 죽이라는 것은…….
‘이 자리의 모두를 죽여서라도 이 일을 덮겠단 뜻.’
릴리벳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나도 죽이겠다는 거야?’
크라우스 공작이 황제까지 죽일 생각인지, 미아와 주변인만 처리할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가, 저 먼 곳에서, 지금 여기 있는 자신에게 미아를 죽이라고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 건 자신이 될 터였다.
‘……어떻게든 해야 해!’
릴리벳은 숨을 들이켠 뒤, 저도 모르게 뱀처럼 쉭쉭댔다.
“……키토 후작을 유인해!”
“…….”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움직였다.
릴리벳은 페르디안이 미아에게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스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폭풍에 가까워진 바람 때문에 뺨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어.’
‘하지만 내 손을 더럽히는 건 싫어.’
‘나는 황후의 재목이야.’
‘미아보단 내가 더 가치 있어.’
‘날 죽이는 건 큰 손실이란 말야.’
자신감을 되찾은 릴리벳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름답지만 소름 끼치도록 일그러진 미소였다.
‘그래. 그렇잖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좀 더 가치 있는 인간이 사는 게 낫잖아!’
빗줄기는 점점 세지고 있었다. 다 함께 모여 있던 귀족들이 왜 마차가 오지 않느냐고 투덜거렸다.
아마 그마저 크라우스 공작의 계획이겠지.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든 다 끝내고 오라는 의지를 느꼈다.
그리고 그때, 매가 날아오르는 리기모어 숲에서 황제와 그의 기사들이 돌아오는 광경이 보였다.
‘안 돼. 더 늦으면……!’
릴리벳은 황제가 말에서 내리는 것까지 확인한 뒤 재빨리 미아에게 다가갔다.
미아는 말 위에서 재밌다는 듯이 말 갈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신기해……. 꺼칠꺼칠해…….”
마침 미아 주변으로는 말들이 모여 있었다. 말들은 은근한 천둥소리에 겁먹었는지 연신 투레질 중이었다.
‘저는 말을 못 모는데…….’
미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릴리벳은 남에게 의심 사지 않을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미아에게 다가갔다.
“……릴리벳 양?”
“내리는 걸 도와주려고요.”
“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미아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 순간, 마치 누가 일부러 릴리벳에게 기회라도 주듯이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이 울려 퍼졌다.
꽈르르릉!
“히히힝!”
말 몇 마리가 놀라 거칠게 투레질한 그 순간.
“―!”
‘미안해요! 이건 대의를 위해서예요!’
릴리벳은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브로치로 미아가 탄 말을 깊게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