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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37화 (137/193)

137화

“제가 말로 전해드리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무릎에 턱을 얹은 미아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틀린 걸까요?”

“폐하를 피하시는 게요?”

“네.”

잠시 침묵한 요아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아 님은 저와 사고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즉 이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 낸 상태일 겁니다.”

“…….”

“냉철하게 상황만 보자면 폐하는 릴리벳 양과 혼인하는 게 훨씬 좋습니다. 그걸 미아 님도 아시겠죠.”

그렇게 말한 요아힘의 연둣빛 눈이 더 가늘게 미소를 띠었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한 사람에게 질문하는 이유는 뭔가요? 확신을 위해서? 아니면 핑계가 필요해서입니까?”

미아가 멍한 얼굴을 했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딜이 왜 요아힘을 재상 시키는지 알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치만, 그렇겠죠. 역시 릴리벳이 아딜에게 더 도움이 되겠지…….”

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힘없이 웅크린 어깨를 바라보며 요아힘은 여전히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중에는 미아를 위로할 수 있는 말도 있었지만, 요아힘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차가운 진실을 택했다.

“그럼 왜 망설이시는 겁니까? 미아 님은 계산이 빠른 분입니다. 의외로 냉정하고요.”

“…….”

“왜, 망설이시는 건가요? 릴리벳 크라우스 양이 더 폐하께 도움이 된다는 걸 아시면서도.”

미아의 눈이 흐려졌다.

“그건…….”

“이성적으로 저를 납득시킬 만한 근거가 없는 건가요?”

“제가 요아힘을 납득시켜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논점 회피입니다, 미아 님. 이성적인 근거가 없다면…….”

요아힘이 잠깐 시간을 둔 뒤 물었다.

“감정의 문제인가요?”

“……!”

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건 부끄러움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정말 비슷하다니까.’

요아힘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제 감정을 논리로 설명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회피하고.

감정에 흔들려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이다. 미아는.

‘그래도 저보단 낫군요.’

그 감정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그리고 비겁하게 푸는 자신보다는 말이다.

“폐하 곁이 아니더라도 미아 님은 잘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요아힘의 조용한 말에 미아가 움찔했다.

고개를 돌려 요아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런 말을 하는 요아힘을 향한 배신감 따위는 없었다.

미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치에 맞고 말이 되면 상대에게 화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치에 맞고 말이 되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에서 자신이 ‘소’가 되는 것도 감당할 사람이었다.

“신변의 위협이 걱정된다면 키토 후작 각하께 몸을 의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페르가 그렇게 해 줄까요? 군식구만 될 텐데……. 그리고 페르는 미혼인데, 결혼도 안 한 남자 집에 얹혀살아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저도 있고요.”

“결혼도 안 한 요아힘 집에 얹혀살아도 되는 걸까요…….”

그렇게 따지자면 아딜로트 역시도 미혼의 남성이었는데, 그는 괜찮은 걸까.

역시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그녀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본인만 모를 뿐.

하지만 요아힘은 미아가 그걸 알지 못하길 바랐다.

그는 책사였고,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걸 물고 늘어지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될 겁니다.”

요아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되는 정도가 아니라…….”

“……?”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미아가 고개를 든 순간, 요아힘이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 때문에 가 봐야겠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휙 가 버렸다.

* * *

이후 며칠간 미아는 아딜로트와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 놀라운 건 그를 제외한 모두와는 마주쳤다는 점이다.

‘폐하께서도 노력 중이십니다.’

이건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 한 말.

‘그냥 재무부로 오시죠!’

이건 재무부의 아르르어쩌고의 말.

‘상무부는…… 싫으시겠죠? 아쉽다.’

상무부의 크리스티아네의 말.

‘그냥 의학 배워서 의원 하시죠, 아가씨!’

‘마, 맞아요! 그냥 의원을……!’

‘아니지, 렌나! 아가씨는 황후를 하셔야지!’

‘예……?’

‘답답해 죽겠네. 크라우스 공작은 대체 뭔 생각인 거야!?’

황립 의료원의 엠브라와 렌나.

그밖에 왠지 모르게 자꾸 폭신폭신한 것을 안겨 주는 궁인들 다수.

미아는 새삼 자신이 황궁에서 오래 지냈다는 것을 실감했다. 덕분에 미아의 마음속에서는 황궁을 나가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역시 골치 아픈 문제는 그냥 넘겨 버리는 게 편해!’

미아는 흥얼거리며 궁을 배회했다. 오늘은 또 어디 가서 시간을 죽일지 고민이었다.

“크라우스 공작가면 위자료도 많이 주겠지? 그걸로 주말농장이나 차릴까?”

중얼거리던 미아는 자신이 어느새 중앙궁 근처까지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헉. 나도 모르게.’

행여나 아딜로트에게 들킬까 뽈뽈 걸음을 옮기던 미아는 슬쩍 아딜로트의 집무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일하고 있으려나?’

그때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창가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

아딜로트였다. 그는 놀란 얼굴로 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한 사흘 피했나.’

오랜만에 보는 아딜로트는 어쩐지 전보다 수척하고 예리해 보였다.

‘피곤한가 봐.’

미아는 창문을 여는 그에게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앞으로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인사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미아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하! 폐하!”

뒤에서 고함이 들렸다.

미아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선 아딜로트가 창문을 뛰어넘으려 하고 있었고, 슐츠 공작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서, 설마 나 잡으러 오는 거야?’

미아는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다행히 요 며칠 주변을 배회한 덕에 황궁 지리는 쏙쏙 익혀 놓은 참이었다.

그리고 아딜로트도 그 타이밍에 탈주에 성공한 듯했다.

“폐하! 여긴 3층이란 말입니다!”

슐츠 공작의 절규가 미아의 고막을 울렸다. 미아는 덤불을 뛰어넘어 좀 더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잡았다.”

쾅!

얼마 안 있어 팔 하나가 쭉 뻗어나 와 미아가 지나려던 길을 가로막았다. 찔끔해 고개를 들자, 그곳에선 사람을 죽이려 할 때보다 더 살벌한 얼굴의 아딜로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미아는 그의 손바닥에 얻어맞은 나무가 빠직하고 갈라지는 것을 보자마자 양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

아딜로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늘 어깨에 걸쳐 두고 있던 코트는 그를 잡아당기고 있던 슐츠 공작의 손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는 정복 차림이었다.

“하.”

아딜로트는 더운지 윗단추를 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미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멀리서는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재상님의 명령이다! 폐하를 찾아!”

“…….”

미아가 식은땀을 흘렸다.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야지. 이거부터 끝내고.”

소매까지 걷어 올린 아딜로트가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다.

“왜 피해?”

단도직입적이었다.

“피, 피하는 건 아니었는데…….”

미아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에 뒤늦게 주변에 핀 장미 덤불이 눈에 띄었다.

‘여긴…….’

세레니티와 아딜로트가 처음 만나는 장미 정원.

그리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사랑을 맹세하는 곳.

여름이라 장미의 계절은 이미 지나 있었지만, 그래도 덤불마다 탐스러운 꽃송이가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아딜로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미아에게 말했다.

“말해 두는데 난 릴리벳 크라우스랑 결혼 안 해.”

“…….”

“내가 못 미더워?”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아딜로트의 말에 미아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내가 또 뭐 잘못했어?”

붕붕. 미아가 다시 도리질쳤다.

“그럼 뭔데.”

“…….”

미아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소설 속에서 왜 꼭 여자주인공들이 입을 다무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 자신도 확신을 못 하겠는데 무슨 말을 해…….’

게다가 남자주인공들은 늘 너무 착해서 문제다. 아딜로트도 사람은 좀 죽였지만 본판은 착하니까.

‘아마 내가 고집부리면 뭐든 들어주겠지.’

미로미스 상회와 지로티 전로로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는데.

‘하지만 여기서 릴리벳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까지 할 수는 없잖아…….’

그것도 왜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미아가 말이 없자 아딜로트는 초조해졌는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미아의 손에 닿았다.

미아는 움찔했지만 그걸 피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혹은 조금 안심했다는 듯이 아딜로트가 손가락을 얽어왔다.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너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잖아.”

그가 망설이다 속삭였다.

“내가 무슨 마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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