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미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영애는 집요하게 물었다.
“가슴이 뛰나요?”
“음. 가, 가까워지면요?”
“육체적 접촉 말고요! 그냥! 눈빛이 마주쳤을 때 찌르르 울리는 그거!”
“어…….”
미아가 새빨간 얼굴로 턱을 달각거렸다.
“있군요!”
“가, 가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유독 귀에 남거나 계속해서 떠오르진 않고요?”
“그, 그것도 가끔…….”
“나한테 화내면 괜히 섭섭하고?”
“네에…….”
이어진 질문에 대답하며 미아는 너무 긴장해서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서로 약점을 숨기는 사교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풋풋한 떨림은 다른 영애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어쩜. 첫사랑인가 봐.’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본인 마음도 아직 모르나 보네. 제일 좋을 때다.’
영애들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맞아요, 미아 양. 누구나 다 겪는 거니까…….”
“그, 그런 거예요? 그, 그치만 그런 생각하는 저, 제 친구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고…….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게 어디 사람 맘으로 되나요.”
“크응.”
미아가 코를 훌쩍이자 몇몇 영애들은 까르르 웃기도 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온화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릴리벳은 기가 막혔다. 정치, 사회, 경제 등 대국적인 일에 신경 쓰진 못할망정 연애놀음이라니. 그걸 저렇게 즐기다니.
‘이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건가?’
이 사달을 만든,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영애는 아예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래요.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면 확실해요! 미아 양은 이기적인 게 아니에요. 아니, 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정말요?”
“네! 이건 아무리 봐도!”
“아무리 봐도?”
영애가 몹시 흥분해 테이블을 탕 내리칠 때였다.
“사……!”
“산드라 양.”
그 순간 릴리벳의 차가운 목소리가 사위를 갈랐다. 주변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이 싸늘해졌다.
“재밌는 이야기이긴 한데, 오늘의 대화 주제랑은 조금 안 맞는 것 같죠?”
릴리벳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압박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크라우스 공작가의 영애다운.
“그……. 네에…….”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산드라 양은 결국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산드라의 답을 기다리던 미아는 당황해 릴리벳과 산드라를 번갈아 보았다.
릴리벳은 그런 미아를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아 양. 그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행여나 착각하진 않는 게 좋겠어요.”
“네……?”
릴리벳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이유가 뭐가 됐든, 당신은 폐하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어요. 황후에 어울리는 건 나예요.”
* * *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미아를 보며 릴리벳은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결국 오늘은 하나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이번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미아의 덜떨어진 면이 다른 이들에게 옮은 듯했다.
“하아…….”
릴리벳이 한숨 쉬었다.
‘오늘 한 행동을 보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아. 결국 싸워야 하겠구나.’
릴리벳이 고개를 저었다. 싸움은 싫다. 무가치하니까. 그러니 알아서 고개 숙여 주었다면 좋았으련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누군지 보여 주는 수밖에.”
* * *
미아는 황궁으로 돌아왔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어쩐지 뺨에서는 열기가 식지 않았다.
속에서도 뭔가가 몽글몽글 피어올라,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뭔가 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렌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 그래도 세레니티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어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제인을 통해 편지를 부쳐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아가 중앙궁에 들어섰을 때였다.
‘응?’
그녀는 나선 정원에서 못 보던 그림자를 발견했다.
흰 로브를 입은 키 큰 남자였다. 그는 등을 돌린 채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짙은 녹색의 문양이 로브의 등 쪽에 수놓아져 있었다.
‘신전의 문장이잖아.’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전은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정확히는 아딜로트 대에서 갑자기 사이가 안 좋아졌다.
선황제 루드비히 사후,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신전은 아딜로트가 핍박받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지켜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딜로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신권을 압박했고, 덕분에 신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황실에서 부르는 게 아니라면 신관은 황궁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조금 의아해진 미아가 저도 모르게 남자 쪽으로 다가갔다.
사박.
풀을 밟는 소리가 나자 남자가 흠칫했다.
“누가 계신가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린 순간 미아는 드러나지 않게 살짝 놀랐다.
신관은 젊었고, 생각보다 미남이었다. 그는 깨끗한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앞이 안 보이는구나.’
미아가 바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지나가다가 뭘 하고 계신지 궁금해서!”
“그러시군요.”
신관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모으고 있던 손을 펼쳤다.
“저 역시도 길을 가다 이런 걸 발견해서 고민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미아가 신관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솜털이 돋아난 작은 새 한 마리 삐약거리고 있었다.
“새끼 새네요?”
“네. 떨어져서 울고 있던 것을 들었어요.”
고개를 들자 높은 가지에 새 둥지가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부모로 보이는 새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앞이 안 보여서…….”
그런 것치곤 둥지 위치를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지만, 가끔 능력이 뛰어난 신관은 특별한 감각이 발달한다고도 들은 것 같았다.
미아가 선뜻 말했다.
“그럼 제가 올릴까요?”
“네?”
미아의 말에 신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려면 나무를 타야 합니다만……. 목소리를 들으니 자매님이신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뭐 어려운 거라고.”
미아가 선선히 대답하며 구두를 벗었다.
“제가 걔 좀 데려갈게요?”
혹시라도 갑자기 손이 닿으면 놀랄까 봐 한 말이었다.
신관은 그런 미아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부탁드립니다.”
미아는 빽빽거리며 우는 새끼 새를 건네받아 옷자락 사이에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웃샤.”
그리고 바로 나무줄기를 붙잡았다.
‘누가 보면 민망하니까 빨리 끝내야지.’
다행히 ‘미아 셀레스티얼’은 운동 신경이 정말 좋은 편이었고, 미아는 금방 나뭇가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으. 얘들아, 쪼지 마!”
둥지에 가까이 다가가자 부모 새들은 부리로 미아를 쪼아 댔다.
그때, 아래쪽에서 신관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
그러자 새들은 곧 잠잠해졌고, 미아는 그 틈에 잽싸게 새끼 새를 둥지로 돌려놓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무사히 집에 돌아갔어요!”
“감사합니다. 지나다니는 분이 안 계셔서 도움을 청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는데…….”
신관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요아힘과 비슷한 듯하지만, 요아힘보다는 좀 더 치유계에 가까운 선한 미소였다.
‘요아힘은 쪼끔…… 구렁이 같지.’
갈색 머리의 재상을 떠올린 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요즘 들어 요아힘은 좀 더 의중을 알 수 없어졌다.
가끔 마주치면 잠깐이라도 꼭 옆에 있다 가곤 했다. 꼭 혼자 남은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 같다가도, 대화 내용은 은근히 자신이 황궁을 떠나길 바라는 눈치였다.
‘나도 모르게 요아힘에게 실수라도 한 걸까?’
그때, 신관이 불쑥 말했다.
“다치셨나요?”
“네? 어라?”
그러고 보니 종아리가 약간 따끔했다. 미아가 드레스를 살짝 걷어 올렸다. 나무껍질에 스쳤는지 스타킹이 찢어지고 피가 살짝 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알았지?’
미아가 놀라기도 전에 신관이 말했다.
“치유해드릴게요. 잠시만 그렇게 계시겠어요?”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미아 앞에 무릎을, 그것도 양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미아가 놀라는 사이 정확히 다친 부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신관의 손에서 빛이 한번 터져 나왔다.
“와!”
종아리를 살핀 미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 있었다.
“대단해요! 다른 신관님을 본 적이 이지만 이 정도로 빠르고 말끔한 건 처음 봐요!”
“감사합니다.”
금발의 신관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인사가 늦었군요. 드미트리라고 합니다. 드높은 곳의 여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미아예요!”
“미아 님이시군요.”
드미트리의 여상스러운 대답에 미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나?’
아무리 신관이래도 황제의 애완동물에 대해서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도 한데.
미아는 그가 품계는 높고 세상 돌아가는 일은 잘 모르는 수도사 같은 사람이리라 대충 짐작하고는 활짝 웃었다.
“그런데 황궁엔 어쩐 일이세요?”
“높은 분을 따라 왔습니다. 저까지 올 필요는 없을 텐데, 거절할 순 없어서…….”
그때였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뭔가가 불쑥 튀어나와 미아의 시야를 가렸다.
“페르?”
놀란 미아의 중얼거림에도 페르디안은 미아를 보호하듯 서서 드미트리만을 응시했다.
“드미트리 신관.”
시선이 무거웠다.
“키토 후작. 오랜만에 뵙는군요.”
디미트리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이미 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아한 금발에 다정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디미트리와, 차갑고 냉기가 뚝뚝 흐르는 흑발의 페르디안은 상당히 대조되었다.
“다른 뜻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영애께서 저를…….”
“본인의 입장이 어떤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자중을 부탁드립니다.”
페르디안의 말이 날선 것과 별개로 미아는 살짝 놀랐다.
‘페르가 존댓말을 써?’
페르디안은 키토 후작이다. 오르퀘니나에서 그가 존댓말을 써야 할 상대는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기본적으로 황권이 강한 시대이기 때문에, 정말 어지간한 위치가 아니고서야 신관에게 존대할 이유는 없었다.
“……제가 실수했군요. 자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드미트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아 님.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신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어디에 걸리지도 않고 유령처럼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페르디안이 미아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잿빛 눈이 살짝 찌푸려진 게 보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사, 산책을 좀……?”
“저자와는 무슨 대화를 했나.”
“그다지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어요. 새끼 새가 떨어져 있길래 제가 올려 주었을 뿐이에요…….”
미아가 슬슬 눈치를 보자 페르디안은 한숨과 함께 미간의 힘을 풀었다.
“아까 그자와는 더는 엮이지 마라.”
“누군데요?”
페르디안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차기 대신관이다.”
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곧 깨달음을 얻었다.
이 타이밍에 차기 대신관이 레벤토르에 와 있다는 것. 그건 드디어 원작의 마지막 사건이 진행된 차례라는 의미였다.
그 사건은 아딜로트가 사실은 슈뢰더 황가의 적통이 아니라는 어느 귀족의 고발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