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40화 (140/193)

140화

‘젠타리아 출신의 레아 황비는 같은 젠타리아 출신의 호위 기사와 몹시 각별한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저희는 황가 슈뢰더가 아닌 이민족의 핏줄에게 고개 숙이고 있었단 뜻이 됩니다!’

그렇게 주장한 것은 어느 하급 귀족이었다. 물론 그 뒤에는 크리소르 황태후가 있었고 말이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으나, 문제는 그걸 증명할 방도가 없었다.

레아 황비는 이런 일을 예상해 미리 선황제와 전대 대신관에게 공증을 받아 놓았으나, 그 공증 서류는 사변이 있던 날 소실되었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여 원래대로라면 대신관이 황제의 무결함을 증명해야 했다. 대신관쯤 되는 이는 신의 힘으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전은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미덕입니다.’

하지만 크리소르 황태후에게 매수된 대신관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아딜로트가 출신을 의심받으며 비난받기 시작한 그때.

세레니티는 크리소르 황태후의 흉계 때문에 한 번 더 세크레 호수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거기서 선황제와 전 대신관의 공증 서류가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게 크리소르의 계략이었던 것이 밝혀지자, 대신관은 그녀와 내통한 정황이 드러나 신전에서 내쫓기게 된다.

‘그 이후에 새로 대신관이 된 게 드미트리인가 보지.’

다행히 원작에서 차기 대신관은 선한 인물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아딜 편으로 만들어 두면 좋겠는데…….”

미아의 중얼거림에 페르디안이 냉소를 비쳤다.

“가능할 리 없지. 신관들은 늘 입으로만 선행을 베푸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지.’

레아 황비가 죽은 뒤, 아딜로트는 어릴 때 한번 신전에 도움을 청한 적이 있다. 진실을 밝히고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지만 신전은 그 요청을 외면했다.

크리소르 황태후의 눈치를 본 것이다. 그때만 해도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게 확실했으니까.

‘뭐. 줄을 잘못 섰다는 건 나중에 밝혀질 테니까.’

미아가 세크레 호수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려던 찰나, 어느새 멀찍이 거리를 벌린 페르디안이 그녀를 불렀다.

“거기서 뭐하고 있나.”

“네?”

“바래다 주마.”

미아는 눈을 깜빡였다가 쪼르르 그의 옆에 가서 섰다. 흘낏 올려다본 페르디안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어쩐지 페르는 요즘 들어 정말 친절해졌어.’

만나자마자 죽여야 한다느니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에 반해, 아딜로트와는 그때보다 더 서먹해진 듯했다.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는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아딜로트 역시도 그녀를 딱히 찾지 않는 듯했다.

미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폐하는 릴리벳 크라우스와 혼인하지 않을 거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말에 미아가 고개를 들었다. 페르디안이 무거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축 처져 있을 필요 없다.”

“……페르가 어떻게 알아요. 아딜이 할지 안 할지.”

미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그에 페르디안은 무심히 대꾸했다.

“나라면 안 했을 테니까.”

“……?”

이해할 수 없는 가정에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페르디안의 잿빛 눈이 살짝 떨리는가 싶더니, 그가 정면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여차하면 재상이 네 신병을 맡아 줄 테니.”

“흐음. 요아힘은 페르가 맡아 줄 거랬는데.”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페르디안의 얼굴에 일순 놀람이 스쳤다.

“재상이 그렇게 말했다고?”

“네!”

“……그렇군.”

페르디안의 얼굴에 복잡다단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대로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키토 후작가가 네 신병을 맡겠다.”

“안 그래도 되는…….”

“억지로 하는 게 아니다.”

페르디안이 물끄러미 미아를 응시하다 말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그 정도 친분은 쌓았다고 생각했다만.”

페르디안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괜히 쑥스러워진 미아가 뺨을 긁적였다.

“그, 그런가…….”

“그리고 이건 명령이 아니라, 요청이다.”

“……?”

페르디안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코앞에 있는 황제궁을 흘낏 보더니 반대 방향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 바람에 미아의 시선은 페르디안을 따라 움직였고, 그녀의 시야에서는 황제궁이 완전히 사라졌다.

여름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잿빛 눈의 기사가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이쪽을 선택해라.”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페르디안의 길고 검은 머리가 흩날렸다. 갸름하고 고운 얼굴의 기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재상이나 세레니티 듀레인 말고.”

미아는 조금 머뭇거렸다. 이상하게 속이 간지러웠다.

‘아딜의 과거를 자기가 뒤집어쓰겠다는…… 그런 거겠지?’

그런 추측에 도달한 미아는 물끄러미 페르디안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게 맞을 텐데도.

미동도 없이, 어쩐지 조금 긴장한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의 모습에서는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페르는 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 줘?”

미아는 부지불식간에 입을 열었다.

“…….”

질문을 들은 순간 페르디안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먹구름색의 눈이 뭔가를 고해하고 싶은 사람처럼 흔들렸다. 그러다 문득, 그가 손을 올렸다. 저도 모르게 한 듯한 행동이었다.

“그건…….”

페르디안의 손은 천천히 올라와 미아의 머리카락을 쥘 듯 가까워졌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그의 손끝에 닿을 것 같던 미아의 머리카락도 그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페르디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져 나갔다.

“내가 미련하기 때문이겠지.”

* * *

며칠 뒤. 중앙궁 황제의 집무실에는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우아한 린넨 드레스를 차려입은 릴리벳 크라우스였다. 그녀는 대뜸 찾아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공작령으로 함께 나들이를 가시지 않겠어요?”

“…….”

서류를 보던 아딜로트가 고개를 들었다.

릴리벳은 조금 움찔했다.

황제는 며칠 사이에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그래도 만사에 무심해 보였는데, 지금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칼로 찌를 것만 같이 섬찟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아직 저희 만남은 두 번이 남았죠.”

릴리벳이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그중 한 번을 이번 나들이로 하시죠.”

마침내 아딜로트가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는 눈이 없어?”

그 말에 릴리벳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류의 산이 보였다. 그녀는 우아하게 그 광경을 외면했다.

“바쁘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면 저와의 혼인을 수락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저도 바로 실무를 도울 수 있게끔 공부했습니다.”

“공부랑 현장은 달라. 그것도 모르면서 누굴 돕겠다고.”

“폐하…….”

옆에서는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 난처하게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아딜로트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눈치였기에 릴리벳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지원이 있다면 앞으로의 일은 더 쉬워지겠죠. 대국적으로 상황을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폐하?”

“그대 눈이 황제의 눈보다 대국적이리라는 자신감만큼은 봐 줄 만하군. 나가.”

“단순히 나들이가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크라우스 공작령의 어디든 돌아볼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 말에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서늘한 붉은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릴리벳은 당당했다.

“크라우스 공작가에 궁금한 게 많으시겠죠. 적으로 돌아서더라도 이번 나들이에서 확인하신 부분은 폐하께 많은 도움이 될 거고요. 그렇지 않나요?”

“…….”

“다신 없을 기회예요. 그만큼 크라우스 공작 각하께서도 저희의 혼인에 많은 기대를 걸고 계신다는 뜻이고요.”

“그렇긴 한가 보군.”

아딜로트가 낮게 답했다. 그러나, 그러겠노라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십시오. 폐하.”

그때, 있는지도 모르게 서류의 산 뒤에 가려져 있던 요아힘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일은 저와 슐츠 공이 해 놓겠습니다.”

슐츠 공이 충격받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요아힘은 냉정했다.

“어차피 당장 궁에 계신다고 해도 미아 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싸우셨을 테니 말입니다.”

아딜로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니, 살벌해진 것에 가까웠다.

“네게 그런 것까지 얘기하던가?”

요아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크라우스 공작이 요청한 ‘면피용 만남’ 횟수는 두 번이 남았습니다.”

“질문에 대답이나 해.”

“다녀오시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

아딜로트가 눈을 찡그렸다.

그마저도 묘한 색기가 흐를 정도로 수려한 모습이었으나, 릴리벳은 등줄기에 달라붙는 선득한 살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너를 모르겠다. 요아힘.”

그 말에 요아힘이 멈칫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살짝 맞붙인 상태로 물끄러미 아딜로트를 응시했다.

그러다 안경을 벗으며, 순식간에 더 찬 낯빛을 하곤 말했다.

“아니요. 저는 늘 당신을 황제로 만들고자 애쓰던 그 요아힘 키르히입니다. 폐하는 제게 ‘살 만한 나라’를, 대신 저는 폐하께 제 두뇌를 드리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듣고 있던 릴리벳이 괜히 숨을 죽일 정도로 무정한 말이었다. 릴리벳은 아딜로트가 성을 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딜로트는 검을 뽑지 않았다. 오히려 똑같이 지긋이 요아힘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요아힘의 그것과 아주 비슷했지만 조금 더 무거웠고, 영혼을 관통하듯 매서웠다.

“네가 날 파악하고 있듯이 나도 널 파악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 요아힘.”

“…….”

“그것뿐만이 아니란 걸 내가 모를 거라고도 생각하지 말고.”

그 순간 요아힘의 얼굴에 희미한 낭패감이 서렸다.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 한마디로 철혈의 재상을 닥치게 만든 황제는 그대로 릴리벳을 쏘아보았다.

‘이런.’

그에게서 당장이라도 거절의 말이 나올 듯했기에 릴리벳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폐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뭔가 말하려던 아딜로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해 보라는 듯한 태도이기에 릴리벳은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는 오르퀘니나의 유일한 지배자이십니다. 폐하와 제가 혼인하면 나라는 더욱 부국강병해질 것이고 백성들은 더는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그걸,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크라우스 양. 슬슬 일어나는 것이…….”

슐츠 공작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그녀를 말리려 들었으나 릴리벳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곧 황후가 되리라는 자신감 때문인지 그녀의 동작에는 얼핏 위엄마저 서려 있었고, 그 탓에 슐츠 공작은 곤혹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폐하.”

릴리벳이 종전과는 태도를 바꿔 안타깝다는 듯이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