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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38화 (138/193)

138화

미아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자 그는 평소의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희미한 조바심만이 남아 있었다.

찡그린 눈매 너머로 흔들리는 붉은 눈은 평소의 아딜로트 같지 않았다.

“아니면…… 그냥 이참에 자연스럽게 나를 밀어내고 싶은 거야? 내가 네 바람과 달리, 평범하지 않아서?”

“아니야!”

미아가 부지불식간에 외쳤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눈이 흐려졌다.

“그런 게 아니야. 그치만 아딜, 이건…….”

괴로운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아딜에게 너무 좋은 기회잖아…….”

아딜로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그깟 기회가 없으면 목적을 이루지 못할 사람 같아?”

“아딜, 상대는 크라우스 공작이잖아……. 크리소르잖아.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돌아가게 되잖아.”

“그게 중요해?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도 상관없어?”

“중요해. 레아 황비님의 원수를 갚아야 아딜이 내내 바라던…….”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도, 상관없어?”

아딜로트가 딱딱 끊어 말했다. 냉정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어떤 간절한 외침을 미아는 바로 눈치챘다.

미아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상관없지 않아.’

그게 미아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미아의 머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보았다.

‘하지만 릴리벳과 결혼하면 아딜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어. 아딜로트는 해피엔딩을 맞아야 해.’

미아가 울먹이듯 속삭였다.

“모르겠어…….”

그 순간 아딜로트는 미아가 본 적도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공허하고 아주 슬프고, 너무나도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지켜보던 미아가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전해져, 미아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난 정말 아딜이 행복해졌으면 좋겠고, 요아힘도 이게 정말 좋은 기회라고……!”

“하.”

아딜로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넌 정말…… 이성적이어서 좋겠다.”

그는 자조적인 한마디를 내뱉고서 미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이를 단단히 악문 채 미아를 스쳐 지나갔다.

* * *

며칠 뒤, 미아는 릴리벳의 초대를 받았다. 초대장을 건네준 제인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핑계는 이 제인이 책임지고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초대를 수락했다. 어차피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

그리하여 미아는 나는 새를 떨어뜨리다 못해 죽은 새도 날게 한다는 크라우스 공작저에 입성했다.

공작저의 응접실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화려했지만 미아에겐 아무 감흥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대체 아딜에게 무슨 말을 했어야 했는가’만 반복되고 있었다.

우울한 얼굴로 응접실의 천사 그림을 올려다보는 미아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드나요? 안목이 높군요. 안젤라 모스의 <강림하는 천사>예요.”

미아가 고개를 돌리자 녹색 벨벳 리본으로 머리띠를 한 릴리벳이 싱긋 웃고 있었다.

“초대 승낙해 줘서 고마워요, 미아 양.”

“네에.”

미아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릴리벳은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겠어요?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저를요?”

“네.”

릴리벳은 미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운지 앞서 걸었다.

그녀를 따라가자, 곧 귀엽고 화사한 장식으로 치장한 티 룸이 나왔다.

“모두 환영해 주세요. 미아 양입니다.”

릴리벳은 마치 여왕처럼 티룸에 모인 영애들에게 고했다.

“어서 와요, 미아 양.”

“잘 왔어요! 좋은 선택을 한 거예요.”

“……?”

미아는 영문도 모르고 릴리벳 옆자리에 앉혀졌다. 릴리벳은 모두에게 일일이 차를 따라 주곤 싱긋 웃었다.

“모두 모여 줘서 고마워요. 오르퀘니나의 미래가 밝군요.”

“다 릴리벳 양 덕이죠!”

“후후. 괜히 겸양 떨진 않을게요. 그래요. 모두 저와 같이 오르퀘니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길 바라요.”

“릴리벳 양이 있다면 가능할 거예요. 양과 함께하게 되어서 기뻐요!”

사교계에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릴리벳은 정말로 사람들을 완벽하게 자기 편으로 포섭한 듯했다.

‘관심 없지만.’

미아는 우울한 다람쥐처럼 오독오독 쿠키만 오물거렸다.

“하아.”

그러다 한숨을 쉬었다.

‘릴리벳을 다시 보면 뭔가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는데.’

정리되긴커녕 더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미아가 우울한 얼굴로 쿠키만 쓸어담고 있자, 릴리벳은 미아를 흘끔거리다 물었다.

“미아 양. 고민이 있나요?”

미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뭔가요? 자진해서 물러나 주었으니 얼마든지 상담해 줄게요.”

릴리벳이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는 듯했으나 오해를 고쳐 주기엔 귀찮았다. 게다가 원작에서도 릴리벳은 말이 잘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머리가 좋은 건 사실이었기에 일순 미아는 눈을 빛냈다.

‘맞아. 릴리벳은 똑 부러지잖아. 답을 알지도 몰라.’

미아는 들고 있던 쿠키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어떤 신사분이 자기를 좋아하는 거 같대요…….”

“…….”

“저, 저 말고 제 친구 이야기예요!”

황급히 강변했지만 미아의 귀 끝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애들이 침묵했다.

‘자기 얘기잖아.’

‘자기 얘기네.’

‘황제가 자기 좋아한다고 자랑한 거지, 지금?’

릴리벳도 잠깐 뒤통수를 맞은 얼굴로 할 말을 잊었다. 그녀는 곧 나직한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남 얘기인 척 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자랑하는 고도의 화법을 사용하다니. 제법이었다. 과연 카르디날레 공작 영애와 릴리 후작 영애를 격퇴한 여자다웠다.

‘아마 황제의 총애를 드러내서 나를 물러나게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게 통할 줄 알고?’

마음을 다잡은 릴리벳이 싱긋 웃었다.

“그렇군요. 어떤 신사분이 친구분께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다고요.”

“네에. 친구가…….”

“그런데요?”

“그런데 그 신사분한테 혼담이 들어왔어요. 엄청 좋은 혼담이요. 객관적으로 되게 괜찮은 조건이에요.”

“…….”

생각 외로 후한 평가에 릴리벳은 멈칫했다. 물러나게 하려는 게 아닌가?

“혼담이 성사되면 신사분한테 더 이로울 거란 걸 아니까, 친구는 거절해야 맞는데…….”

“그럼 거절해야죠.”

“근데…… 그러기가 싫대요.”

미아가 분홍색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릴리벳을 올려다보았다. 본인도 깨닫지 못한 듯했지만 뺨은 벌써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건 뭘까요?”

“…….”

“사.”

텁.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떤 영애가 흥분해서 입을 열려다 재빨리 다른 영애의 손에 가로막혔다.

릴리벳이 달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지금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가요?”

“릴리벳 양은 똑똑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미아의 눈은 점점 더 애처롭게 반짝였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려는 고도의 화법인가?’

릴리벳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답했다.

“일단, 객관적으로 상대가 아주 좋은 조건인 건 맞는 거죠.”

“네!”

경청 자세를 취한 미아가 눈을 흐리고 작게 덧붙였다.

“근데 좀 재수 없는 성격이긴 해요.”

“…….”

요년이?

“근데 어쨌든 가문이 엄청 좋아요. 예쁘고, 머리도 좋아요!”

“……알겠어요. 그리고 객관적으로 친구분은 그 상대에게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 상태인 거네요.”

“네!”

“상대 신사분은 꽤나 신분이 높은 분 같고요.”

“네!”

“그럼 확실하네요. 그건 그냥 이기심이에요.”

릴리벳이 빙그레 웃었다.

“자기보다 신분 높은 남성을 잡아서 어떻게든 신분 상승을 하고 싶어 하는 저열한 욕구. 그로 인해 상대가 어떤 처지가 되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비열한 도덕성. 그게 정답이죠.”

“그런!”

미아가 놀라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순식간에 다시 우울해졌다.

“역시 그런 걸까요…….”

“네. 그럼요.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서는 절대 해선 안 될 짓이죠. 남의 앞길을 가로막다니요.”

“그치만 아, 아니 그 신사분도 되게 머리가 좋거든요. 그런데도 그 신사분이 저, 아니 제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눈이 삔 거예요. 남자들은 좀 그렇잖아요. 사랑이 뭐라고.”

“사랑!”

미아가 다시 숨을 들이켰다. 희고 반질반질한 뺨에 홍조가 들이찼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수줍게 물었다.

“역시 그 신사분이 저, 아니 제 친구를 사랑……하는 걸까요?”

“…….”

“당.”

텁.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떤 영애가 다시 옆자리의 영애에 의해 가로막혔다.

릴리벳이 이마를 짚었다.

‘난 왜 여기서 이런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있는 거야…….’

어쩐지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주변 영애들 역시도 아까의 기품은 어디 가고 이런 천박한 이야기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덕분에 릴리벳의 말투는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그게 중요할까요? 그 신사분을 위해서라면 거절하는 게 이치에 맞잖아요.”

“그건 그래요…….”

“신사분을 거절했을 때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기라도 해서 그런 건가요? 그런 거라면 제가 공작 각하께 말씀드려 크라우스 재단의 지원을 부탁드릴게요.”

“그런 걱정은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뭔데요?”

릴리벳이 조금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미아의 큰 눈이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이윽고 그녀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냥…… 앞으로 못 보면 싫을 것 같아요…….”

“…….”

“주말농장 안 올 거 같아……. 안 어울려…….”

미아가 킁 하고 훌쩍였다.

“이건, 이건 나쁜 생각이죠?”

“아니죠!”

그때 영애 한 명이 끼어들었다.

내내 흥분한 얼굴로 뭔가 말하고 싶어 하던,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 영애였다.

“어떻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무 자르듯 딱딱 이성적으로 계산되겠어요?”

“포, 폴커 양.”

주변의 영애들이 말리기도 전에 미아가 애처로운 눈을 하고서 물었다.

“그, 그래요? 이상한 거 아니에요? 배려 없고,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네?”

“당, 아니, 친구분이 그 신사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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