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확실히, 그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이 이 정도로 숙이고 나오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잡음 없이 거절하려면 이쪽이 나을 것이다.
“…….”
깊게 한숨을 쉰 아딜로트는 곧 붉은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알겠다고 답장해.”
“예?”
“따로 만나서 직접 거절하든가 해야겠어.”
“예. 그리 보내겠습니다…….”
슐츠 공작이 답신을 위해 방을 나서는데도 요아힘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란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후…….”
아딜로트는 재차 한숨을 쉬고는 좁아진 미간을 문질렀다. 어쩐지 짜증이 났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그 일 이후로 미아는 묘하게 아딜로트를 피하는 기색을 비쳤다.
아딜로트는 차마 그걸 나무랄 수도 없었다. 제가 빨리 릴리벳 크라우스를 쳐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릴리벳과 만나기로 한 날.
아딜로트는 분홍색 터럭 하나 보지 못한 것에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덕분에 그는 더 예기를 뿜어냈고, 그가 팔짱 낀 자세로 바라만 보아도 귀족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크라우스 공작의 영향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여기든 저기든 크라우스, 크라우스.’
아딜로트가 출입이 통제된 나선 정원으로 향했다.
‘짜증나는군.’
얼마 안 있어 그의 시야에 릴리벳 크라우스가 보였다.
양산을 쓰고 연한 분홍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객관적으로 꽤 아름다웠으나, 아딜로트는 그녀의 드레스 색을 보자마자 짜증부터 치밀었다.
‘안 어울려.’
하지만 그는 황제답게 무심한 표정으로 릴리벳에게 다가갔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릴리벳은 아딜로트를 보고 당당하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아딜로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크라우스 공작 좀 말려 주지.”
그리고 대뜸 본론부터 말했다.
릴리벳은 놀란 듯했으나, 이내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웃음쳤다.
“제가 무슨 연유로요?”
“그대도 굳이 나와 혼인하고 싶은 건 아닐 텐데. 목이 여러 개가 있는 게 아니면.”
“귀족의 목은 하나죠. 그래서 더 가치 있는 것 아닌가요?”
릴리벳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아딜로트는 제자리에 서서 팔짱 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애초에 왜 공작 각하의 제안을 거절하시려는 거예요? 저희가 혼인한다면 오르퀘니나는 정말 좋아질 거예요. 누구도 황실을 넘볼 수 없을 테고요.”
릴리벳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레아 황비님의 원수도 갚을 수 있지 않나요?”
“…….”
그 말에 아딜로트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달라졌다. 릴리벳이 흠칫했고, 아딜로트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 줘서 고맙군. 내 어머니를 사형시키는 데에 크라우스 공작가가 가장 큰 힘을 썼다는 건 알고 말하는 거겠지.”
릴리벳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지나간 일입니다.”
“…….”
“폐하는 오르퀘니나의 가장 높은 분이십니다.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으시잖아요. 크라우스 공작가와 힘을 합치는 게 폐하께도 훨씬 좋은 일이라는 걸 아시지 않나요?”
“…….”
“넓고 높게. 큰 것을 보세요. 폐하.”
그렇게 말하는 릴리벳의 시선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의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었다.
그 순간, 아딜로트는 지하 감옥 앞에서 과거의 자신을 위해 펑펑 울던 미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아는 그 ‘지나간 일’ 때문에 울어 주었다. 그게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안간힘을 다해 변명했다.
그 냉정한 여자가. 다람쥐같이 생겨선 맨날 차가운 말이나 하는 여자가.
릴리벳 위에 겹쳐지는 분홍색 잔상에 아딜로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역시 그대와는 혼인할 수 없어.”
릴리벳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시다면 역시 저 말고 크라우스 공작 각하를 설득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통하지 않겠지만요.”
“그러지.”
“잘못된 선택을 하시는 거예요. 폐하. 폐하는 어차피 저와 혼인하시게 될 겁니다. 그게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에요.”
아딜로트가 실소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난 분홍색이 더 잘 어울리는 체질이라.”
“……?”
“두 번 남았군.”
의아한 얼굴의 릴리벳을 두고 아딜로트는 등을 돌렸다.
* * *
릴리벳은 나선 정원 저편으로 멀어지는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저렇게 사사로이, 감정적으로 굴다니.’
폭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업무 처리는 나쁘지 않아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라리 그녀 쪽이 더 말귀를 잘 알아들었던 것 같아.’
뭉개진 복숭아 타르트를 보고 우울한 표정을 짓던 미아를 떠올린 릴리벳이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았다.
미아는 황궁에 있기엔 너무 순수했고, 황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역시 내가 황후가 되는 게 낫겠어.’
애초에 자신은 크라우스 공작이 진작부터 황후 감으로 키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황후가 되는 게 오르퀘니나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어리석은 황제…….’
릴리벳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황후가 되기 위해 지지자들을 만날 시간이었다.
* * *
황궁 레벤토르의 황태후 궁.
평소와 달리 정원이 아닌 응접실에서 크리소르는 누군가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크리소르의 얼굴에는 곧 노기가 들어찼다.
“플로리안!!”
“공작이라 불러 주십시오, 황태후 폐하.”
황태후의 노호에 플로리안 크라우스 공작은 시끄럽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쾅! 황태후의 손바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지금 그깟 게 중요한가?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아딜로트를 감히 크라우스 공작가와 혼인시키려 해!”
“그게 문제입니까? 그리고 가주는 저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지금도 기고만장한 그놈이 크라우스 공작가와 결탁하면……!”
플로리안 크라우스가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다시 한번 말씀, 아니……, 말하지만, 가주는 나란다. 크리소르.”
크리소르가 움찔하자, 크라우스 공작은 그제야 다시 심드렁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황제의 세력이 너무 커졌어……. 크라우스 공작가도 이제 그를 무시할 수 없지. 이게 최선이야.”
“그럼 내 아들의 복수는 어찌한단 말이야!”
“그건 네 일이지. 크리소르.”
“……!”
냉정한 대답에 크리소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녀 루넬이 당황해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그녀는 위태로워 보였다.
플로리란 크라우스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도 태연히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황태후 폐하도 크라우스 공작가의 일원이시죠. 폐하를 외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는 건?”
“신전 측으로 연락을 취하셨더군요.”
그의 녹색 눈이 흘낏, 크리소르를 바라보았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쉬쉬하던 추문을 들출 생각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
크리소르의 눈이 흔들렸다. 그 일에는 크라우스 공작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다행히 크라우스 공작은 가볍게 말했다.
“도와드리죠. 릴리벳의 혼인 전까지는…… 물밑에서 도와드리는 것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큭…….”
인심 써서 도와준다는 식의 태도였지만 크리소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크라우스 공작은 피식 실소를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이게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폐하……. 무운을 빌지요.”
* * *
“폐하가 크라우스 영애랑 따로 만나셨다며?”
“나선 정원에서 오붓하게 대화하셨다던데?”
“이러다 진짜 결혼하시는 거 아냐?”
“하겠지. 크라우스 공작가인데. 여기서 물리면 크라우스 공작가 쪽팔려서 어떻게 해?”
빨랫감을 든 하녀들이 쑥덕거리며 황궁의 뒤쪽 통로를 지나쳤다.
미아는 나무 위에서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저 이야기였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미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번거로워진 상태였다.
덕분에 이렇게 나무 위에서 시간을 죽이는 거고.
‘슬슬 이 구역도 사람 많아질 시간이니까 자리를 옮길까.’
그렇게 생각한 미아는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려 풀숲으로 몸을 가린 채 이동했다. 그녀가 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무가 우거진 정원을 지나칠 때였다.
“미아 님?”
흠칫.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아힘?”
미아가 양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리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어떻게 본 건지도 모를 먼 거리에서 요아힘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미아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음……. 개미 구경을…….”
“오늘 회의 시간이 앞당겨졌습니다. 이쪽은 곧 사람이 많이 몰릴 겁니다. 다른 곳으로 가실까요?”
눈치 정말 빠르네.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아가 물었다.
“요아힘은 저한테 불쌍하다는 눈빛 안 보내네요.”
“저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 냉정한 점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요아힘이 앞서가다 웃었다.
“감사합니다.”
곧 자그마한 공터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돌로 만들어진 벤치도 있었다.
“여기라면 쉽게 들키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미아가 쪼르르 벤치로 다가가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바로 갈 줄 알았던 요아힘은 의외로 그녀 옆에 앉았다.
“회의 시간 당겨졌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요아힘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군.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보았다. 얼마 안 있어 미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딜은 어때요?”